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하나의 세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몸 밖으로 나가면 밖에 있는 세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오면 자신의 몸과 마음에 세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밖으로 나가거나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오거나,
알아차림이 없는 세계와 알아차림이 있는 세계가 있습니다.
알아차림이 없는 세계는 관념의 세계이며,
알아차림이 있는 세계는 실재하는 궁극의 세계입니다.
궁극적 진리는 실재하는 세계에만 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문제라고 보면 점차 큰 문제로 보입니다.
이는 마음이 집착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안에 있는 세계나 밖에 있는 세계나 어느 세계에 있거나
알아차림이 함께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그 세계가 청정합니다.
이 청정한 세계에서만 고요함이 생기고 해탈의 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범천 사함빠띠가 한쪽 어깨에 상의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은 뒤에 세존을 향해서 합장을 하며 간청을 했습니다.
“세존이시여, 법을 설해주소서.
선서께서 법을 설하소서.
삶에 먼지가 적은 중생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법을 듣는다면 알 수 있을 것이나,
법을 설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조차 쇠퇴할 것입니다.”
사함빠띠는 다시 게송으로 간청했습니다.
“세존 이전의 마가다국에는 어지러운 법들이 설해져있으니
때 묻은 자들이 사유한 것입니다.
이제 세존께서 오셨으니 불사(不死)의 문을 여시어,
그 법을 듣고 때 없는 자들이 깨닫게 하소서.
지극히 현명한 분이시여,
모든 것을 보는 분이시여,
슬픔이 제거된 분이시여,
산의 정상에 있는 바위에 오르면 주위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법으로 이루어진 누각에 올라서서
태어남과 늙음에 정복당하고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소서.
영웅이시여, 전쟁의 승리자시여, 일어나소서.
빚 없는 대상들의 지도자처럼 세상을 다니소서.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아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세존께서 사함빠띠의 청을 들으신 뒤에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범천아, 나는 생각했다.
내가 도달한 이법은 깊고, 보기가 어렵고, 고요하고, 숭고하다.
단순한 사색에서 벗어나 미묘하여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집착하기 좋아하여 아예 집착을 즐긴다.
그런 사람들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도리,
연기의 도리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한 모든 행이 고요해진 경지,
윤회의 모든 근원이 사라진 경지,
갈애가 다한 경지,
집착을 떠난 경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른 경지,
그리고 열반의 도리를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가 비록 법을 설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만 피곤할 뿐이다.”
이렇게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범천아! 이런 깊은 사색 끝에
나는 법을 설하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라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다시 사함삐띠는 세존께 청했습니다.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삶에 먼지가 적은 중생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법을 듣는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니,
법을 설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조차 쇠퇴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게송으로 간청을 했습니다.
“세존 이전의 마가다국에는 어지러운 법이 설해져있으니
때 묻은 자들이 사유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세존께서 오셨으니 불사의 문을 여시어
그 법을 듣고 때 없는 자들이 깨닫도록 하소서.
지극히 현명한 분이시여,
모든 것을 보는 분이시여,
슬픔이 제거된 분이시여,
산의 정상에 있는 바위에 오르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법으로 이루어진 누각위에 올라서
태어남과 늙음에 정복당하고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소서.
영웅이시여, 전쟁의 승리자시여, 일어나소서.
빚 없는 대상들의 지도자처럼 세상을 다니소서.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아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세존께 똑같이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도 다시 사함빠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범천아, 나는 생각했다.
내가 도달한 이법은 깊고, 보기가 어렵다......”라고
다시 똑같은 게송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어렵게 도달하였다.
그러나 지금 결코 드러낼 수 없다.
집착과 분노에 억눌린 자들은 이법을 원만하게 깨달을 수 없다.
흐름을 거슬러 가기도 하고,
미묘하고 깊고 보기 어렵고 섬세하니,
집착에 물든 자들이 어떻게 이법을 보겠는가?
어둠의 뿌리로 뒤덮인 자들이.
범천아! 이런 깊은 사색 끝에
나는 법을 설하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또다시 사함삐띠는 세존께 청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삶에 먼지가 적은 중생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법을 듣는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니,
법을 설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조차도 쇠퇴할 것입니다.”
그리고 똑같은 게송으로 세존께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범천의 청이 지극함을 아시고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켜 부처님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여러 중생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먼지가 적은 중생, 먼지가 많은 중생,
감각기관이 날카로운 중생, 감각기관이 무딘 중생,
자질이 좋은 중생, 자질이 나쁜 중생,
가르치기 쉬운 중생, 가르치기 어려운 중생들을 보셨습니다.
