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유신견은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나의 소유라고 압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나의 소유가 아니고,
매순간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견해로 인해 내 남편, 내 부인, 내 자식이라는
소유욕으로 인해 번뇌가 끊이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내 고향, 내 학교, 내 나라, 내 종교라는 관념으로 인해
나의 것이 아닌 것을 배척합니다.
그래서 지구도 인간의 소유물로 알기에 이른 것입니다.
지구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필요이상으로 많은 생명들이 도륙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유신견으로 인해서 생깁니다.
유신견이 있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고통을 주며
윤회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몸은 있습니다. 마음은 있습니다.
그래서 유신(有身)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몸이, 이 마음이 나의 몸이라고 할 때
이것은 유신견(有身見)으로, 잘못된 견해입니다.
단지 정신과 물질은 원인과 결과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지
자아가 있어서 이것을 소유하거나 항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1단계의 느낌은 맨 느낌이고,
2단계의 느낌은 맨 느낌을 바탕으로 나타난 느낌의 속성인데
이것을 육체적 느낌이라고 합니다.
이 느낌이 바로 세 가지로 나뉩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행복한 느낌, 불행한 느낌, 덤덤한 느낌으로 불립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이 대상에 부딪혀서 일어나는 기본적인 느낌은
맨 느낌 뒤에 바로 따라서 일어나는 이들 세 가지 범주의 느낌입니다.
이때 속성으로 일어난 2단계 육체적 느낌은
맨 느낌에 감정이 개입되어서 스스로가 일으킨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느끼면 화살을 한 번 맞는 것이 됩니다.
선업과 불선업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기본단계인 맨 느낌에서 2단계의 느낌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알아차리는 효과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근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육체적 느낌이라고 합니다.
다시 속성으로 인해 일어난 이 육체적 느낌에서 정신적 느낌으로 변화합니다.
이것이 3단계 정신적 느낌입니다.
정신적 느낌은 정신적 즐거움, 정신적 괴로움입니다.
이처럼 느낌은 그냥 있지 않고 항상 끊임없이 변합니다.
이 3단계의 느낌으로 가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거나
좋고 싫고의 격렬한 행위로 변화되어 갑니다.
비탄에 빠져 슬피 울거나 자살을 하거나 또는 환희에 겨운 몸짓을 합니다.
여기서 극단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제어가 어렵습니다.
이미 상당부분 집착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가 최초의 맨 느낌에서 알아차리는 것을 목표로 하나
이미 육체적인 느낌으로 변화되면 그때라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시 정신적인 느낌으로 변화되면 또 그 단계에서라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정신적 단계에서 다시 더 격렬한 정신적 느낌으로 계속 상승되면
겉잡을 수 없는 정신적 공황 상태까지 가게 됩니다.
이러한 느낌의 단계에서 알아차림은 언제 어느 단계에서도 필요하며
빨리 알아차릴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늦게라도 알아차렸더라도 알아차리면 그것은 가장 빨리 알아차린 것입니다.
느낌의 알아차림은 늦고 빠른 것이 없습니다.
어느 때나 알아차렸다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범부는 세월이 가도 영원히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느낌에서 덤덤한 느낌도 알아차리지 못하면 무지와 나태함, 게으름에 빠집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이 있을 때는 이것이 덤덤한 느낌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덤덤한 느낌은 느낌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중요한 느낌입니다.
특별한 감정의 변화가 없는 한 항상 덤덤한 느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특히 호흡을 알아차릴 때 일어남, 꺼짐, 쉼의 3분절에서
쉼의 상태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알아차림을 놓치기가 쉬운데
이때의 느낌을 덤덤한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매우 효과적입니다.
일어남과 꺼짐은 분명한 움직임이 있지만
일어남과 꺼짐 사이에 있는 작은 휴지인 쉼에서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자칫 알아차림을 놓치기 쉽습니다.
이때 쉼의 상태에서 덤덤한 느낌이라고 아시면 되겠습니다.
느낌을 경전에서는 화살에 비유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느낌으로 인해 어떻게 화살을 맞고 있는지 살펴보시겠습니다.
누구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마주치면 먼저 맨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때 알게 되는 것이 모두 느낌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1단계 느낌입니다.
이 느낌에서는 아직 다른 단계의 느낌이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살을 맞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런 맨 느낌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음 단계인 육체적 느낌이 일어납니다.
육체적인 느낌은 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이때 호, 불호가 일어납니다.
이 상태가 바로 갈애가 일어난 것입니다.
갈애는 좋아하는 것을 바라거나 싫어하는 것을 바라는 상태입니다.
좋으면 좋아하고 싫어하면 계속 싫어하는 것이 모두 갈애입니다.
이것을 희구(希求)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몸에 화살을 한 번 맞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육체적인 고통스러움은 느끼십니다.
그러나 아픈 것은 몸이지 마음까지 아프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육체적인 느낌을 느껴도 정신적인 느낌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육체적인 느낌에서 더 발전하면 정신적인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때가 3단계의 느낌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때 정신적으로 좋아하고 정신적으로 싫어하는 상태가 됩니다.
