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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75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0:2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몸과 마음에 나타난 현상은 모두 법입니다.

 

처음에는 대상으로 알아차린 법이 나중에는 진리의 법이 됩니다.

이러한 법은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법을 대할 때 자신의 방식으로 접근하지 말아야 합니다.

법은 법의 방식대로 대해야 합니다.

법이 요구하는 방식을 놔두고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면

법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진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방식이란 선입관을 가지고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법의 방식이란 나타난 대상을 어떻다고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법을 바르게 아는 방법은 위빠사나 수행을 경험한 스승에 의해서만 배울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들은 기존의 우리 삶의 질서 속에서 없었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을 법답게 보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사고방식과

새로운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경험한 스승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자애로 얻는 기쁨에 대해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섯째, 자애로운 사람은 인간 이외의 존재들로부터 존경을 받습니다.

동물들조차도 그에게 끌리는 마음을 갖습니다.

수행자들은 숲 속에서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면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물들 사이에서도 즐겁게 보낼 수 있습니다.

 

여섯째, 만약에 그가 어떤 피할 수 없는 업을 받게 될 운명이 아니라면

그의 자애로운 마음으로 인해 잘못된 것들과 그 밖의 것들로부터 보호될 수 있습니다.

 

자애로운 마음은 활력이 있는 건강한 힘이 있기 때문에 적대적인 자극을 중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화를 내는 마음이 몸과 마음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자애로운 마음이 몸과 마음에 건강한 활력을 줄 것입니다.

 

일곱째,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면 자애로움 때문에 보이지 않는 천인들이나 다른 많은 대상들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류는 따르고 동류가 아닌 것은 반발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파장을 가지면 같은 파장을 가진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여덟째,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면 빠르게 집중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혼란에 빠지지 않고 성내는 마음의 파장이 없기 때문에

고요한 마음이 되어 대상을 쉽게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평화롭게 살 수 있으며 그를 상대하는 사람에게도 함께 평화를 나누어 줄 것입니다.

 

아홉째,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면 자신의 얼굴 표정이 아름답습니다.

일반적으로 얼굴은 마음의 상태를 반영합니다.

 

화를 낼 때는 심장이 평소보다 두 배 내지는 세 배 더 빠르게 피를 분출합니다.

그래서 미워하거나 화를 내는 얼굴일 때는 빨갛게 물들거나 검게 변합니다.

그래서 일그러진 얼굴이나 비참한 상태의 모습이 됩니다.

 

이와 반대로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면 기쁨과 고요함으로 인해 피를 맑게 합니다.

그래서 사랑스러운 얼굴이 됩니다.

 

인간에게 타고난 미모보다는 마음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얼굴이 더 아름다워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4주가 되었을 때 논장과 연기를 모두 정리하시면서

여러 가지의 색깔이 방출되어 강한 후광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모두 마음가짐에 따라 나타나는 빛입니다.

 

열 번째, 자애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화를 내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평화롭게 죽으면 죽은 뒤에 평화로운 얼굴의 상태가 유지됩니다.

 

열한 번째,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죽으면 그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음 생을 받습니다.

선정수행의 자애로움이 있으면 천상의 선정의 세계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좋은 선과보를 받아 선한 사람이 됩니다.

이상이 자애에 관한 기쁨이었습니다.

 

주석서에서는 성냄 없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성냄 없음은 잔학함이 없는 것이 그 특징이다. 혹은 온화함이 그 특징이다.

 

마치 다정한 친구처럼 성가심을 버리는 것이 그 역할이다.

혹은 불타는 것을 버리는 것이 그 역할이다.

마치 전단향처럼. 차가움으로 나타난다. 마치 보름달처럼.’

 

이상이 주석서의 성냄 없음에 대한 정의입니다.

 

여기서 차가움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유독 눈에 뜨입니다.

이 말은 자애는 조절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헤픈 것이 아닙니다.

감성적인 것은 상황에 따라서 쉽게 흔들릴 수 있지만

이성적인 것은 항상 변함이 없는 진정한 바른 마음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차가움이란

마치 밤에 빛나는 보름달처럼 차갑지만 그 속에 따뜻함이 있는 그런 차가움을 말합니다.

 

다음은 7번 중립입니다.

중립이란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서로가 기능을 할 때 넘치지 않고

중간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중립을 평정이라고도 합니다.

초전법륜경에서는 이 중립을 중도라고도 합니다.