아울러 저세상에서의 두려움을 의식하며 지내는 중생이 있는가하면
저세상의 두려움을 의식하지 않고 지내는 중생도 있음을 보셨습니다.
비유하면 연못에 연꽃들과 같으니
그곳에는 푸른 연꽃, 붉은 연꽃, 흰 연꽃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물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물의 보호를 받는데,
어떤 연꽃은 물에 잠긴 채 자라고,
어떤 연꽃은 물의 표면에 있고,
어떤 연꽃은 물위로 솟아나와 물에 젖지 않은 채 있다.
그와 같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참으로 여러 중생이 있었다.
먼지가 적은 중생, 먼지가 많은 중생...
저세상에서의 두려움을 의식하지 않고 지내는 중생도 있음을 보셨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사함빠띠에게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들에게 불사의 문을 열겠으니,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 두어라.
범천아, 나는 단지 피곤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에게 덕스럽고 숭고한 법을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함빠띠는 세존이 설법을 허락하셨음을 알고
공손히 절을 하고 오른쪽으로 돈 다음 그곳에서 사라졌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상으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법을 펴게 되는 과정을 율장에 있는 기록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부처님께서 범천 사함빠띠와 했던 약속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펴는 조건을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법을 펴는 조건으로 모든 생명들에게 내건 약속이자 조건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원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주석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 인도사회는 제사를 지내는데
수백 마리의 소, 양, 돼지 따위를 제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의 참된 삶을 위해서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살아있는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살생을 금하는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제사를 지내지 말 것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만으로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죽은 자는 이미 새로운 생을 받아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제사에 대한 의미가 없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죽은 자를 위해 제사가 필요하셨다면,
부처님 재세 시에 조상께 대한 천도뿐만 아니라,
죽은 가족이나 제자들을 위해서도 분명히 제사를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제사를 지내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이런 것들을 금하셨던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무아의 실상을 알 수 있어야합니다.
자아가 있어서 다음 생에 전해진다면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의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그 과보가 다음 생에 전해져서 새로운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므로,
제사를 지낼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사를 문제 삼기 이전에 마음의 실재(實在)를 알아야합니다.
마음은 매순간 같은 마음이 아니며,
더구나 죽은 뒤에 생기는 마음은 더더구나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전혀 새로운 조건에서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므로 같은 마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실재하는 현상입니다.
이것을 바로 무아라고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 세 번씩이나 법을 설할 것을 거절하신 것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과연 최고의 지혜를 얻으신 부처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여 피곤하다고 생각해서 법을 펴는 것을 거절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역대의 모든 부처님들은 깨달음을 얻은 뒤에
반드시 범천이 세 번 법을 청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전통은 법의 존귀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은 원하는 자에게 준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리 좋은 법이 있어도 법이 아닙니다.
이전 전통과 원리 때문에 법을 펴는 것을 세 번 거절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세 번 청법을 하는 것은 사함빠띠가 한 이런 전통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에 대한 존귀함을 드러내는 예경(禮敬)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마음은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는 매순간이 생일입니다.
우리가 생일이라고 정하는 것은 단지 인간들의 관습이지 진실은 아닙니다.
마음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생긴 전통적인 관습일 뿐입니다.
마음이 일어나서 지속하는 순간은 빛이 번쩍하는 순간의 백만분의 일보다 빠르다고 합니다.
마음은 이렇게 빠르게 일어나서 빠르게 사라집니다.
그리고 사라지는 것이 거듭 지속됩니다.
이렇게 빠른 마음 중에 어느 것을 내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은 단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여기에 주도적인 나의 마음은 없습니다.
오직 순간순간의 조건만 있습니다.
모든 것들은 진동합니다.
이것이 무상이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입니다.
물질이 한 순간에 한 번 일어나서 사라질 때 마음은 17번이나 일어나서 사라집니다.
이러한 마음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오직 부처님의 혜안으로 밝히신 것을 믿고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추론적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마음은 그것 자체가 비물질이라서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느낌과 지각과 의도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작용인 수상행을 신하라고 하고 아는 마음인 식을 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신하를 통하여 왕의 근황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통하여서만이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고정관념의 틀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진리는 자기 생각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을 통해서만이 진리의 문이 열립니다.
고따마 부처님이나 역대의 모든 부처님이
모두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이 무상, 고, 무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은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대상을 분리해서 지켜보기 때문에
대상의 성품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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