예를 들면, 그냥 좋은 것이 아니고 좋아 죽겠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좋은 것은 육체적인 느낌이고, 죽겠네! 는 정신적인 느낌입니다.
괴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롭네! 가 아니고 괴로워 죽겠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괴롭네! 는 육체적인 느낌이고,
괴로워 죽겠네! 라고 하는 죽겠네! 는 정신적인 느낌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두 번째 화살을 맞습니다.
육체적인 느낌이 정신적 느낌으로 상승되면 갈애가 집착으로 발전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단순한 슬픔이 비탄에 빠지게 되고, 단순한 즐거움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느낌이 발전하는 순서입니다.
이 상태에서 눈물이나 환호 등이 나오며, 또는 극단적인 행위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최초의 느낌에서 즉시 알아차리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연기가 중간에서 끊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맨 느낌에서 갈애로 발전한 것을 연기의 회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상속, 흐름, 또는 한 순간이 다음 순간으로 윤회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느낌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갈애는 집착으로 발전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움켜쥡니다.
이것이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갈애가 일어나 욕망의 세 번째 화살을 맞습니다.
이 욕망의 세 번째 화살을 맞으면 상처가 깊어지고 고통도 깊어지고 그만큼 과보도 커집니다.
욕망의 세 번째 화살을 맞은 사람은 무지하기 때문에 화살을 피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리고 화살을 맞는 것이 일상의 삶이 되어서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을 찾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화살을 맞습니다.
정신적인 괴로움과 갈애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명으로 인하여
네 번째 화살인 무명의 화살을 맞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의 느낌에 네 번의 화살을 맞게 합니다.
그리고 네 번의 화살을 한 번만 맞는 것이 아니고 반복해서 네 번의 화살을 맞습니다.
이런 결과로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결국 자살을 하는 것도 이런 과정에서 벗어날 길을 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를 내는 것도 한 두 번은 참았다가 이러한 느낌이 증폭되어서 폭발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이것을 단순한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느낌의 화살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이 느낌이 나의 느낌이 아니고 단지 원인에 의한 결과의 느낌이라고 알면
누구나 느낌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상의 과정에서 어느 때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맨 느낌에서 육체적 느낌으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알아차리는 것이 좋을까요?
그렇습니다. 빨리 알아차리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때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우리가 꼭 처음부터 알아차려야 한다고 하면 늦게 알아차렸을 때는 후회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늦고 빠르고가 없습니다.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 하는 것만 있습니다. 이것이 정신세계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에는 늦거나 빠른 것이 없습니다. 어느 때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는 맨 느낌의 상태에서 육체적 느낌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상에 빠져서 보지 말고
마음으로 알아차리게 되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갈애가 일어났다면 다시 일어난 갈애를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미 일어난 갈애를 어떻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이미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대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일어난 갈애를 문제 삼아서는 되지 않습니다.
단지 일어난 갈애도 하나의 대상으로 봐야 합니다.
처음에 제대로 알아차리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고,
그러나 알아차림이 약해서 갈애가 일어나고 마음이 불만족스러우면
다시 불만족스러운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고통스러우면 다시 고통스러운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알아차림에는 어느 단계가 따로 없습니다.
어느 상태에서나 알아차리면 그 순간 끊어집니다.
항상 마지막 상황을 다시 알아차리면 됩니다.
알아차릴 대상은 싫어하는 것만 알아차릴 것이 아니고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자에게는 좋거나 싫거나 간에 대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좋으면 좋은 것을 알아서 감각적 욕망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싫을 때는 싫어하는 것을 없애려고 하는 또 다른 욕망이 일어나므로 그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덤덤한 느낌일 때는 무관심과 무지와 게으름의 느낌이므로
지금 덤덤한 느낌이네라고 그것을 각성해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에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몸이 아프면 여러 가지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아프다는 것은 느낌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느낌은 매순간 변화하므로 무상을 알기에 좋은 대상입니다.
몸이 아플 때의 느낌은 외부의 원인으로 인해서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알아차리기에 아주 좋은 대상입니다.
예를 들면 화난 느낌이 어떤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유발된 것이라면
알아차려도 상대가 있으므로 감정처리가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팠을 때는 오직 자신과의 문제밖에 없기 때문에
알아차림에 장애가 없어서 좋은 결과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아프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것도 또 하나의 괴로운 느낌입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수행을 하다 죽지 않습니다.
이때 아픈 육체적인 느낌이 정신적 괴로움으로 발전하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살을 두 번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화살은 이 두 번에 그치지 않습니다. 누구나 화살을 계속 맞습니다.
이것이 상시적으로 있는 우리의 고뇌입니다.
수행을 하다가 죽으면 그것은 참으로 영광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죽을 때의 마음인 사몰심이 다음 생을 이어주는 재생연결식을 만들기 때문에
수행을 하다가 죽을 수 있다면 이것은 누구나 바라야 하는 일입니다.
수행은 지혜를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다른 측면이 있다면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죽기 전의 마음의 상태가 다음 생을 결정하므로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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