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를 할 뿐만 아니라,
그 과보로 인해 겪는 고통이 있어도 그것을 고통으로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숙명적인 것으로 알거나 고통을 달콤한 것으로 압니다.
어리석음이 마음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있는 사람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잘못된 행위를 했어도 그것이 고통인지 압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알수록 지혜가 많은 사람입니다.
완전한 지혜가 난 사람은 그 고통을 모두 알았기 때문에
다시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고통으로 알지 못하는 자가 가장 어리석은 자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고통으로 아는 자는 고통이 될 일을 하지 않아서
모든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져 해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경전 구절에 ‘느낌을 느낀다고 안다.’ 라고 할 때 안다는 것은
느낌을 정확하게 겨냥하여 분명하게 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에는 그냥 알고 마는 것으로써
알아서 무엇을 어떻게 도모하겠다는 것이 없이 그냥 아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도 단지 알아차리는 것으로 그치는 단순한 알아차림을 뜻합니다.
수행자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느낌을 느끼거나,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이 길로 갈 때만이 열반을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즐거울 때는 그것이 즐거운 느낌이라고 알고, 즐거운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하며,
괴로울 때는 그것이 괴로운 느낌이라고 알고, 괴로운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하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고 덤덤할 때는 이것이 덤덤한 느낌이라고 알고,
덤덤한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가 느낌을 알아차릴 때 어떻게 하려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것들은 원인과 결과로 나타난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에 그냥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나타난 느낌은 찾아온 손님입니다.
그것들은 나타날 만해서 나타난 것이므로 찾아온 손님을 내치거나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찾아 온 손님을 ‘그냥 찾아 왔네!’ 라고 아는 것이 수행자의 역할입니다.
몸에 통증이 있을 때도 이것이 느낌이며,
슬픔, 비탄에 빠질 때도 이것이 느낌이라고 알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일어난 느낌에 개입하지 말고,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느낌을 단순하게 지켜보는 것으로 대해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즐거운 느낌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이거나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이거나 간에
일어났으면 일어난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서 엄마의 젖을 빨 때에도 즐거운 느낌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어린아이가 즐거운 느낌을 알고 빠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습관적으로 하는 행위는 알아차림이 없어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가 여러 가지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은 보통사람들이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누구나 좋은지 싫은지 압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는 것은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에
바르게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대상을 보고 반응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지
수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눈으로 대상을 보았을 때 보고 있는 것을 느낌으로 알면 그냥 본다는 느낌 밖에 없지만,
볼 때 예쁘다거나 밉다고 느끼면, 이것은 알아차림이 없는 것으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어떤 느낌이 되었거나
느낌과 하나가 되어서 알아차리지 않고, 일어난 현상으로 지켜봅니다.
그래서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대상을 분리해서 지켜봅니다.
이렇게 볼 때라야 비로소 대상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보고 있을 때 보고 있는 것을 느낌으로 압니다.
갈 때도 가고 있는 것을 느낌으로 압니다.
소리를 들을 때도 듣는 것을 느낌으로 압니다.
맛을 볼 때도 맛보는 것을 느낌으로 압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알 때는 내가 하고 내가 느낀다고 압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내가 한다고 알지 않고
단지 대상과 아는 마음이 부딪혀서 느낀다고 압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느낄 때는 단지 느낌만 있지 자아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르게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것이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얻는 지혜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분명한 견해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지금 누가 느끼고 있습니까?
이것은 누구의 느낌입니까?
지금 무슨 작용으로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 수행자는 분명하고 자신 있게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느끼고 있는 느낌은 어떤 자아가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느낌은 나의 느낌이 아닙니다.
이 느낌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부딪혀서
일어나는 느낌이라고 알아야합니다.
이처럼 느낌은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알아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느낌은 감각기반에 근거하여 일어나므로,
누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나의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느낌을 바라고 집착하여 느낌의 덫에 걸려서 삽니다.
이처럼 느낌은 감각기반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알아야
비로소 느낌을 바르게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 밝히신 느낌이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덤덤한 느낌입니다.
즐거운 느낌은 행복입니다.
괴로운 느낌은 불행입니다.
그리고 덤덤한 느낌은 무지의 느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행복과 불행이 단지 느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느낌은 항상 하지 않습니다.
느낌은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을 영원하게 누리려고 합니다.
행복이 있을 때도 그 행복은 느낌일 뿐만 아니라 일어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일어난 순간에 사라진 느낌을 우리는 기억하여,
그 느낌을 실재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계속 유지하고자 합니다.
