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무엇이 자기를 화를 내게 합니까?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수준의 일을 하면서 자기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화를 내게 하는 범인은 바로 자기의 마음입니다.
무엇이 자기를 슬프게 합니까?
슬프게 하는 범인은 바로 자기의 마음입니다.
무엇이 자기를 괴롭게 합니까?
자기를 괴롭히는 범인은 바로 자기의 마음입니다.
모든 것의 원인은 대상에 있지 않고
대상을 받아들이는 자기의 마음에 있습니다.
대상이 밖에 있는 것이나, 자기의 몸과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이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기의 마음이 일으킨 것입니다.
대상에 끌려가면 세간의 삶을 사는 것이며,
끌려가지 않으면 출세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항상 어떤 대상이든지 있습니다.
좋은 대상 나쁜 대상이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은 밖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고 아셔야 하겠습니다.
수행자여러분!
느낌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덤덤한 느낌이 있습니다.
주석서에서 말하기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예를 들어 설명하기 어렵고 모호하고 불분명하지만
이것을 다음 같이 추론하는 사람에게는 분명해집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없을 때 생기는
기분 좋은 것, 불쾌한 것과 대립되는 중립의 것입니다.
무엇과 같습니까?
이것은 사슴의 발자국을 뒤쫓아 갈 때 사슴이 평평한 바위를 지나갔다고 추론하는
사슴 사냥꾼과 같습니다.
그는 평평한 바위의 이쪽과 옆쪽, 저쪽 옆에서 발자국들을 보았으나
평평한 바위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슴이 평평한 바위 위를 달려갔음이 틀림없다고 추론 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압니다.
여기로 올라오고 여기로 내려갔다. 중간에 이 평평한 바위를 지나갔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사슴이 올라간 곳의 발자국처럼 즐거운 느낌이 일어남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내려간 곳의 발자국처럼 괴로운 느낌이 일어남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올라오고 여기로 내려갔다는, 중간에 이렇게 갔다는 추론은 분명합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추론하는 사람에게는 분명해집니다.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없을 때 생기는
기분 좋은 것, 불쾌한 것과 대립되는 중립의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수행자여러분!
여러분은 세속적인 즐거움을 느낄지 모릅니다.
이 느낌은 여러분의 생활에서 부딪히는 것들을 맛, 소리, 향기,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족들 이런 것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즐거운 느낌은 세속적인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느낌이 있을 때 즐거움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때는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슬픔도 느낍니다. 우울할지도 모릅니다.
어떤 때는 자신이 소유한 어떤 것, 값진 것이 사라지거나
그것을 빼앗겼을 때 화가 나고 슬퍼하고 아쉬워 집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것에 대한 괴로운 느낌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났었던 나쁜 어떤 것을 생각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느낌입니다.
이러한 느낌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무엇이든 아쉬움과 화남 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중립적인 느낌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입니다.
감각대상을 만난 위빠사나 수행자가 즐거움도 괴로움도 느끼지 못하고
대상을 버릴 수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 애착을 수반한 중립적 느낌이 수행자에게 일어납니다.
이러한 느낌을 세속적인 중립적 느낌이라고 합니다.
또한 세속적인 것에 의지하는 덤덤한 느낌, 어리석은 느낌을 수반한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빨리어로 우뻬카 웨다나라고 합니다.
우뻬카는 평등, 중도, 중립을 뜻합니다. 그리고 웨다나는 느낌입니다.
여기서 평등이라고 하는 우뻬카는 열 가지 뜻이 있는데 그 중 아홉 가지는 평등, 중도의 뜻이고,
단 하나 느낌을 말할 때는 무지의 느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덤덤한 느낌이라고 하는 데,
빨리어의 원래 뜻으로는 무지의 느낌, 무관심한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자면 이것은 알아차림이 없는 느낌을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는 또한 출세간의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출세간의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중립의 느낌은 수행 중에 일어나는 느낌을 뜻합니다.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마음집중이 잘되거나 현상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수행자는 행복을 느낍니다.
너무 기뻐서 바로 일어나고 싶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스승에게 보고하고 싶어 합니다.
수행자는 이 느낌을 간신이 억누르거나 억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느낌은 주로 수행자가 현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단계에 도달 했을 때 나타납니다.
수행자는 그 느낌을 애착을 갖고 체험해서는 안 됩니다.
그 때 그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느낌에 집착하면 이 단계에 머물게 되고 발전할 수 없습니다.
이때는 빛이 나타나고 몸이 가볍고 여러 가지 형용할 수 없는 색다른 느낌을 느낍니다.
이때 출세간의 즐거운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행중이 나타나는 단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멉니다.
그래서 출세간의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도 결코 이것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출세간의 괴로운 느낌은 무엇입니까?
어떤 때 수행할 수가 없고, 노력한 만큼 마음이 대상에 머물지 않을 때
수행자는 낙담하거나 우울해집니다. 그래서 고통을 겪습니다.
