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누구나 괴로울 때는 괴로운 만큼 벗어나려는 노력을 합니다.
괴로움이 절실하면 노력도 더 열심히 하기 때문에
어느 의미에서 괴로움이란 새로운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괴로움이 소멸될 수도 있고,
잘못하면 더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괴로울 때는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괴로움은 단지 대상일 뿐이며 생길만 해서 생긴 것이라는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괴로움은 오히려 지혜를 주는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괴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괴로운 것을 없애려고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은 일시적인 방편입니다.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면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괴로움을 없애려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 탐욕으로 인해서 괴로움이 계속됩니다.
괴로움으로 인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빠지는 것은 선업을 쌓지 못하고
불선업을 더 많이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괴로움이 오히려 나를 더 튼튼하게 했다면
이것은 불선업을 선업으로 승화시키는 선한 재산이 많은 자 입니다.
이 선한 재산을 많이 만드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면서 쉬지 않고 흐릅니다.
한강의 한남대교 밑을 흐르는 물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흐릅니다.
그러나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는 것이지 한남대교 밑을 지나는 물은 매순간 전혀 새로운 물입니다.
마음이 흐르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먼저 마음이 다음 마음을 조건지우고 사라지지만,
먼저 마음에 있는 정보는 다음 마음에 고스란히 옮겨갑니다.
그래서 먼저 마음이 다음 마음과 같지 않지만 또 전혀 다른 마음일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과보가 전해지지 때문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같은 마음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핵심은 같은 마음이 아니지만 과보가 전해져서 그 마음이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이 과보는 내가 아닙니다. 이 과보는 원인과 결과입니다.
한 순간의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음 순간에 마음이 일어나는 현상 그대로,
죽을 때의 마음도 다음 마음인 재생연결식으로 이어지는 과정 또한 평상시처럼 순간적입니다.
마음은 잠시도 어느 곳에서 쉬고 있다가 몸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생명의 끝은 순식간에 다음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마치 시간이 어느 곳에서 잠시 쉬다가 갈 수 없는 것처럼,
마음도 시간처럼 쉬지 않고 흐릅니다.
그래서 죽으면 손가락을 튕기는 것보다 빠르게 어느 곳에서 다음 생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시간처럼 잠시도 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생명이 이어지는 기간이 49일 걸린다는 것은 잘못된 견해 입니다.
부처님은 그럼 말씀을 결코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만약 49일 동안 어디엔가 있다가 몸을 받는다고 한다면 불교의 모든 법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연속선상에 있지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라지면서 다음 마음을 조건지우고 사라집니다.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다고 알면 무상의 지혜가 나고,
그 무상은 어떤 누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닌, 바로 원인과 결과에 의한 것이라고 알고,
무아를 아는 과정이 다가옵니다.
바로 이때 무아는 자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은 있지만 그것이 나의 마음이 아니고 단지 조건에 의한 마음입니다.
바로 이것을 아는 것이 무아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자아가 없어서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집착이 끊어져서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렇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역시 부처님도 이것을 알기 위해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바라밀 공덕을 쌓으셨습니다.
그리고 부처가 되시기 위해서 태어나셨지만 자신이 지은 불선업의 과보를 충분히 받으신 뒤
일정한 수행의 과정을 거쳐서 무아라는 사실을 비로소 아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 지혜를 얻기 위해선 자신이 지은 불선과보의 터널을 뚫고 나와야 합니다.
그냥 거저 지혜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을 통하지 않고 지식으로는 지혜가 자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몸소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실천적 수행을 해야 비로소 지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처음부터 무아를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무아를 지식으로 알려고 하지 말고, 단지 실천적 수행을 통해서 알려고 해야 합니다.
무아를 알면 열반에 이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무아의 진실을 알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온통 자아를 강화하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정신과 물질을 빨리어로 나마, 루빠라고 합니다.
여기서 정신은 나마이고 루빠는 물질입니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명색(名色)이라고 합니다.
명은 정신을 말하고 색은 물질을 말합니다.
정신은 대상을 인식하지만 물질은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내 마음, 내 몸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단순한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일 뿐입니다.
마음과 몸이라고 할 때는 자신의 마음과 몸으로 아는 경향이 있지만,
정신과 물질이라고 할 때는 하나의 개체로서의 대상으로 이해하기 쉽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때의 정신을 상좌불교에서는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같은 말인데 쓰임에 따라서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의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무슨 식, 무슨 식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 세 가지 범주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을 이상 세 가지 외에 다른 것은 분류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온 무슨 무슨 식(識)이라는 것 때문에
마음이 여러 가지가 있는 줄 알고 혼란을 느끼는 경우를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부처님께서 분류하신 것에 근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
첫째, 마음입니다. 이것을 빨리로로 찌따라하는데
한문으로 심(心)이라고 합니다. 마음 심(心)자 입니다.