 

느낌에서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또는 덤덤한 느낌이라고 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동의어입니다. 중립은 경전에서 여러 가지 말로 표현됩니다.

 

수행자가 감각적 욕망과 극단적 고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중도를 취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극단은 지성을 나약하게 하고 악에 받치게 하여 불선과보를 받습니다.

두 가지 극단은 대상을 움켜쥐려는 또 다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입니다.

 

깨달음은 중도로써 고요함을 얻는 지혜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단적 고행이나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도 불선행을 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타인에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렇게 타인도 극단적인 것을 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에

이중의 불선과보를 받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불교도들은 어떤 형태로든 극단적 고행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극단적 고행이 불선과보를 가져오는 이유는 그것들이 선한 마음의 작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극단적 고행은 중도의 마음, 중립의 마음의 작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런 극단적 고행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전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중도가 있기 때문에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행해지는 어떤 형태의 행위든

모두 중도적 관점에서 보고 그렇게 실천되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은 16단계의 지혜를 계발합니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로부터 시작하여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

그리고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를 계발한 뒤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지혜를 얻습니다.

이렇게 바르게 수행을 하면 11단계에서 평등의 지혜를 얻습니다.

이때의 평등이 중립의 지혜입니다.

 

이 단계에서 더 수행을 하여 도과를 성취합니다.

그러므로 평등의 지혜는 깨달음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입니다.

그래서 평등의 지혜가 없으면 다음 단계인 도과를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또 깨달음의 7가지 요인 중에 마지막 일곱 번째가 사각지(捨覺支)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중립의 마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8가지의 세속적 조건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익과 손실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명예와 불명예를 감수해야 합니다.

또 칭찬과 비난 속에서 감내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통과 행복을 함께 경험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바로 중립입니다.

 

이러한 중립이 없으면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 하며 괴로움뿐인 윤회를 거듭해야 합니다.

우리가 8가지 세속의 조건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익과 손실은 늘 함께 있습니다. 명예와 불명예도 늘 함께 있습니다.

칭찬과 비난도 늘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과 행복도 늘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 고통스러울 때 행복을 생각해야 하고 행복할 때 고통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어느 것 한편에 치우치면 우리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이런 중도적 관점만이 우리를 더 높은 세계로 끌어올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삶의 변천 가운데서 단단한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고 서서

완전한 평등을 얻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대꾸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들을 때는 깨진 종처럼 침묵해라.

만약 네가 그렇게 한다면 나는 네가 비록 아직 열반에 이르지 않았지만

이미 열반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중도적 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과연 다른 사람들의 비난에 깨진 종처럼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깨진 종은 울리지 않습니다.

피를 흘리는 머리로 종을 쳐도 그 종은 깨졌기 때문에 울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마음, 아라한의 마음입니다.

 

모든 사람의 어떤 비난도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을 때 그것은 비난으로 그치고 맙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비난이나 욕설, 살인을 하려는 의도나 또는 왕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최고의 칭송을 모두 완전한 평정 속에서 침묵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상대의 제어되지 않은 말에 동요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감각적 욕망의 그물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연못에 핀 연꽃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것처럼, 이처럼 세속의 유혹에 빠져 헤매지 말아야 합니다.

 

주석서에서는 중립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그 대상들에서 중립적인 상태를 갖는 것이 중립이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공평하게 나르는 특징이 있다.

모자라거나 넘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혹은 편견을 끊는 역할을 한다.

중립적인 상태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에 대해 공정하기 때문에

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말들을 공평하게 모는 마부와 같이 보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중도적 관점에서 모든 일을 한다면 공평하게 말을 모는 마부와 같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실수가 적고 그리고 불행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으며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중도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가진 것인지 이제 알아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초전법륜경의 중도는 불교의 가르침의 모든 핵심에 서 있습니다.

중도적 관점에서만 흔들림 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습니다.

 

만약 좋아하거나 싫어할 때 좋아함에 빠지거나 싫어함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좋아할 때나 싫어할 때나 상관없이 중도적 관점으로 대상을 보는 것입니다.

 

다음부터 시작되는 마음의 작용은 모두 감각기관들의 마음에 관한 것으로

6가지가 쌍으로 구성되어 있는 12가지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하나씩 묶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우리는 마음의 작용이 단순히 마음의 작용으로 그치지 않고

그 순간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함께 결합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결합은 몸에도 똑같이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진 종처럼,

남의 비난으로부터 반응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