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이 어려워서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워도 수행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못하는 사람은 수행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하려는 마음이 없어서 못합니다.
복을 바라는 사람은 수행을 할 수 없습니다.
수행은 자신의 괴로움을 해결하려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 할 수 있으며
더 향상된 삶을 살고자 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은 조건이 성숙되어야 할 수 있습니다.
미혹에 빠져서 아직 덜 다급하기 때문에 수행이 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자신의 견해가 강하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엇이나 쉽게 얻으려고 하여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이란 마음을 계발하는 것이라서 참고 견디며
반드시 큰 스승들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는 항상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느낌이 일어나게 하는 요소는 무명, 갈애, 업, 접촉입니다.
그리고 느낌이 사라지게 하는 요소는 무명과 갈애가 없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느낌이 일어났을 때 수행자가 알아차리면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게 됩니다.
수행자는 또한 아픔이 있기 때문에 괴로운 느낌이 있다는 것을,
안락함이 있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이 있다는 것 등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느낌을 안으로, 다른 사람들의 느낌을 추리해서 밖으로,
또는 안팎으로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수행 중에 느낌을 다루어야 하는 방식은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볼 때 그것을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느낌을 집착하지 않으면 진리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느낌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느낌을 느낄 때는 단지 있는 느낌만을 알아차려야 하며
느낌으로 인해 어떤 상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 느낌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알고,
감각 기관이 느끼는 것이지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고 압니다.
이것이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이것을 만족하여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이 행복이 더 많기를 바라고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느낌을 원인으로 일어나는 갈애입니다.
이 갈애는 반드시 집착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집착이 결국에는 괴로움을 가져 옵니다.
즐거움은 느낌이며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집니다.
우리는 일어났다가 사라진 느낌을 기억하여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실재하지 않는 관념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조건에 의해 일어난 느낌은 조건에 의해서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느낌의 실재는 무상이며 괴로움이며 무아입니다.
느낌은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이므로 나의 느낌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실재하지 않는 느낌, 나의 느낌이 아닌 느낌을 집착해서는
결코 열반의 길로 갈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느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전체적으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사에서 생기는 괴로움은
처음에는 단순한 느낌이 차츰 변화되어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느낌은 인간이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느낌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인식됩니다.
느낌은 마음에 의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며 이것을 아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래서 느낌은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한다는 것은 바로 느끼는 것입니다.
또한 생존의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바로 느낌입니다.
이러한 느낌을 감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인 육경(六境)에 부딪히면
즉시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 느낌이 바로 갈애를 일으킵니다.
이 갈애로 인하여 집착하는 마음이 생겨서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느낌이나 갈애 자체는 괴로움이 아닙니다.
집착을 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가 12연기(緣起)에 나타납니다.
12연기는 삶의 본질적 조건들을 분석한 것입니다.
생명은 무명(無明)이라는 원인이 있어 생긴 행(行)의 결과입니다.
이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연속되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굴러가게 하는 것이 원인과 결과이며 조건들입니다.
마음이 그 역할을 합니다.
이런 연기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 느낌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곧 욕망의 느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바로 지고의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은 느낌으로 시작해서 느낌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사가 느낌입니다.
좋은 일을 할 때도 좋은 일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바로 느낌입니다.
느낌이 갈애를 낳기 때문에 느낌을 얻기 위해 행위를 합니다.
아울러 나쁜 일을 자꾸 하는 것도, 나쁜 일을 했을 때 생기는 짜릿한 쾌감의 느낌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도 느낌을 통한 것이고 선하지 못한 것도 느낌을 통한 것입니다.
담배나 술, 도박, 사랑, 돈, 명예, 재산, 지위 등등이
모두 느낌이 일으킨 갈애 때문에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들은 모두 일정한 단계를 거쳐서 변화합니다.
또한 느낌은 매우 짧은 순간에 일어나고 사라지고 다시 일어나는 것들로 연속됩니다.
그래서 느낌의 실재는 짧은 순간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낌은 단계적 변화와 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성품을 알면
비로소 느낌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느낌을 조절할 수 있는지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일정한 단계를 거쳐 변화된 느낌은 역시 일정한 단계에 의해 소멸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느낌은 일어나게 할 수도 있고 또한 사라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선한 느낌은 일으키고 선하지 못한 느낌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입니다.
누구나 짧은 순간의 선하지 못한 느낌을 얻기 위해 무한한 노력을 합니다.
때로는 피를 튀기는 투쟁을 합니다. 이런 투쟁은 남과의 문제뿐이 아닙니다.
실제로 자기 자신과의 문제, 가족과의 문제, 이런 것들이 바로 어리석은 투쟁입니다.
순간의 느낌을 참지 못하여 평생 씻을 수 없는 과보를 받기도 합니다.
