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상대의 잘못을 미워하지 말고 오히려 연민의 정을 보내십시오.
상대가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상대를 미워하는 것은 나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상대가 모르기 때문에 한일을 가지고 내가 미워한다면
공연히 상대의 과보를 떠맡아서 불필요한 짐을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에게도 이익이 없으며 상대에게도 이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잘못한 상대를 자애로 받아들이면
내게도 이로움이 있고 상대에게도 이로움을 줍니다.
서로에게 이로움이 있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생각으로 상대에게 연민을 보내지 말고
실제로 진심으로 상대에게 연민의 정을 보내야하겠습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부터 인식할 수 있는 마음과 인식할 수 없는 마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은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이 있고, 인식할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을 ‘인식과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식할 수 없는 마음을 ‘길을 벗어남’이라고 합니다.
이는 인식하는 과정을 벗어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보이지 않고 무아라고해서 제멋대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도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마음은 마음의 길이 있고,
마음과 함께 있는 몸은 몸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초월적인 존재가 모든 것을 만들고,
우리는 그 힘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지혜로 마음을 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마음은 일정한 질서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원인과 결과의 지배를 받는 것을 부처님께서 아신 것입니다.
여기에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만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종류가 많고 서로 결합하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많아서
복잡해보이지만 사실 내용은 하나입니다.
지금 우리가 계속해서 마음공부를 하는 것은
마음의 실제를 알아야만 무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실제를 알아야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무아를 알아야 비로소 욕망과 집착이 끊어져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무아를 알기 위해서 여러 가지 분석을 하고 실천적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만 알아서는 집착을 끊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적인 이해와 더불어 수행을 해야 합니다.
자기가 몸소 체험해서 얻은 지혜라야 무아를 알아서 집착을 여의고
그리고 번뇌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인식할 수 있는 마음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은 욕계, 색계, 무색계, 출세간계의 모든 마음입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으로는 하나이지만,
이상 크게 분류한 네 개의 세계 중에서 일어나는 곳에 따라서 다르게 분류합니다.
또 일어난 곳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전부 89가지 내지는 121가지가 있습니다.
마음은 대상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고 했는데,
이때의 마음은 모두 대상이 있어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일어난 대상을 마음이 압니다.
그래서 이때의 마음은 모두 인식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은 제멋대로 아는 것이 아니고,
일정하게 정해진 과정을 통해서 압니다.
이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기준을 바르게 알아야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아야 비로소 궁극의 진리인 무아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마음은 반드시 대상을 갖습니다.
그래서 대상이 없으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인식과정은 모두 하나의 같은 대상을 가지고 일어납니다.
눈이 물질을 보고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도 대상이 없으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또 마음이 없으면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모두 똑 같습니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없으면 아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원인과 결과입니다.
이렇게 일어난 마음은 일어나는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찰나생, 찰나멸이라고 합니다.
이때 일어난 마음도 새로운 마음이고, 대상도 역시 새로운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마음도 변하고, 변한 마음이 새로 인식하기 때문에
대상도 같은 것이 아니고 새로운 대상입니다.
그래서 조금 전의 마음과 현재의 마음이 같은 마음이 아니고,
현재의 마음이 조금 지난 뒤에 마음과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매 순간 변하는 새로운 마음밖에 없습니다.
둘째, 물질도 마음처럼 변합니다.
그러나 물질과 마음은 변하는 속도가 다릅니다.
물질이 한순간에 머물 때 마음은 16번 일어나서 머물고 소멸합니다.
이처럼 물질에도 수명이 있습니다.
어떤 물질이나 변하는데 일어남과 머물음과 소멸의 세 가지 단계를 거칩니다.
이때 마음도 일어남과 머물음과 소멸의 똑같은 과정을 거치는데,
마음이 물질보다 16배가 빠릅니다.
셋째, 마음은 하나의 물질이 머물 때 16번 머무는데
물질이 일어나는 순간에 지나간 잠재의식이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전체를 포함하면 사실 17번 일어납니다.
물질이 일어나는 순간에 감각기능들이 대상을 인식하기에 너무 미세하므로
이 순간에 잠재의식 하나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래서 지나간 잠재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16배 빠른 것에 지나간 잠재의식 하나를 넣어서 17번이라고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은 한 찰나 간에 꾸테떼떼인이 일어납니다.
빨리어 꾸테떼떼인은 천만 곱하기 십만이라는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한 찰나 간에 천만 곱하기 십만이라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사실 그 숫자는 상상을 하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래서 선한 행동을 하면 그 숫자만큼 선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선하지 못한 행동을 하면 한 찰나 간에
그 숫자만큼 선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전류가 흐를 때 하나의 전류가 흐르는 것이 아니고,
최소의 미립자들이 진동하면 전류가 흐릅니다.
