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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78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0:28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자신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자신을 괴롭힙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재하는 것이므로 세속의 진리입니다.

 

이것은 없애야할 대상이 아니고 단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실재하는 것을 없애려고 하면 없애려고 한 만큼 더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속에서 찾아온 손님으로 알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탐욕이 있을 때는 ‘지금 탐욕이 있네’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성냄이 있을때는 ‘지금 화를 내고 있네’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리석음이 있을 때는 ‘지금 어리석음이 있네’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선행이고, 이것이 관용이고, 이것이 선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릴 때만이 비로소 번뇌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절제 세 가지 중에서 말씀드린 1번은 정어입니다.

정어는 바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바른말은 네 가지를 하지 않는 것으로

거짓말, 이간질, 거친 말,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절제하는 것입니다.

 

정어를 말할 때 바를 정(正)은 앞서서 밝힌 것처럼

상징적으로 ‘알아차림이 있는 말’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팔정도의 정(正)은 알아차림을 가지고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선한 행위이므로, 항상 깨어서 대상을 지켜보는 행위이기 때문에

청정한 상태를 유지 할 수 있습니다.

 

주석서에서는 정어를 이렇게 정의 합니다.

그렇게 보고 생각하는 자가 그릇된 말을 자제하는 것이 바른 말이다.

이것은 정사유와 연결되어 있고 그릇된 말버릇을 제거한다.

이것의 특징은 취득하는 것이다.

절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릇된 말을 버림으로서 나타난다.

이상이 정어에 대한 정의입니다.

 

다음은 2번은 정업(正業)입니다.

정업은 바른 행위입니다.

업과 행위는 같은 말입니다.

바른 행위는 몸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로

살생, 도둑질, 간음을 삼가하여 절제하는 것입니다.

 

살생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주지 않는 물건을 갖는 것입니다.

간음은 다른 여인과 정을 통하는 것입니다.

 

주석서에서는 정업을 이렇게 정의 합니다.

그렇게 절제하는 자가 살생, 도둑질 ,간음을 절제하는 것이 바른 행위이다.

이것은 바른 말과 연결되어 있고 그릇된 행위를 끊어버린다.

이것은 나쁜 행위를 부순다.

이것의 특징은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절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릇된 행위를 버림으로서 나타난다.

 

다음은 3번 정명(正命)입니다.

정명은 바른 생계수단을 갖는 것입니다.

바르지 못한 생계는 다섯 가지인데 이 거래를 삼가는 것을 말합니다.

 

바른 생계수단을 갖는 것은

무기거래, 생명체거래, 도살, 독약거래, 술이나 마약거래

이상 다섯 가지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외에도 부정직하게 부를 획득하는

사기, 배신, 점술, 속임수, 고리대금업이 바로 정명과 대치되는 것입니다.

 

재물을 얻을 때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얻지 않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얻어야 하며,

강제나 폭력을 써서 얻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얻어야 합니다.

어떤 방법이 되었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고통을 주고 얻어서는 안 됩니다.

부당하게 얻은 것들은 얻은 것이 아니고 고스란히 과보가 되어

바로 그것이 자신이게 해를 끼치는 새로운 원인을 만듭니다.

 

주석서에서는 정명을 이렇게 정의 합니다.

그 정어와 정업이 청정해지도록 그릇된 생업으로부터 절제함이 정명이다.

이것은 정어와 정업과 연결되어 있고 위선 등을 끊는다.

이것의 특징은 청정이다.

올바른 생계를 일으키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릇된 생계를 버림으로 나타난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러한 직업에 종사한다면 알아차리셔야 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선행을 하십시오.

이상이 세 가지 절제하는 것으로 정어, 정업, 정명이었습니다.

 

다음에는 무량함 두 가지입니다.

무량은 한량이 없다, 무한하다, 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선정 수행할 때 하나의 방법으로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무량심이라고 합니다.

이 사무량심은 자비희사(慈悲喜捨)입니다.

이 네 가지는 자애와 연민과 기뻐함과 평정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의 작용 중에서 두 가지인 연민과 기뻐함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애는 깨끗한 마음의 작용인 19가지 마음의 작용 중에서 성냄 없음이고,

평정은 깨끗한 마음의 작용인 19가지 중에서 중립입니다.

그래서 앞서 밝힌 두 가지를 포함하여 자비희사의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이 성립됩니다.

 

그 무량한 마음의 작용 두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번 연민과 2번 기뻐함입니다.

 

자애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예외 없이 모든 존재들의 번영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연민은 동정심으로 다른 존재들의 고통을 제거해주려는 마음입니다.

동정심을 가진 마음은 꽃보다 더 부드럽습니다.

봄바람 보다 더 부드럽습니다.

 

함께 기뻐함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고 호의적이고 적극적으로 이해하여 주는 기쁨입니다.

 

평정은 공평하게 바라보는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고, 혐오하지 않고,

좋아하거나 싫어함이 없는 균형을 갖춘 마음입니다.

 

사무량심을 자비희사라고 하는데 자(慈)는 자애이며,

비(悲)는 연민과 동정심이고, 희(喜)는 함께 기뻐함이고, 사(捨)는 평정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 사마타 수행 방법의 하나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나타난 대상을 지켜보는 수행이라서

사마타수행에서 바라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무량심은 그냥 생기지 않습니다.

