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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49

通達無我法者 2010. 12. 26. 23:4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바라밀이란 수행의 완성을 의미하며,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필요한 뗏목입니다.

이것은 수단이지 목표는 아닙니다.

 

바라밀은 10가지의 초월적인 덕목으로

보시, 지계, 출가, 지혜, 정진, 인내, 진실, 발원, 자비, 평정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라밀이란 바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바라밀은 모든 존재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행해져야 하며

명확한 이성에 의해 이끌려야지 감성적인 마음에 이끌려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행위들이 있을 때만이 비로소 잘못된 믿음과 유신견이 소멸되어

지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대념처경의 세 번째 염처(念處)인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념처경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법문은

경전 본문을 다루기에 앞서 먼저 마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실제로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면 마음을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이처럼 마음에 대한 개요를 설명한 뒤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사념처의

심념처 수행을 공부하시겠습니다.

 

그런 뒤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관하여 모곡 사야도의 말씀과

그리고 현재 한국명상원에서 하고 있는 심념처 수행방법에 대해서 차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으로는 하나이지만,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분류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부처님께서 분류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이러한 마음의 분류는

① 오직 무아(無我)라는 것 하나를 설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무아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무아를 모르고서는 결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아(無我)라는 가장 중요한 법을 설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무아(無我)로 자신의 깨달음은 물론 많은 생명들에게 해탈의 기회를 제공하신 겁니다.

이것은 부처님 자신뿐만 아니라 역대의 모든 부처가 동일하게 무아의 지혜를 통하여

해탈에 이르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대한 것이 조금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냥 들으시는 것이 유익합니다.

처음에는 모르더라도 자꾸 들으시면 어느 순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혜가 납니다.

그러므로 복잡한 것을 참는 인내도 조금 필요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이니 무조건 들으라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분류는 일정한 목적이 있어서 말씀하신 것이니

부처님의 의도를 존중하자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셔서 모르는 것이 없고 신통한 힘이 있으셔서

사람들을 위해 가장 쉽게 설명한다는 사실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결국은 자신을 위해서 유익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위빠사나 수행은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사념처(四念處) 수행입니다.

그 중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세 번째로 정신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마음과 정신은 같은 말입니다만 쓰임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합니다.

 

경전에서는 일반적으로 정신과 물질이라고 하는데,

대념처경의 사념처에서는 정신이라고 하지 않고 마음이라고 하며,

물질이라고 하지 않고 몸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마음에 대해서 말하지만 정작 마음이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마치 등잔 밑이 어두운 것처럼,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른다는 사실부터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무지한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세월을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고 고통 속에서 살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마음은 비물질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은 몸과 함께 있지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모든 것을 마음이 하지만 보이지 않는 비물질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마음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보이는 대상만 인정해왔지,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대하여 막연히 추측하는 수준에서 알고 지냅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이란 어떤 의미로는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공기가 있어서 살지만 공기가 있는지 알기가 어려운 것처럼 역시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이끄는 마음을 알지 못하면 잘못된 견해가 생겨서 어리석게 살아야 합니다.

모든 생명의 윤회가 바로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의 괴로움이 바로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데서 온 결과입니다.

 

몸과 마음을 앉은뱅이와 장님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몸은 저 스스로 볼 수가 없어서 장님이라고 하며,

마음은 저 스스로가 움직일 수 없어서 앉은뱅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몸이라는 장님과 마음이라는 앉은뱅이가 서로 동거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몸이라는 감각기관이 있어서 볼 수 있지만 아는 마음이 없으면 대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아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가고자 하는 의도만 있지

실제로 움직여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 몸과 마음을 하나의 동일체로 보지만,

부처님께서는 이것들이 하나로 모여 있으면서 서로 역할을 어떻게 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고 마음을 분석한 종교입니다.

이러한 분석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는데 기여하는 치유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마음에 대한 분석은 학문적 성취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실재하는 진실을 알아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지혜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마음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 그 누구도 마음에 대해서 정확하게 밝히지 못했습니다.

오직 부처님만 마음에 대한 것을 아신 뒤에 이 지혜로 부처가 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보살이실 때 6년간 고행을 하시다가 마지막에 죽음에 이르셨습니다.

수행을 하다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수행은 더 잘 살자고 하는 것인데 죽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당시에는 고행을 하는 것이 수행을 잘 하는 것인 줄 아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보살께서는 죽어가는 단계에서 극단적인 고행을 그만 두셨습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이 중도입니다.

