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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77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0:26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진리는 보편타당하고 일반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장 알기 쉬운 일반적 특성을 모릅니다.

무엇인가 항상 특별한 것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복을 구하지만 지혜가 있는 자는 복을 만듭니다.

몰라서 바라지만 알면 바라지 않고 스스로 만듭니다.

 

지혜가 있으면 주는 자란 없고 스스로 만든다는 것을 압니다.

몰라서 신비한 능력을 바라지만 알면 번뇌를 끊는 지혜를 구합니다.

 

지혜가 있으면 학문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행을 해서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지혜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며,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분명하게 실천합니다.

 

번뇌를 끊는 통찰지혜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느낌을 알아차려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이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쉽게 현재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15번 감관의 일의 적당함과 16번 마음의 일의 적당함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의 적당함이란 일에 대한 적응성, 순응성, 적합성을 말합니다.

관용과 보시를 하는 사람은 훌륭한 일을 하여 매사에 적응하고 순응합니다.

그래서 일을 함에 있어 능률이 오릅니다.

이러한 적응성은 훌륭하지 못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하게 합니다.

 

일을 할 때 부주의하여 느슨하게 줄을 잡아당기면 줄이 뒤엉키고 달라붙고

그리고 너무 강하게 잡아당기면 줄이 끊어지듯이

일을 함에 있어서 적당함이 있으며 두 가지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것들을 조율하는 것이 알아차림입니다.

수행은 마치 현악기를 켜는 것처럼 줄을 적절하게 조율하는 것을 말합니다.

너무 강하게도 너무 약하게도 하지를 않아야 소리가 나듯이

모든 일에 있어선 적당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감각기관의 일의 적당함과 마음의 일의 적당함입니다.

여기서 그냥 적당함이 아니고 어떤 행위를 하거나

그 행위를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적당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적당함이 바로 선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주석서에서는 감관의 일의 적당함과 마음의 일의 적당함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감관의 일의 적당한 상태가 감관의 일의 적당함이다.

마음의 일의 적당한 상태가 마음의 일의 적당함이다.

그들은 몸과 마음의 일에 부적합한 상태를 가라앉히는 특징이 있다.

그들은 몸과 마음의 일의 부적합한 상태를 부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어떤 것을 몸과 마음의 대상으로 만드는데 성공함으로 나타난다.

 

몸과 마음이 가까운 원인이다.

몸과 마음이 일의 적당하지 못한 상태를 초래할 때 초래할 나머지 장애들과 반대가 된다.

신뢰할 대상에 신뢰를 가져오며

이로운 행위를 쉽게 적응함이 마치 잘 정제된 금과 같다고 알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한 마음을 가지면 항상 일의 적당함을 알아서 선한 마음의 작용이 생깁니다.

항상 무슨 일을 하거나 기쁘고 즐겁게 사명감을 가지고 한다면 적절하게 바른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는 적당함이 없지만 임무를 가지고 즐겁게 기쁘게 한다면

적절함, 적당함이 그 일의 능률을 올릴 것입니다.

 

다음은 16번 감관의 능숙함과 17번 마음의 능숙함입니다.

 

감관의 능숙함이란 감관의 숙달된, 숙련된 경험 등을 말합니다.

이 말은 깨끗한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의 모임으로 인해 훌륭한 공적이 있는 것을 뜻합니다.

이때 훌륭한 공적이란 바로 능숙함, 숙련됨인 것입니다.

이처럼 숙련되고 능숙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거나 더듬거리지 않고 능란하게 처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능숙함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 고요하게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들은 진보와 보수의 그런 중간지점에 항상 모든 것들을 균형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진보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보수도 필요합니다.

진보는 위험하고 보수는 고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적절하게 조율하는 것이 경험입니다.

그래서 그 경험으로 무슨 일을 한다면 우리는 모든 일을 능숙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 경험을 살려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숙련됨입니다. 그것이 바로 능숙함입니다.

이런 것들을 기능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아비담마 논장에서는 훌륭한 선과보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기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각각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능을 살려야 합니다.

그것들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이 사회를 윤택하게 하고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기능만을 원하지 말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그 경험을 살려 능숙함을 갖는 것이 건강한 삶을 살고 선한 마음의 작용을 계발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주석서에서는 감관의 능숙함과 마음의 능숙함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감관의 능숙한 상태를 감관의 능숙함이라고 한다.

마음의 능숙한 상태를 마음의 능숙함이라고 한다.

그들의 특징은 몸과 마음의 건강함이다.

몸과 마음의 병을 덜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실수를 하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몸과 마음이 가까운 원인이다.

몸과 마음에 병을 초래할 불신 등과 반대가 된다고 알아야 한다.’

