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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79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0:3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무엇이나 좋아하는 순간부터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좋아하면 반드시 좋아하는 것을 집착하여 감각적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 결과로 업을 생성하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과보를 받습니다.

당장은 좋지만 그 과보가 미치는 영향은 깁니다.

 

좋아하면 알아차림을 놓쳐 더 좋은 것을 바라기 때문에

좋지 않을 때는 괴로운 마음이 따릅니다.

좋아하는 것을 집착하면 세상과 단절하고

그 세계를 벗어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나쁜 결과가 생깁니다.

 

세속에서는 알아차림이 없어 좋아하는 것이 제어가 안 되지만

출세간에서는 알아차림이 있어서 단지 필요해서 합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놓쳐서 좋아했더라도

그 순간 ‘좋아했네.’ 라고 알아차리면 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지혜의 능력에 대해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지혜는 아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알았기 때문에 끊는 힘이 있습니다.

지식도 아는 마음이지만 끊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얻으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알아차린 결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지혜는 정신적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지혜를 목표로 삼되, 행함에 있어서는 결과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조건의 성숙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원인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바르게 알아차린 결과로 원인을 알아야하는 것처럼, 지혜도 알아차린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사실 원인을 안다는 것이 바로 지혜가 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지혜를 얻는 일정한 과정을 세 가지로 나눕니다.

첫째, 배움으로 구성되는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을 문혜라고 합니다.

고대에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들어서 아는 지혜로 스스로를 계발했습니다.

 

둘째, 순수한 생각으로 이루어 진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을 사혜라고 합니다.

이것은 정신적 사유이며 형이상학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서양에서 생긴 지혜는 거의가 이 단계에서 생긴 것들입니다.

 

셋째 수행으로 이루어진 지혜입니다.

통찰지혜 수행인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무상, 고, 무아를 아는 지혜를 얻어 도과를 성취합니다.

이것을 수혜라고 합니다.

 

수혜는 논리적인 이성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직접 실천적 수행을 해서 단계적 과정을 거쳐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지혜도 단계적인 과정을 거쳐서 차츰 계발됩니다.

 

지혜는 그 자체가 깨달음입니다.

특히 존재하는 것들의 일반적 특성인 무상, 고, 무아의 지혜는 부처님 가르침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열반은 불교에만 있습니다.

이 법을 모르는 생명을 끝없는 윤회를 해야 합니다.

 

지혜를 뜻하는 빨리어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 사용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지혜를 각각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지혜입니다.

지혜를 말할 때 ‘냐나’와 ‘빤냐’로 혼합해서 사용합니다.

그리고 ‘아모하’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빨리어 ‘냐나’는 지혜를 뜻하지만, 올바른 지식, 이해, 앎 등의 뜻이 있습니다.

‘냐나’가 지혜이지만 완전한 지혜가 아니고 초기에 일어나는 지혜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16단계 지혜도 모두 ‘냐나’입니다.

그래서 지혜라고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이해’, ‘앎’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음으로는 ‘빤냐’입니다.

 

빨리어 ‘빤냐’는 ‘냐나’ 다음에 오는 지혜로 ‘통찰지’라고 합니다.

빨리어 ‘빤냐’를 중국에서 그대로 음사해서 사용하는 것이 바로 ‘반야’입니다.

 

중국어 불교용어는 빨리어를 소리 나는대로 음사해서 사용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때의 ‘빤냐’를 ‘냐나’와 구별해서 사용하는데 일반적으로 ‘통찰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상의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본다는 뜻으로 통찰지혜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아모하’입니다.

‘아모하’는 ‘아’ 라는 부정관사 뒤에 어리석음이라는 ‘모하’가 붙어서

‘어리석지 않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어리석지 않음이란 지혜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이 무명의 반대가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때의 지혜는 ‘알아서 끊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지혜란 말은 ‘빠린냐’, ‘아빈냐’, ‘안냐’, ‘빠띠웨다’,

그리고 ‘빤냔드리아’ 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빠린냐’는 정확한 지식, 완전한 이해라는 뜻으로 ‘통달지’라고 합니다.

이 말을 중국에서는 ‘편지’, 또는 ‘획득지’라고 합니다.

 

‘편지’는 두루 아는 지혜라는 말인데 빠짐없이 골고루 아는 지혜이고

‘획득지’는 도과를 성취한 것을 말합니다.

‘빠린냐 빠띠웨다라’고 할 때는 정확한 지식에 대한 통달, 또는 편지통달이라고 합니다.

 

다음에 ‘아빈냐’는 ‘아는, 지혜가 있는’이라는 뜻으로 ‘신통지’라고 합니다.

보다 정도가 높은 지혜를 가진 것으로 초범지의 신통이 있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신통이 있는 초월적 지혜라고 해서 신통지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안냐’는 완전한 지혜라고 하여 ‘완전지’ 또는 ‘구경지’라고 합니다.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으로 ‘개오’라고도 합니다.

아라한의 지혜의 경지를 말할 때 ‘안냐’라고 합니다.