이 중도를 팔정도라고도 하고, 계정혜 삼학이라고도 하고, 또는 위빠사나 수행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극단적 고행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지혜가 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 바로 초전법륜경입니다.

 

보살께서는 죽음에 대해 숙고하신 뒤에 연기(緣起)를 발견하십니다.

그리고 이 연기 속에 있는 인간의 정신과 물질의 실재를 발견하십니다.

이때 정신과 물질 안에 있는 느낌을 발견하시고,

위빠사나 수행으로 정신과 물질의 무상과 괴로움과 무아를 아셨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깨달음으로 가는 정해진 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길로 가시어 깨달음을 얻으시고,

그리고 이 길이 유일한 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역대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길로 오신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방법도 바로 이 길을 그대로 가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 혜안이 생겨 마음을 보시니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항상하는 마음인줄 알았는데 마음이 매순간 변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를 들어 마음을 연필로 종이위에 그은 선으로 비유하자면,

이 선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그어진 선으로 알았는데,

마음이란 하나의 점과 점들이 모여서 지속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었다고 아는 것은 이것을 보는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끊어지는 것이 바로 마음이 찰나생, 찰나멸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빠르게 한 순간에 일어나서 빠르게 한 순간에 사라집니다.

마음은 이런 현상들이 연속되는 과정만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개미들이 떼를 지어 가는 것을 멀리서 보면

하나의 일직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마리, 한 마리의 개미가 모여서 가는 것입니다.

 

바로 항상하는 마음, 변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은 이런 혜안이 없어서 그렇게 본 것인데,

부처님께서 혜안으로 보시니 모든 것은 항상하지 않고 빠르게 변하며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있던 마음이 사라지고 현재의 마음이 일어난 뒤에

다시 다음 마음이 현재의 마음이 되고 이런 과정이 진행된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있지만 이것이 변하지 않는 마음이 아니고

매순간 변하는 마음이라서 마음의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마음은 있지만 그것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마음은 없고,

매순간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만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앞서 밝힌 선으로 비유했을 때, 끊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선으로 보면

자아가 있다는 견해가 생깁니다.

모든 것은 변하지 않고 항상하며 그것을 지배하는 자아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초월적 존재인 신이 생겨나고 영원하다는 견해가 생겨납니다.

 

이것은 마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으로 그렇게 안 것입니다.

언제부터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 말이 옳은 말인 줄 알고

그냥 전해진 것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누군가가 잘못된 것을 말해도 진실을 아는 지혜가 없으면 그것을 믿고

잘못을 진실처럼 알고 삽니다.

 

이처럼 마음은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어떤 하나의 마음이 길게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순간순간 서로 다른 마음이 계속해서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는데 항상 뒤에 일어난 마음은 새로 일어난 마음입니다.

 

마음은 전기불이 들어오는 원리와도 같습니다.

전기불이 켜질 때 전류가 빠르게 끊어지면서 에너지를 보내는데

이것을 잘 모르면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기선을 통해서 들어오는 불도 최소의 미립자들로 구성된 에너지가 전송되면서 불이 켜지는 것입니다.

빠르게 보면 작은 미립자들로 구성된 에너지가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전해지는 것이지

이것들이 모두 붙어서 계속 전류를 보내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촛불이 다음 촛불로 불을 붙여 주듯이 말입니다.

하나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툭 하고 쳐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과 같이

마음이 다음 마음을 생기게 하는데 조건을 만들어 주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현생에서의 마지막 마음인 죽을 때의 마음이

다음 생에서 최초의 마음인 재생연결식을 새로 만들어서 생명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때 죽을 때의 마음과 새로 태어난 재생연결식은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순간마다 조건에 의해서 생긴 마음은 모두 다릅니다.

 

우리가 평생을 하고 사는 호흡이 같은 호흡이 아니듯이,

마음도 같은 마음은 결코 없습니다. 이것이 무상이자 무아입니다.

여러분들이 태어나서 지금부터 무수한 순간에 무수한 호흡을 했지만

그 호흡들은 결코 같은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모두 매순간마다 새로 일어난 호흡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하면 같은 호흡으로 압니다.

마음도 호흡처럼 매순간 새로 일어난 마음이 연속되는 과정만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