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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76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0:2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내가 괴롭다면 그것은 진실을 모르기 때문이며

탐욕으로 인해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괴롭지 않다면 그것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며

탐욕이 없어 바라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관념에 가치를 두지만

아는 사람은 실재하는 성품에 가치를 둡니다.

모르는 사람은 지위, 명예, 물질적인 것을 선호하지만

아는 사람은 오직 바른 마음가짐을 선호합니다.

 

모르는 것보다 알아차리는 것이 좋으며

바라는 것보다 바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괴로우며

자신의 마음을 충족시키려는 것 때문에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번뇌의 진원지인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진실에 접근하는 가장 유일한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방법이 아닌 것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번뇌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않고서는

완전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연기를 통찰하신 뒤에

이를 객관적으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괴로움을 두고 어디에서 무엇을 찾겠습니까?

 

몸과 마음을 통해서 일어난 실재를 아는 것만이

우리가 해탈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아셔야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마음의 작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마음의 작용은 감각기관과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여섯 가지가 있는데, 두 가지씩 묶어서 열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8번, 감관의 평온과 9번, 마음의 평온입니다.

감관은 감각기관을 말합니다.

감관의 평온을 빨리어로 ‘가야빠삿띠’라고 합니다.

여기서 감관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인 수상행의 세 가지 감각기관을 말합니다.

가야는 몸, 신체, 모임, 집합이라는 뜻이며 빠삿띠는 평온이라는 뜻입니다.

 

빨리어 ‘가야’는 일반적으로 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나, 여기서는 모임이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이때의 ‘가야’는 몸이 아니고 수상행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상징적으로 수상행을 감각기관이라는 뜻으로 감관이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수상행이라는 감관의 평온함으로 자연스럽게 몸이 편안해 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로는 수상행이라는 감각기관으로 말하는 것이 바른 표현이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평온함을 빨리어로 ‘찌따빠삿띠’라고 합니다.

이때의 찌따는 여러 가지의 그림이라는 뜻과 마음이라는 뜻이 함께 있습니다.

여기서도 찌따가 수상행을 포함한 뜻이 있어서 찌따빠삿띠는 마음의 평온이라고 합니다.

수상행이 평온하면 마음이 함께 평온하므로 마음의 평온인 것입니다.

 

이상 말씀드린 감관의 평온과 마음의 평온에 대한 표현은

다음에 계속되는 경쾌함, 부드러움, 일의 적당함, 능숙함, 바름에서도

동일하게 몸이라고 하지 않고 감관이라고 말합니다.

 

평온은 수행 중에 나타나는 단계적 현상 중의 하나입니다.

수행을 해서 나타나는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인은

알아차림, 대상에 대한 탐구, 정진, 희열, 평온, 집중, 평정입니다.

 

이 중에 다섯 번째가 평온입니다.

우리가 깨달음의 요인이란 해탈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상의 일곱 가지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평온은 고요함의 상태로, 여러 가지의 혼란을 경험한 뒤에 오는

다섯 번째 단계의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가 너무 좋아서 휴식을 취하거나 안정을 얻습니다.

그러나 평온도 더 높은 지혜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평온의 단계가 왔을 때에도 평온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얼마나 고생해서 온 평온인데 누가 이것을 쉽게 놓으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평온이 오면 고요함과 편안함이 지배하기 때문에 거기에 머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누구도 스스로 평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혼자서는 못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반드시 그 평온으로부터 나와야하는데 이 평온으로부터 구출해 주는 것이 스승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스승은 그때 고요함, 평온에서 나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들은 그 말을 듣고도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수행은 이런 것입니다.

 

평온도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 자체가 깨달음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모르면 그 평온이 깨달음인 줄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깨달음이란 그런 평온조차도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평온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온은 한시적인 것이고 특별한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깨질 때는 좌절을 하거나 고통을 겪습니다.

그래서 평온도 하나의 과정이라고 알고, 평온 자체를 알아차려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만약 감관의 평온과 마음의 평온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고요함에 의해 해태와 혼침이 올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수행을 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가 평온이 오면 누구나 이 평온을 즐기게 됩니다.

그래서 바로 그 순간 수행이 퇴보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이 평온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수행자들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반드시 스승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스승의 역할은 이러한 평온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온은 열반으로 가는 과정이지 그것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석서에서는 평온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고요함이 감관의 평온이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마음의 평온이다.

여기서 감관이라는 것은 수온, 상온, 행온의 세 가지 무더기들이다.