그것이 속세와 관계없는 괴로운 느낌입니다.
어떤 때 수행자는 선정의 단계에 도달했다가
그것에서 떨어져 얼마간의 슬픔과 아픔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느낌은 슬픔과 아쉬움이라고 알아차려서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속의 느낌이나 출세간의 느낌이나 모두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세속의 느낌은 알아차림 없을 때 감각적 욕망에 빠져 있는 느낌이고,
출세간의 느낌은 알아차려서 의식이 고양되어 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느낌입니다.
모두 같은 느낌이며 모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도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아주 박식한 큰 스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열여덟 무리의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분은 정말 위대한 스승이었고 특히 경전에 대해서 박식했습니다.
단지 그의 조언을 따름으로서 3만 명이나 되는 비구들이 아라한의 깨달음을 성취했습니다.
하지만 그 스승은 아라한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학문으로서 명성을 얻었을 뿐입니다.
하루는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좋은 자질을 검토하고,
스승을 생각하고 그리고 스승을 검토했습니다.
그는 스승이 아직도 속인이고 아직 아라한을 성취하지 못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스승에게 그러함을 알려주려고 갔습니다.
스승은 그에게 '무엇 때문에 왔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라한이 된 제자는 '법문을 듣고자 왔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스승은 ‘시간이 없네. 난 아주 바쁘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는 '마을로 탁발하러 가실 때 여쭙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안 되네. 그때는 질문할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네‘ 라고
계속해서 만날 약속을 요청했으나 스승은 매번 그를 만날 수 있는 틈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제자가 스승에게 말했습니다.
‘스님 적어도 두 번이나 세 번은 앉을 수 있는 수행을 할 시간이 없으십니까?
만약 시간이 없다면 스님께서는 죽을 시간조차도 없을 것입니다.
스님은 항상 바쁘셔서 의자에 등받이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스님께 의지하나 스님께서는 스님 자신에게 의지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스님에게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라고 제자는 떠나 버렸습니다.
스승은 이것을 바로 보게 되어 이 일을 계기로 수행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이틀이나 사흘 이내에 아라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숲속으로 떠나 수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라한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한 우안거가 지나갔고 장마계절이 끝나도 그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슬픔을 느끼고 울었습니다.
그는 울고 그리고 울고 그렇게 울고 29년을 울면서 보냈습니다.
30년째 장마철 끝에 그는 아직도 속인이었고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주 슬퍼서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이때 그에게 한 천인이 다가와서 울었습니다.
비구는 ‘누가 여기서 우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인은 ‘나는 천인이요. 그런데 스님은 왜 우시나요? 스님이 우시는 것을 보고 울기만 하면 하나 혹은 둘의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저도 울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비구는 이 말을 듣고 깊이 깨닫고 자신에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천인조차 나에 대해서 농담을 하고 있다.
내가 우울하거나 슬퍼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그래서 그는 슬픔을 거두고 수행을 계속해서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는 삼장에 통달했지만 아라한이 되는 데는 30년이 걸렸습니다.
수행 중에 속세와 관계없는 슬픈 느낌에 관한 그의 집념이 깨달음의 장애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학과 수행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교학은 수행을 위한 전 단계의 과정이지 그 자체가 완성은 아닙니다.
교학의 지혜를 바탕으로 반드시 수행을 해서 열반을 성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입니다.
아무리 박식한 스승이라 할지라도 단 한순간의 오른발 왼발과
일어나고 꺼짐의 호흡을 보지 않는다면 그의 지식은 관념에 머물 것입니다.
실천적 수행을 할 때만이 교학이 더욱 빛나서 그것이 완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세간의 알아차리는 느낌이라 불리는, 수행 중에 일어나는 중립적인 느낌은
수행자가 더 높은 단계의 위빠사나의 앎에 도달하여 중립적 느낌을 경험했을 때 일어납니다.
이때는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많은 노력을 할 필요가 없고 대상이 스스로 옵니다.
이때 수행자는 중립적인 느낌, 평정의 느낌을 갖습니다.
이러한 느낌을 출세간의 평정한 느낌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일어났을 때도 알아차려서 평정한 느낌이라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자는 자신이 경험한 어떤 느낌이든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깨달음의 수준에 이를 때 더 높고 더 높은 단계의 위빠사나의 지혜에 도달 할 것입니다.
위빠사나의 지혜는 느낌을 통해서 성숙됩니다.
위빠사나의 지혜는 칠청정과 16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발전합니다.
매 단계가 모두 장애를 통해서 극복됩니다. 결코 수월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감각적 느낌이 출세간의 느낌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간의 감각적 욕망이 출세간의 느낌을 감각적 욕망으로 받아들이지,
출세간의 지혜의 느낌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행이 힘든 것입니다.
우리가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렸을 때
비로소 세간의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매진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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