이상이 감관의 능숙함과 마음의 능숙함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다음은 18번 감관의 바름과 19번 마음의 바름입니다.

감관의 바름이란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라는 모임들인 감관의 바름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바름이란 마음의 곧음입니다.

바름이란 정직, 곧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바름이 있으면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인 거짓이나 속임수가 제거됩니다.

속임수는 자신의 허물을 덮어버리고 감추기 때문에 허물이 됩니다.

부정직함은 자신에게 없는 공적을 있는 것처럼 꾸미기 때문에 허물이 됩니다.

깨끗한 마음의 작용의 바름은 속임수와 이러한 부정직함을 제거합니다.

 

주석서에서는 감관의 바름과 마음의 바름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감관의 바른 상태를 감관의 바름이라고 한다.

마음의 바른 상태를 마음의 바름이라고 한다.

그들의 특징은 몸과 마음이 바름이다.

몸과 마음의 구부러짐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반듯함으로 나타난다.

몸과 마음이 가까운 원인이다.

몸과 마음에 구부러짐을 초래할 거짓이나 속임수 등과 반대가 된다고 알아야 한다.’

이상이 감관의 바름과 마음의 바름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무엇이나 빨리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실패를 거듭합니다.

그러나 가장 빠른 길은 굽어지지 않은 길, 바른 길 그것입니다.

그것은 정직함이고 바름입니다.

그래서 이런 바른 길은 지름길이라고 아셔야하겠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려서 빨리 성취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우회해서 더 멀리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감관의 바름, 마음의 바름이라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유념하셔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상으로 깨끗한 마음의 작용은 모두 25가지인데

그중에서 19가지가 연관되어 함께 일어나는 그 마음의 작용을 말씀드렸습니다.

 

깨끗한 마음의 작용 19가지 중에서 수, 상, 행의 전체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

방금 말씀드린 6가지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감관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감관의 평온, 감관의 경쾌함, 감관의 부드러움, 감관의 일의 적당함,

감관의 능숙함, 감관의 바름이란 6가지는 수, 상, 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서 밝힌 52가지 중에서 수와 상이 하나 밖에 없다고 말하였지만

여기서 수, 상, 행이라는 모임, 이 6가지가 나타난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수, 상, 행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상 깨끗한 마음의 작용 19가지는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선행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왜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다시 한 번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하나의 선행이 하나만 있지 않고 19가지를 함께 이룬다면 이 얼마나 유익한 일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고 선한 일을 해야 하는 것들이

바로 이런 많은 이익들이 수반되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다음은 절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절제라는 것은 금욕, 자제, 선하지 못한 행위를 회피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하지 못한 말이나 선하지 못한 행위나 선하지 못한 생계를 위해서 행동할 때

이것을 행하지 않고 억제하고 회피하는 것을 절제라고 합니다.

이상의 3가지는 정어, 정업, 정명으로 8정도의 계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절제는 이것과 반대되는 것들이 나타났을 때 자제하여 불선업을 행하지 않는 것이지만

계율은 자제하기 이전에 지켜야 할 원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제와 계가 같은 것이지만 그 쓰임에 따라서는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불선업을 절제할 때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실천합니다.

절제하는 3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단절에 의해 절제하는 것입니다.

나타난 불선업을 남김없이 끊어냄으로써 불선업을 절제합니다.

둘째, 현재 도착한 대상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 이 순간에 나타난 불선업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셋째, 계율의 준수로 절제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계율을 지킴으로써 허물을 범하는 것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주석서에서는 절제를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신, 구, 의 삼업의 악행으로부터 절제하는 것이 신, 구, 의 삼업으로 짓는 악행에 대한 절제이다.

이들 3가지의 특징은 신, 구, 의 삼업에 대한 악행을 위반하지 않는다.

혹은 어기지 않는다.

신, 구, 의 삼업으로 짓는 악행의 대상으로부터 움츠리는 역할을 한다.

이들을 행하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믿음, 양심, 수치심, 욕구가 적음 등의 공덕이 가까운 원인이다.

마음이 악행에서 등을 돌리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계율과 절제는 다릅니다.

계율은 지켜야할 원칙이지만 절제는 나타난 것을 행하지 않고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율과 절제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바른 마음의 작용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율은 딱딱한 것이라서 우리가 과히 반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율은 막아서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계율은 매우 소프트한 것입니다.

계율처럼 부드러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계율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행복을 유지할 수가 있고

바른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율은 뼈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계율을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절제라는 무기를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선하지 못한 행위에 직면해 있을 때 선하지 못한 행위를 피하는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이 절제가 바로 자기관리인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