이 둘을 하나로 묶어 감관과 마음의 평온은 몸과 마음의 불안을 가라앉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몸과 마음의 불안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동요하지 않음과 침착함으로 나타난다.

몸과 마음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들은 몸과 마음을 가라앉지 못하게 하는 들뜸 등이 오염원과 반대가 된다고 알아야한다.’

 

이처럼 주석서에서는 가야빠삿띠를 몸의 평온이라고 하지 않고

감각기관이라는 뜻으로 감관의 평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에서도 주석서에서 밝힌 것처럼 몸과 마음에서 생긴 문제는

몸과 마음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오직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은

매우 실재적이고 실질적인 것이고 가장 필요한 것이고 가장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장소인 것입니다.

 

다음은 10번, 감관의 경쾌함과 11번, 마음의 경쾌함입니다.

경쾌함이란 가볍고 민첩한 것을 말합니다.

감관의 경쾌함이란 마음의 작용인 수상행의 모임을 말하는 감관의 가볍고 민첩함입니다.

마음의 경쾌함이란 마음의 가볍고 민첩함입니다. 그렇습니다.

 

몸의 가벼움이 있으면 마음의 가벼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수상행이 가벼우므로 마음이 가볍고 그 마음이 가벼우므로 오온이 가볍습니다.

 

감관과 마음의 경쾌함이란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 중의 다섯 가지 장애인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익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감관의 경쾌함은 감각기관의 무겁고 둔하고 완만한 느낌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경쾌함은 마음의 무겁고 둔함을 제거합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경험했을 때 몸이 하늘을 날 것 같고 마음이 승화된 것이

바로 감관의 경쾌함과 마음의 경쾌함을 느낄 때인 것입니다.

 

주석서에서는 감관의 경쾌함과 마음의 경쾌함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감관이 가벼운 상태가 감관의 경쾌함이다.

마음이 가벼운 상태가 마음의 경쾌함이다.

 

이들은 몸과 마음의 무거움을 가라앉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몸과 마음의 무거움을 덜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몸과 마음의 느리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몸과 마음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들은 몸과 마음의 무거움을 초래할 해태와 혼침 등의 오염원에서 반대라고 알아야한다.’

이상이 감관의 경쾌함과 마음의 경쾌함에 대한 주석서의 정의였습니다.

 

다음은 12번, 감관의 부드러움과 13번, 마음의 부드러움입니다.

 

감관의 부드러움은 마음의 작용인 수상행들의 모임인 감관의 부드러움입니다.

부드러움이란 거칠고 사나운 상태가 아닌 고요하고 가라앉은 상태를 말합니다.

 

사견과 교만한 마음으로 불선이 일어나면

자아를 집착해서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상대를 무시합니다.

그러면 불순해지고 거만해서 매우 거칠고 사나워집니다.

 

그러나 감각기관의 부드러움으로 거칠고 사나움을 제거합니다.

이들 부드러움으로 인해 몸도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집니다.

고요하고 겸손한 사람에게서 부드러움이 있는 것은

이들 두 가지의 부드러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있을 때는 부드러움이 없고 긴장합니다.

그러나 관용, 자애, 지혜를 가진 마음이 있으면 몸과 마음이 부드럽습니다.

부드러움과 단단함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마음가짐에 따라 매순간 변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돈이 있는 사람은 부드러울까요? 긴장할까요?

지위를 가진 사람은 부드러울까요? 긴장할까요?

명예를 가진 사람은 부드러울까요? 긴장할까요?

그렇습니다. 부드러울 수도 있고 긴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일가를 이루었다는 것이나, 무엇인가를 가졌다는 오만이 발휘되면,

아무리 좋은 지위를 얻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드러움보다는 긴장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부드러움은 선한 마음의 작용이고 긴장은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지위나 돈이나 명예나 하는 것들이 만약 긴장을 준다면

그것은 결코 선한 마음의 작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유익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그런 모든 것들은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인해서 우리가 고통과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주석서에서는 감관의 부드러움과 마음의 부드러움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감관의 부드러운 상태가 감관의 부드러움이다.

마음의 부드러운 상태가 마음의 부드러움이다.

이들은 몸과 마음의 뻣뻣함을 완화하는 특징이 있다.

몸과 마음의 경직된 상태를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저항하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몸과 마음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들은 몸과 마음의 경직된 상태를 초래하는

사견과 자만 등의 오염원과 반대가 된다고 알아야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항상 부드러운 마음으로 자애로움을 가지고

그것을 수용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선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