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마음을 가진 모든 생명들의 마지막 희망은 열반입니다.
열반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란 번뇌가 불타버린 지고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열반은 나고 죽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윤회가 끝나는 해탈이기 때문에
최고의 가치를 가진 것입니다.
열반으로 가는 도(道)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도(道)가 필요합니다.
처음에 근본 도(道)로 시작하여 전 단계의 도를 거쳐서
마지막에는 성스러운 도(道)에 이르러야 합니다.
첫째, 근본 도는 연기(緣起)의 원인과 결과를 아는 도(道)입니다.
그래서 업은 지은 사람이 받는다는 견해를 가지고 선행을 해야 합니다.
둘째, 전 단계의 도(道)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셋째, 성스러운 도(道)는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열반은 부처에 의해서 체험되고 부처에 의해서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열반은 불교에만 있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12연기와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도과(道果)를 얻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을 하다 두려우면 두려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때는 가슴으로 가서 두려운 마음이 남긴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이 유익합니다.
어떤 마음이 일어나거나 그 마음은 가슴에 느낌을 남깁니다.
그래서 이 느낌을 알아차리면 마음과 느낌의 관계를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알아차려야 대상을 지속적으로 주시할 수 있습니다.
어떤 느낌이든 느낌은 마음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이때 느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受, 想, 行)의 세 가지가 함께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할 때는 하나의 대상에서 마음을 알아차릴 수도 있고,
수 상, 행을 함께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있고, 느낌이 있고, 표상이 있고, 마음의 형성력이 있을 때,
그 중에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알아차릴 대상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연계해서 알아차리면 수행의 효과를 높일 수도 있습니다.
이중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특별히 느낌을 대상으로 집중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느낌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념처를 집중적으로 할 때에는
특별하게 느낌만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방법도 있습니다.
그것이 주로 가슴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대상으로 하거나
또는 머리에서 일어나는 느낌, 또는 신체 전신이나 일부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들이
수념처 수행을 하는 방법입니다.
그중에 가슴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매우 알아차리기 좋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수행을 할 때 느낌을 어떻게 알아차려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화가 났을 때 또는 괴로울 때, 제일 먼저 화가 난 것이나 괴로운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둘째, 화가 난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셋째, 화가 난 마음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립니다.
마음은 순식간에 일어나서 바로 사라지므로 알아차리려고 하면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화난 마음이 사라진 것을 아는 것은 화난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화난 마음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면
그 마음이 바로 다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사라진 것을 확인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확인을 안 하면 화가 난 마음이 연속적으로 계속 다시 일어나므로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라진 것을 아는 것은 소멸을 아는 것으로 무상을 아는 지혜가 나게 합니다.
넷째, 가슴으로 가서 화가 난 마음이 남기고 간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화가 난 마음은 사라졌지만 느낌은 가슴이나 머리에 남아서 계속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느낌은 마음의 강도에 따라 다릅니다.
오래도록 화난 마음이 있었다면 가슴에서는 더 크게 콩닥거릴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따라 느낌도 비례합니다.
이것은 물에 돌을 던졌을 때 돌은 바로 가라앉아 버리지만
물 위의 파문은 계속해서 번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느낌을 주시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화나 괴로움에 따라 느낌도 크고 작고 한데
느낌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때 가슴에서는 콩닥거리는 느낌만 있지 않습니다.
거칠게 뛰는 호흡도 있고 맥박의 뜀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모두 느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가슴에 여러 가지 대상이 있을 때는 가장 강한 대상을 느낌으로 알아차립니다.
이 때 가슴보다 머리에 강한 느낌이 있으면 머리에 가서 알아차리십시오.
가슴에서 느낌을 알아차릴 때는 처음에는 거친 느낌에서 중간 느낌,
그리고 미세한 느낌이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가슴에 느낌이 없다면 가슴에서 덤덤한 느낌이라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가슴에서 알아차려야 언젠가 가슴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여러 가지의 느낌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느낌은 특별한 것도 있고 특별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되었거나 느낌으로 주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섯째, 가슴의 느낌이 미세해지면 그냥 가슴에서 호흡을 알아차리거나,
다시 배나 다른 대상을 주시하면 됩니다.
이상이 느낌을 알아차리는 기본적인 단계들입니다.
현재 한국명상원에서는 이렇게 느낌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연계해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수행자들이 자신에게 맞게 응용해서 사용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 비로소 화나 괴로움이 어느 덧 지난 일이 됩니다.
그러나 강한 고정관념에 의해서 생긴 화는 한 번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때는 계속해서 다시 이런 방법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느낌은 변화가 많고 미세해서 알아차릴 대상으로 매우 훌륭합니다.
미세한 것을 알아차리므로 아는 힘이 강해지며,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알아차리기에 좋고,
변화에 집중하므로 무상을 알기에 좋은 대상입니다.
가슴에 느낌을 알아차릴 때는, 이것으로 인해서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결정적 작용을 해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무슨 마음인지도 모르는 무수한 마음이 계속 일어납니다.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무수한 마음들을 모두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슴에서 느낌을 알아차릴 때, 그 마음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모두 알 수 있습니다.