‘안냐 빠띠웨다’라고 할 때는 지혜의 통달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다음에 ‘빠띠웨다’는 관통, 통달, 통찰했다는 뜻이나,

통찰해서 도과를 획득한 것을 말합니다.

 

불교는 일반적으로 교학을 말하는 ‘빠리야띠’의 단계를 거쳐

수행을 말하는 ‘빠띠빠띠’에서 마지막으로 도과를 성취하는‘ 빠띠웨다’로 완성됩니다.

이때의 ‘빠띠웨다’가 관통, 통달했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다음에 ‘빤닌드리야’는 다양하게 아는 능력을 말합니다.

안다는 것은 무상, 고, 무아, 사성제인 고집멸도, 선업과 불선업, 업의 결과를 아는 것으로

이것을 ‘빤냐’라고 하는데 이것을 아는 능력을 바로 ‘빤닌드리아’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지혜라는 말은 필요에 따라서 적절하고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알기 때문에 느낌에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 윤회가 끊어집니다.

이것이 도과를 성취하는 것이고 궁극에는 아라한이 되는 것입니다.

 

안다고 했을 때는 무지가 아닌 밝음이며,

지속하는 것이 아닌 소멸시키는 것이며, 끊는 것을 말합니다.

모르면 계속하지만 알면 어리석음인 줄 알아서 끊습니다.

 

그러나 지혜라고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지혜도 알아차릴 대상의 하나입니다.

 

지혜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간교해집니다.

이런 지혜는 바른 지혜가 아니고, 지혜를 빙자한 바르지 못한 지혜입니다.

지혜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영리한 사람이 속이는 지혜를 갖습니다.

그래서 속이는 지혜를 바르지 못하고 구분지혜라고 합니다.

 

주석서에서는 지혜의 능력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어리석음 없음은 본성을 있는 그대로 꿰뚫는 특징이 있다.

혹은 실패 없이 적중해서 꿰뚫는 특징이 있다.

마치 숙련된 궁수가 쏜 화살이 관통하는 것처럼.

 

대상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마치 등불처럼.

미혹하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마치 숲속의 안내자처럼.

 

그러면 통찰지의 특징, 역할, 나타남, 가까운 원인은 무엇인가?

통찰지의 특징은 모든 현상의 본성을 꿰뚫는 것이다.

 

그것의 역할은 모든 현상의 본성을 덮어버리는 어리석음의 어둠을 분쇄하는 것이다.

통찰지는 미혹하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통찰지의 가까운 원인은 집중이다.

왜냐하면 집중에 든 자는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라는 경구가 있으므로.’

 

이상 마음의 작용 52가지를 모두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다른 것과 연관된 마음의 작용 13가지.

둘째,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 14가지.

셋째, 깨끗한 마음의 작용 25가지입니다.

 

이상 52가지의 마음의 작용에는 수행에 필요한 37조도품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작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습니다.

 

팔정도의 정견이 지혜의 능력이고, 정사유가 겨냥이며,

정어, 정업, 정명이 있으며 정정진이 정진이고,

정념이 알아차림이고, 그리고 집중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작용 52가지에 팔정도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법념처의 수행의 대상인 다섯 가지 장애가

모두 52가지 마음의 작용 안에 있습니다.

탐욕, 성냄, 해태, 혼침, 들뜸, 후회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5근(五根)과 5력(五力)이 있습니다.

믿음, 정진, 알아차림, 집중, 지혜입니다.

5근을 강화하면 자연스럽게 이것들이 5력으로 나타납니다.

 

다음으로 52가지 마음의 작용에는 자비희사의 4무량심이 모두 있습니다.

자비희사의 자(慈)가 성냄 없음이고, 비(慈)가 연민이고,

희(喜)가 기쁨이며, 사(捨)가 중립입니다.

 

다음으로 깨달음의 7가지 요인인 칠각지가 마음의 작용 52가지에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아차림, 대상의 탐구인 지혜의 능력, 정진, 희열, 평온, 집중, 중립이 모두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상으로 마음과 함께 있으면서 모든 일을 하는 마음의 작용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마음의 작용은 흔히 간과하기 쉬운 것들이나 사실은 수행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마음의 작용에 대해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바른 길이며 가장 가까운 지름길입니다.

이상으로 마음과 함께 있는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 52가지를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마음은 마음의 작용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알아야 비로소 마음이 무엇인지도 알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이러한 분석은 적절한 알아차림을 위해서 한 것이며,

결국에는 무아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이 가장 깊은 뜻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까지 52가지의 마음의 작용을 종류만 설명했을 뿐이지

이것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지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52가지 마음의 작용은 다시 89~121가지의 마음과 결합하여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마음의 작용들끼리도 결합하지만 다시 이 52가지가 마음과도 결합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수행자의 영역을 뛰어넘는 너무 전문적인 것이라서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신과 물질만 있는 줄 알았지, 정신 속에 있는 수, 상, 행이라는

마음의 작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수행을 시작하면 모두 나타나는 것들이 수, 상, 행이라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바로 수, 상, 행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비로소 마음의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비 물질이라서 보기가 어렵지만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을 통해서 그 진실한 모습을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