이때의 마음은 마음의 작용을 말할 때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에는 마음이 있고 마음의 작용이 있습니다.
이때의 마음은 오온에서 식이고, 마음의 작용은 수, 상, 행입니다.
그래서 마음이라고 할 때는 마음의 작용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마음은 반드시 마음의 작용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일어날 때는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 함께 일어나서 함께 사라집니다.
이것들은 하나이면서 각각의 기능이 달라 이렇게 분류합니다.
빨리어로 ‘찌따’라고 말할 때는 회화, 잡색, 여러 가지의 그림, 그런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작용인 수상행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면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그림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생각이 있습니다.
이것을 빨리어로는 마노라고 하는데 한문으로는 의(意)라고 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데 이때 의(意)가 바로 마노입니다.
이것도 마음이지만 감각기관의 하나로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기능을 합니다.
우리가 수행을 할 때 법이라는 대상을 보는데
이 알아차려야할 대상이 바로 意의 감지 대상입니다.
이때의 의(意)는 심(心)이 정신적인 것의 본질을 뜻하는 것일 때,
그것과 다른 미세한 느낌의 사유와 관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아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빨리어로 윈냐냐라고 하는데 한문으로는 식(識)이라고 합니다.
육입이 육경과 부딪혔을 때 육식이 일어나는데 이 때 육식이 여섯 가지 아는 마음 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실제는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에 기능이 있어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식이 없으면 수상행도 없고 몸이라고 하는 물질도 없습니다.
이상 심, 의, 식 세 가지 것들이 하나이지만
단지 상황과 역할에 따라 다르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복잡한 마음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이러한 필요를 느끼신 것 외에
다른 의도가 있어서 세 가지로 분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유정이라고 하고 중생이라고 하는 생명들은 모두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31개의 세계에는 모두 마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동일합니다.
단지 몸의 형태만 다릅니다. 그러나 천상의 무색계는 몸이 없고 마음만 있습니다.
무색계를 빼고는 모두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것은 몸에 따라 마음의 수준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다 같은 마음인데 마음의 상태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몸에 따라 그 수준의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물론 마음에 따라 그 몸이 생기고,
또 그 몸의 상태에 따라 그 몸의 수준과 같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생명체는 지옥의 마음이 있고, 축생은 축생의 마음이 있고,
아귀는 아귀의 마음이 있고, 아수라는 아수라의 마음이 있고,
인간은 인간의 마음이 있고, 천인은 천인의 마음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나 범부나 다 똑같은 인간의 마음인데,
부처님께서는 의식이 고양되어 범부와 구별되는 지혜가 있습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신이 아니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십니다.
단지 지혜가 나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 우리와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몸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예를 들면 선한 마음이 선한 행동을 하게 하여 선한 과보가 생기면,
다음에 선한 과보의 정보가 다음 마음에 전해져서 지금 이후의 몸과 마음이 만들어지고,
계속하여 다음 생과 다음에 생긴 몸이 만들어 집니다.
윤회라는 것은 이러한 과정들이 연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결정하는 어떤 다른 존재는 없습니다.
모두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행위를 일으키고 이것이 업이 되어
다음에 과보를 받는 이러한 진실만 있습니다.
부처님의 지혜도 수많은 생애동안 쌓은 바라밀 공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부처님은 살아있는 생명 중에서 가장 수승한 바라밀 공덕의 과보로 부처로 태어나셨습니다.
세상은 무엇이나 저 홀로 되지 않고 선업의 마음과 악업의 마음의 결과로 생깁니다.
그러나 이렇게 선업의 과보를 받아서 태어나신 부처님께서도
일정한 수행의 과정을 거쳐서 부처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로 태어났다고 해서 그냥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수행을 해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부처님께도 보살이셨을 때 한 행위에 대한 과보를 피할 수 없어서
6년 동안의 고행을 거치신 후에야 비로소 부처님이 되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토록 우리는 모든 것이 마음이 이끄는 것이고, 이끄는 그 마음에 따라서 행위를 하고,
그 행위는 반드시 과보를 일으키고, 그 과보가 다음 마음에 전해져서 그것을 지속시키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건들을 원인과 결과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 살고 있다면 과거에 잘 살만한 원인을 만든 것이고,
현재 우리가 못 살고 있다면 과거에 못 살만한 원인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까요?
지금 현재 새로운 원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새로운 원인이란 이 순간에 정신과 물질을 알아차리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원인이 되어서 이 과보가 다음 생에 더 좋은 결과를 만들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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