이것들은 허상을 붙잡고 있는 결과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불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행도 느낌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불행을 겪었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의 마음이 그것을 경험합니다.
그게 나의 불행이 아닙니다.
단지 감각기관이 그것을 받아들여서 그 순간의 마음이 경험하고,
그 마음과 그 순간은 이미 사라져 버렸습니다.
단지 그것을 기억하여 느낌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라진 것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현재 여기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행복과 불행이 바로 느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유념하셔야 하겠습니다.
그것들은 바람과 같고 한 순간의 물결과 같습니다.
그것들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로 우리가 괴로워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를 도취하게 해서도 안됩니다.
주석서에서는 찌딸라산에 머무신 장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큰 스님이 아플 때, 아픈 느낌이 격렬해지자 끙끙거리면서 신음하고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젊은 비구가 큰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큰 스님 어디가 아프십니까?”
“음 아픈 특정한 곳이 없네. 단지 육체적 감각기반을 대상으로 하여 느끼는 느낌만 있네.”
“큰 스님 그러한 앎이 일어난 때부터 참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요?”
“음 나는 참고 있다네.”
“큰 스님, 참는 것은 매우 훌륭한 것입니다.”
이러한 대화를 하면서 큰 스님은 참았습니다.
헛배가 부른 체액이 심장까지 부풀어서 마침내 터졌습니다.
내장이 그의 침상에 더미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큰 스님은 그것을 젊은 비구에게 보였습니다.
“비구여! 이런 정도의 참음은 적절한가?”
너무 뜻밖의 현상에 젊은 비구는 말이 없었습니다.
이때 큰스님은 정진과 고요함을 함께 유지함으로써 판별력을 지닌 아라한과에 도달했고,
‘사마시시’라는,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을 성취한 분으로써 완전한 소멸을 이루었습니다.
이때 큰스님은 사마시시가 되신 것입니다.
‘사마시시’는 두 개의 결과를 동시에 얻는 자를 말합니다.
이것은 갈애가 끊어지고 동시에 생명이 소멸되는 아라한과를 얻은 것을 말합니다.
많은 경우에 수행자들이 죽을 때 아라한과를 성취하는 것을 경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죽기 전에 다시 받을 것이 없으면 갈애와 집착이 끊어지고 온전히 느낌만 남아있다면
그는 바로 아라한이 되어서 다음 생의 태어남이 없습니다.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그는 죽음이 없습니다.
태어남과 죽음이 없기 때문에 그는 고통이 없습니다.
이것이 해탈입니다.
수행자는 느낌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아픈 느낌이 있을 때 아픔을 알아차리면 아픔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계속하는 하나의 아픔이 아닙니다.
아픔도 매순간 일어나며 새로운 것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법의 성품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같은 아픔이 계속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이 아플 때 마음까지 아플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픈 것은 몸이고 그것을 아는 것은 마음이라고 알 때,
우리는 비로소 몸의 아픔을 통해서 법의 성품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픔에는 갖가지 단계가 있고 아픔에는 다른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나의 아픔이 오고 가고, 다음의 아픔이 오고 갑니다.
수행자는 아픔은 하나로 연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연속적이지 않음을 간파할 수 있을 때 수행자는 사물의 덧없는 무상을 깨닫게 됩니다.
연속성에 대한 환상은 진실을 덮어버리거나 감출 수가 있습니다.
연속성을 생각할 때 사물이 영구적이어서 오래 지속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연속성이 버려졌을 때 사물이 일어나고 사라짐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의 앎이나 이해는 보통사람의 것보다 훨씬 더 깊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몸에 전율이 일어나서 어깨로부터 시작된 것이 팔로 내려왔을 경우에
우리는 전율이 옮겨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법의 성품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들은 일어난 곳에서 사라집니다.
전율이 어깨로부터 팔까지 내려온 것이 아니고, 어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연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깨에서 일어난 아픔이 팔까지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각기 다른 세포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이 연속되었을 뿐입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어느 것도 항상 하지 않다고 압니다.
어느 것도 항상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집착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 때 아픔이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또한 무아를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몸에 느낌이 나타나는 것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알아차릴 대상은 ‘법’ 입니다.
법은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입니다.
몸의 느낌이 일어난 것은, 몸이 와서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의 경우 와서 보라고 나타난 법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타난 법에 개입해서 그것을 없애려고 하거나 또 다른 것을 바라거나
그것에 대해서 짜증을 냅니다. 이것은 법을 대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 나타나는 모든 대상은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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