이처럼 느낌은 짧은 한 순간의 것이고, 그 과보는 한 생에 걸쳐서 지속될 수도 있으며
다음 생까지 상속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몸이 아픈 뒤에 마음까지 아픈 것은 느낌이 증폭된 것입니다.
몸이 아파 괴로워하는 것도 느낌이고 마음까지 아파하는 것은 느낌이 연속된 것입니다.
첫 번째 느낌도 그렇지만 두 번째 느낌도 모두 스스로가 만든 것입니다.
두 번째 느낌으로 발전하면 아플 때 끙끙거리게 됩니다. 마음까지 아파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거나 영화나 티브이를 보면서 울어버리게 됩니다.
흡연, 술 중독, 욕설, 폭력, 파괴, 도박, 도둑질, 자해, 자살 등등
습관적인 것들이나 극단적 현상은 모두 정신적 느낌으로 인해서 생긴 현상들입니다.
여기서 감각적 쾌락과 극단적 정신 상태를 추구하는 느낌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슬픔이 비탄으로 변화되고 즐거움이 감각적 쾌락으로 변화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느낌이 변화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현상들입니다.
시작은 매우 미미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미미한 느낌들이 시간이 갈수록 집착을 해서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결과의 느낌을 가져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평범한 느낌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것이 슬픈 느낌으로 변화합니다.
그러다가 이 느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비탄의 느낌으로 변화합니다.
이렇게 변화되었을 때는 비탄이 상시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뇌입니다.
이 말을 한문으로는 우비고뇌(憂悲苦惱)라고 합니다.
이러한 느낌의 변화는 자신이 좋아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느낌들이 나중에는 속도를 갖게 되어
시작하자마자 끝 단계의 느낌까지 수직적으로 상승하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끝장을 보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것이 손해이든 이익이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습성입니다.
이것들이 모두 느낌을 증폭하는 것들입니다.
요약하자면 평범한 느낌은 대상과 부딪혀서 생긴 최초의 느낌입니다.
이것이 변화되면서 슬픔으로 바뀌게 됩니다. 슬픔은 약한 불로 태우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이것이 비탄으로 변화됩니다. 비탄은 강한 불로 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비탄에 빠지면 상시적으로 고뇌에 차게 됩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번뇌를 안고 삽니다.
이때의 고뇌는 불타버린 검은 찌꺼기가 되어 항상 가슴에 숯 덩어리로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무겁거나 답답하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번뇌가 깊게 자리 잡아서 가슴에 느낌으로 나타난 것들입니다.
우리들의 느낌은 이상에서 말한 것처럼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발전하는데
여기에는 세 단계의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는 여섯 가지 경계에 부딪힙니다.
이것을 접촉한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12처(處)라고 합니다.
이렇게 12처가 만난 뒤에 다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는 육식(六識)이 일어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는 여섯 가지의 마음이 의식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를 18계(界)라고 합니다.
이때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의식되는 것이 모두 느낌을 통해서 마음이 알게 됩니다.
이것이 최초에 일어나는 1단계의 느낌인데 이것을 맨 느낌이라고 합니다.
눈이 물질을 만나서 빛에 의해서 물질인 것을 아는 안식(眼識)이 일어납니다.
다시 말하면 눈으로 산을 보고 산이라고 마음이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가 소리를 만나서 소리라는 것을 아는 이식(耳識)이 일어납니다.
다시 코가 냄새를 만나서 냄새라는 것을 아는 비식(鼻識)이 일어납니다.
다시 혀가 음식물을 만나서 음식 맛을 아는 설식(舌識)이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신식(身識)과 의식(意識)도 일어나는데 이것을 18계(界)라고 합니다.
18계를 모두 합하여 세계, 현상세계, 유정세계, 일체 모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인식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전부이며,
우리가 알아야 할 전부입니다.
불교수행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모두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실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유한 특성이 있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세계관이고 위빠사나 수행에서 말하는 알아차릴 대상의 범주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세상에 태어나서 몸과 마음으로 대상을 맞이하는 것이고,
이것만이 실재하는 전부라는 뜻으로, 세계라고 하고 일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수행에서 말하는 모든 것도 이 18계안에서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벗어나는 것은 인식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예를 들면 ‘창조주나 신(神)이 있다, 없다.’ 고 하는 것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인식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있다, 없다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수행을 할 때 기본이 되는 것은 알아차림입니다.
그리고 이것과 짝을 이루어 알아차림을 완벽하게 해 주는 것이 분명한 앎입니다.
수행자는 항상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앎은 네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이익이 있는가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둘째는 적절한가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셋째는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넷째는 미혹하지 않음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이상에서 말한 네 가지 분명한 앎 중에서
세 번째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을 ‘고짜라 삼빠잔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18계가 알아차릴 대상으로 바로 ‘고짜라 삼빠잔나’입니다.
이것을 ‘행경’이라고 하는데 수행자가 과연 알아차릴 대상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인식을 벗어난 것은 수행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낌은 바로 우리들의 인식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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