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의지처로 삼는 것만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게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가장 믿을 수 없는 것도 자신의 몸과 마음입니다.
몸과 마음이 있어서 관용과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지만
오히려 몸과 마음이 있어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악행을 일삼아
괴로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은 선행의 토대가 되기고 하고
반대로 악행의 토대가 되기도 합니다.
선행과 악행의 선택은 인간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선택하는 방법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이 있으면 선행을 하고 알아차림이 없으면 악행을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때만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이제 알아차리고 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느냐가
여러분의 선행과 악행을 결정지을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느낌은 괴로움을 가속시키는 원인이 되지만
느낌을 알아차리면 깨달음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수행자들이 대상을 알아차릴 때 느낌으로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스승의 지속적인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감성적인 사람 중에서 영민한 사람이 해야 하는 수행입니다.
느낌이 강한 사람은 대상을 오래 집중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들떠 있으며 한 가지 일을 오래 계속하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느낌이 강하게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수행자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효과가 있습니다.
수행자들이 수행을 저마다 근기에 따라서
네 가지 염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하면 훨씬 유익한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한국명상원에서는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함께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종합적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먼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기본으로 한 뒤에
자신의 성향에 맞는 수행을 선택하면 쉽게 번뇌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미얀마에서 쉐우민 스승을 만나게 되어 느낌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배운 뒤에
수행에 대한 수직사고에서 수평사고를 갖게 되었습니다.
신수심법 사념처를 균형되게 하기 위해서는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으로 국한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느낌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때
비로소 마지막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느낌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
수행자여러분!
부처님께서 대념처경에서 느낌을 알아차림에 대해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 하신 내용을 들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느낌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세간의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세간의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출세간의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출세간의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세간의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세간의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출세간의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출세간의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세간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세간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출세간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출세간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느낌에서 느낌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느낌에서 느낌을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느낌에서 느낌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느낌이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느낌이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단지 느낌이 있다는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
느낌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그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느낌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수행자 여러분 !
느낌의 종류는 분류하기에 따라 매우 많습니다.
맨 느낌과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으로 분류하기도하고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덤덤한 느낌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간의 느낌과 출세간의 느낌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사실 아는 것이 모두 느낌이기 때문에 느낌에 대한 분류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느낌은 아는 느낌과 모르는 느낌 밖에 없습니다.
아는 느낌은 알아차림이 있는 느낌으로 지혜의 느낌이며,
모르는 느낌은 알아차림이 없는 느낌으로 무지의 느낌입니다.
느낌이 아무리 많아도 알아차리면 단지 그것은 느낌에 불과할 뿐입니다.
느낌은 오온의 수(受)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있고 마음의 작용이 있는데, 마음의 작용 안에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느낌은 마음과 항상 함께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함께 병행하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볼 수 없지만 수상행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났을 때 화가 난 마음을 알아차릴 수도 있고
화가 난 마음으로 인해 생긴 느낌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짧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느낌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대념처경은 근기 있는 수행자들에게 하신 법문이라서 핵심적인 내용만 있습니다.
또 대념처경은 여러 가지 수행을 총망라한 내용이라서 간략하게 설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경전에서는 느낌에 대한 자세한 설법이 매우 많습니다,
특히 상윳따니까야에서 느낌에 대한 설명이 매우 많으며
아비담마에서는 마음과 함께 느낌에 대한 상세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시 한 번 부처님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느낌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세간의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세간의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출세간의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출세간의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세간의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세간의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출세간의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출세간의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세간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세간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출세간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출세간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수행자여러분!
이상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느낌의 종류인데 모두 아홉 가지입니다.
첫째, 즐거운 느낌
둘째, 괴로운 느낌
셋째,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넷째, 세간의 즐거운 느낌
다섯째, 출세간의 즐거운 느낌
여섯째, 세간의 괴로운 느낌
일곱째, 출세간의 괴로운 느낌
여덟째, 세간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아홉째, 출세간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이상 아홉 가지 느낌을 살펴보면
결국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세간과 출세간에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느낌이란 이들 세 가지 느낌들이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파생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느낌의 종류에 대해 혼란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불교에서 분류하는 숫자는 기본적인 것을 이렇게 다양한 상태에 따라 분류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숫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수행자여러분!
어떤 비구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라는 구절은
매우 단순하고 별로 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이처럼 단순한 구절의 반복에 사실 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어떤 느낌을 느끼거나 느낌을 느낄 때는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느껴야지
이 느낌을 두고 다른 느낌을 바라거나 또는 이 느낌을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경전의 내용에 있는 단순함 속에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경전 전편에 있는 일관된 구성이고 일관된 내용입니다.
수행자들은 반복된 글을 읽으면서 인내를 배울 것이며
계속되는 글의 내용에 대하여 인지할 때 수행자의 마음은 단순해 질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배울 것입니다.
이것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경전을 읽는 이익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란 매우 희귀하고 복잡한 것 인줄 알지만,
사실은 실재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의 보는 것이 진리를 보는 것입니다.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것은 오히려 관념이고 진실은 단순한 현상에 있습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법입니다.
그래서 경전의 이런 내용에 대해 싫증을 느낄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경전의 행간에 숨어있는 진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단순한 것에서 진리를 발견하려면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가 어떻게 느낌을 알아차려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설하셨습니다.
어떻게 느낌을 알아차리는가요?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는
그냥 ‘괴로운 느낌이 있네!’ 라고 알아차리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즐거운 느낌이 있을 때도
‘즐거운 느낌이 있네!’ 라고 알아차리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다른 것도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단지 대상이 거기 있어서 알아차리면 됩니다.
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단순의 미학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말씀 중에 ‘느낌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라는 말은
느낌을 느낄 때는 오직 느낌만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아야하는 것을 말합니다.
느낌을 느낄 때는 몸을 알아차려서도 안 되며, 마음을 알아차려서도 안 되며,
법을 알아차려서도 안 됩니다.
느낌을 느낄 때는 단지 느낌이외의 것에는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느낌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여기에서도 느낌 하나 만을 대상으로 하는 단순한 겨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아차릴 때 심심파적으로 하지 말고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을 생활화하여 지내야 하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 라고 안다고 했을 때
‘나는’ 이라는 것은 관용어입니다.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은 자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아닌 자신이 느끼는 느낌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서
나는 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는 느낌을 느낀다.’ 라고 할 때
정신과 물질이 느낌을 느끼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초기불교 > 붓다의수행법·위빠사나·묘원법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45 (0) | 2010.12.26 |
---|---|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44 (0) | 2010.12.26 |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42 (0) | 2010.12.26 |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41 (0) | 2010.12.26 |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40 (0) | 2010.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