가슴에서 느낌을 집중하다 보면 순간적으로 어떤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면서
콩닥거리는 느낌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떤 마음이라는 원인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진 마음은 거의 욕망과 성냄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탐욕과 성냄을 가지고 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괴롭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괴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때의 괴로움은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알았으면 됩니다.
그 마음은 그 순간의 마음이지 결코 내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신의 마음이 탐욕과 성냄이 가득하다고 알았으면
그것은 새로 알아차린 선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있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므로 탐욕과 성냄으로 가득 찬 마음은 지금 이전의 마음이고,
그것을 안 새로운 마음은 선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탐욕과 성냄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내가 탐욕과 성냄이 많았다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아는 새로운 마음이 일어난 것을 다시 지켜봐야 합니다.
과거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항상 마음은 새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새로 일어난 마음을 다시 또 지켜봐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로 회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느낌을 일으킨 것이므로 느낌을 통해서 마음을 알 수 있어서
무엇이나 원인이 있어 생긴 결과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를 안 것이 바로 원인과 결과의 뿌리를 본 것입니다.
모든 것의 원인은 마음에 있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릴 때라야 비로소 원인을 알게 됩니다.
원인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알아야지, 그렇지 않고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면
사유에 빠져서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일단 이런 식으로 원인의 마음을 알았다는 것은 수행의 발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알아차릴 수 있다면 언젠가는 더 바른 견해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입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릴 대상을 느낌으로 하는 것은 실재를 아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나 느낌이라고 확실히 이해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냥 막연히 대상을 아는 것은 관념을 선택한 경우입니다.
관념도 대상의 하나이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므로
그것이 바로 느낌으로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릴 때는 이것이 느낌인지를 분명히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화가 났을 때 화난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서
다시 화난 마음으로 인한 느낌을 알아차리려고 했다고 봅시다.
바로 이런 노력이 있었다면 그 순간, 화가 객관화되어서 알아차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 작은 한 순간이라도 화를 객관화해서 알아차릴 수 있는 틈이 생긴다면
화나 괴로움이 더 이상 커지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몇 차례에 걸쳐 대상이 바뀜으로 인해서 화는 차츰 멀어집니다.
그래서 소멸의 기간이 길수록 다시 나타나기가 어렵습니다.
대상을 바꾸어서 알아차리고 대상을 객관화해서 알아차리면 순간적인 틈을 만드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오직 마음이 새로운 마음을 내서 알아차리려고 노력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과 노력은 붙어 다니면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마음과 노력은 다른 것 같지만 노력하는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화가 났을 때, 괴로운 느낌이나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이것의 느낌을 알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또한 지금 내가 몇 번째 화살을 맞았는가를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첫 번째 화살을 맞았는가, 아니면 두 번째 화살을 맞았는가,
아니면 세 번째, 네 번째 화살을 맞고 있는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대상을 객관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화살은 두 번만 맞는 것이 아니고
무수한 화살을 계속 맞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누구나 화살을 맞습니다. 그러나 화살을 맞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화살의 강도가 약해집니다.
수행은 일단 알기만 하는 것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그 이후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알아차리는 힘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단지 원인만 일으켜야 합니다.
그 원인에 따른 합당한 결과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 바로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아닙니다.
느낌은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이 있기 때문에 어느 때고 어떤 느낌이나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눈꺼풀과 입술과 손과 엉덩이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습니다.
이상의 장소를 알아차리면 처음에 맨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육체적인 느낌과 정신적인 느낌으로 발전했을 때는
가슴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가슴에서는 마음이 일으킨 여러 가지 형태의 느낌이 매우 많습니다.
그러므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마음을 가슴에 고정하십시오.
그러면 가슴에 있는 여러 가지 느낌뿐만 아니라 호흡과 맥박까지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가슴에서 느낌을 알아차릴 때는 단지 느낌이 있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콩닥거리는 느낌을 없애려고 알아차려서는 안 됩니다.
단지 있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그쳐야지, 느낌에 개입하면 거친 느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느낌이 사라지지 않으면 두려워하거나 화를 내게 되므로 그냥 지켜봐야 합니다.
어떤 느낌이 있거나 있는 그대로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나중에는 고요한 느낌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고요한 상태가 된다면 다시 맨 느낌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느낌은 거친 느낌에서 중간 느낌으로 다시 미세한 느낌으로 전환하는 일정한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느낌에 개입하지 말고 기다리면서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단계의 수행은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는 것을 알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호흡을 알아차릴 때와는 다릅니다.
느낌을 알아차릴 때는 대상이 미세할 수도 있고 빠르게 변하는 것도 있으니
어떤 대상이거나 그냥 지켜봐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것이 되었거나 가슴의 느낌을 알아차릴 때는
필요한 것을 알아차린다는 마음으로 정중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제가 미얀마의 스승님으로부터 배운 소중한 수행이
바로 가슴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가슴에 있는 느낌은 항상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가슴의 느낌을 알아차리면 느낌과 함께 일어나는 마음까지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슴은 괴로움이 있을 때마다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좋은 의지처가 됩니다.
이 느낌을 보는 수행으로 여러분 모두가 행복을 얻으시기를 삼가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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