먼저 성냄의 반대가 되는 자애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마음가짐에서 다음으로 연민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의 슬픔을 즐기거나 좋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애로 인하여 연민의 마음이 생겼을 때 비로소 남의 기쁨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것도 높은 수준의 정신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보통은 누구나 자아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남의 성공을 질투하고 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남의 슬픔에 연민을 갖거나,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지 못합니다.

 

자애와 연민과 함께 기뻐함이 이룩되면 자연스럽게 미워하지 않고, 혐오하지 않는

평정심을 갖습니다.

 

평정심은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마음이지만 무관심한 마음은 아닙니다.

무관심은 무지의 상태지만 여기서는 공평한 마음이기 때문에 무관심이 아닙니다.

 

자애와 연민과 기뻐함을 추구할 때 이것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상 세 가지를 집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평정심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평정심은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상태여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여 무관심한 상태가 되면 애써 이룬 마음가짐이 마지막으로 꽃을 피우기가 어렵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깨달음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 다시 평정심을 알아차리지만,

사마타 수행에서는 선정의 고요함이 목표이기 때문에 이 수준에 머물러 선정을 즐깁니다.

 

주석서에서는 연민과 기쁨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이 자애와 연민과 기쁨과 평정은 우선 몹시 기뻐하기 때문에 자애이다.

사랑을 느낀다는 뜻이다.

친구의 존재 혹은 이것은 친구에게 일어나기 때문에 자애이다.

 

다른 이가 고통스러워 할 때 선한 사람의 가슴이 동요하기 때문에 연민이라고 한다.

혹은 다른 이의 고통을 제거하고 죽이고 분쇄하기 때문에 연민이다.

혹은 고통 받는 자들에게 흩뿌려져서 충만함으로서 확장되기 때문에 연민이다.

그것을 가진 자는 그것 때문에 기뻐한다.

혹은 스스로 기뻐한다.

혹은 단지 기뻐하기 때문에 함께 기뻐한다.

원한이 없기를! 이라고 하는 관심을 버리고

중립적인 상태에 의지함으로서 평정하기 때문에 평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특징으로 살펴보면 자애는 유익한 상태로 일어난다.

이익을 가져오는 작용을 한다.

증오의 조복으로 나타난다.

중생에게서 사랑스러움을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악의를 가라앉힐 때 성취하고 갈애를 일으킬 때 실패한다.

 

연민은 중생에게 일어난 고통을 완화하려는 형태로 일어나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이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작용을 한다.

잔인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자들에게서 의지할 곳이 없는 상태를 보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잔인함을 가라앉힐 때 성취하고 근심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

 

기뻐하는 것의 특징은 다른 이의 성공을 기뻐하는 것이다.

질투하지 않는 작용을 한다.

싫어함을 제거함으로서 나타난다.

중생들의 성공을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싫어함을 가라앉힐 때 이것의 성공을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싫어함을 가라앉힐 때 이것을 성취하고

세속적인 희열로서 왁자지껄한 웃음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

 

평온은 중생들의 대한 중립적인 상태로 일어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중생들을 향해 평정한 상태로 보는 역할을 한다.

적개심과 찬동을 가라앉힘으로 나타난다.

 

“중생들은 업을 그 소유물로 갖는다.

업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중생들이 행복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이미 얻은 영화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여

업이 그들의 소유물임을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적개심과 찬동을 가라앉힐 때 이것을 성취하고,

무지에 바탕한 무관심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

무지는 감각적 욕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연민과 기뻐함은 범주에 대한 해설에 설한 대로 알아야 한다.

그곳에서는 근본삼매를 얻는 색계에 속하고 이것들은 욕계에 속하는 것이 차이점이다.

어떤 이는 자애와 평정은 일정하지 않은 법들에 포함된다고 한다.

그것은 동의할 수 없다

뜻으로 볼 때 성냄 없음이 바로 자애고 중립적인 평정이 바로 평정이다.

이상으로 사무량심 중에서 연민과 함께 기뻐함 두 가지와 함께

자애와 평정을 말씀드렸습니다.

 

마지막 마음의 작용은 52번째 어리석음 없음 한 가지입니다.

어리석음 없음은 지혜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논장에서는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일 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지만

선한 마음의 작용일 때는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지혜입니다.

 

이때의 지혜를 지혜의 능력이라고도 하고 한문으로는 혜근(慧根)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마음 52번째, 한 가지 1번은 지혜의 능력입니다.

지혜의 능력을 빨리어로 ‘빤닌드리야’라고 합니다.

지혜를 뜻하는 빤냐와 지각능력, 감각기관을 뜻하는 인드리야의 합성어입니다.

빤닌드리야는 이성, 지혜의 능력, 혜근 등의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의 능력을 이성이라고 보는 것은

지혜가 감정에 휩싸인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지혜는 반드시 집중의 고요함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감성이 아닌 이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지혜는 사마타 수행의 근접 집중과 근본 집중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집중은 단지 선정의 고요함이 대상이지 지혜가 목표는 아닙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에서는 사마타 선정의 지혜가 있지,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는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찰나 집중을 하기 때문에

궁극에는 대상의 성품을 알아차리는 지혜를 얻습니다.

이런 궁극의 지혜가 무상, 고, 무아입니다.

무상, 고, 무아라는 일반적 특성의 지혜를 얻어서

우리는 집착을 끊고 열반을 성취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