이때 한순간의 진동의 숫자를 모두 헤아리기란 어려운 것이겠지만,
마음은 전류가 흐르는 진동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진동하면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마음은 빛이 번쩍하는 순간에도 수백만 가지의 생각이 일어나므로,
한 찰나에 16번 일어나는 것은 사실 매우 짧은 순간입니다.
이처럼 마음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순간적 정신 상태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이때 조건에 의해 빠르게 일어나서 사라져버리는 마음에
나라고 하는 자아는 없으며, 내가 소유하는 그런 마음도 없습니다.
단지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흐르는 마음만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입니다.
넷째, 물질이 한순간에 머무는 것에 비해 마음은 17번 일어나서
머물다 사라지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17번의 과정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진행됩니다.
이것을 빨리어로 찌따 니야마(citta niyama)라고 하는데 ‘마음의 결정’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마음이 아무렇게나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정해진 법칙에 의해 항상 일정하게 진행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분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혜안이 없으면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단지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혜안을 얻어 마음을 바로 보니 이러한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얻은 인류사상 최고의 지혜인 무아를 아신 것입니다.
사실 이 무아는 역대의 모든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진리입니다.
그래서 무아가 없으면 해탈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누구도 마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무지 속에서 헤매야 했습니다.
마음이 항상 하는 줄 알아서 초월적 존재를 상상하게 되었고,
그것이 나의 마음이라고 알아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노예로 산 것입니다.
항상 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고 영원한 줄 알아서 진아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항상 하지 않고 매 순간 변하는 마음이라고 알면
무아를 알아서 집착을 여의고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은 수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심찰나라고 합니다.
이 마음은 워낙 빠르기 때문에 감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이 한순간에 머무는 것이 빛이 한순간에 머무는 것의 백만분의 일보다 짧다고 합니다.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자면 마음의 속도는 빛보다
백만분의 일보다 빠르게 일어나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에도
다시 한 순간에 17번의 일정한 과정을 거치면서 대상을 인식합니다.
그러면 물질이 한순간에 일어나고 사라질 때,
마음은 어떻게 17번 진행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은 마음이 대상을 인식하는 기본적 단면을 보는 것입니다.
먼저 잠재의식이 흐르고 있는 상태에서 시작이 됩니다.
1번, 지나간 잠재의식이 일어납니다.
2번, 잠재의식이 동요합니다.
3번, 잠재의식이 끊어집니다.
4번, 오문전향이 일어납니다.
5번, 오식이 일어납니다.
6번, 받아들입니다.
7번, 조사합니다.
8번, 결정합니다.
9번에서 부터 15번까지 속행이 일어납니다.
16번, 등록을 합니다.
17번, 등록을 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과정을 거친 뒤에 다시 잠재의식으로 되돌아가서 흐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한순간에 대상을 아는 인식과정은 이렇게 17번인데,
아직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이 아닌 잠재의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잠재의식을 빨리어로 바왕가 찌따라고 합니다.
이 말은 생명의 요소라고도 하고 잠재의식이라고도 합니다.
잠재의식은 마음이 어떤 대상을 갖지 않고 있을 때 흐르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표층에 드러나지 않는 마음으로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면서 흐르게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잠자고 있을 때는 마음이 잠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때의 마음이 잠재의식입니다.
잠재의식도 대상이 있어서 일어납니다.
잠재의식은 흔히 말하는 무의식과는 다릅니다.
잠재의식은 다른 마음과 똑같이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흐릅니다.
이러한 잠재의식은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잠재의식의 상태에서 오문전향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잠재의식이 이렇게 흐르다가 대상을 향해서 일어날 때
1번, 지나간 잠재의식이 있습니다.
마음이 워낙 빠르게 흐르고 미세해서 처음에 일어난 잠재의식은 알기가 어려워
1번은 지나간 잠재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번부터 잠재의식이 대상을 향해서 움직입니다.
이것이 잠재의식의 동요입니다.
3번에서 잠재의식이 동요했으면 다음에 끊어집니다.
4번에서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으로 전향합니다.
이것을 오문전향입니다.
이때 안, 이, 비, 설, 신이라는 오문이 밖으로 향하기 때문에 전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5번에서 다섯 가지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오식입니다.
그런 뒤에 6번에서 대상을 받아들이고 7번에서 조사를 합니다.
조사한다는 것은 일단 받아들인 대상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8번에서 결정을 합니다.
결정은 대상을 살펴본 뒤에 무엇이라고 확정을 하는 것입니다.
9번부터 15번까지는 속행으로 7번의 빠른 속행이 일어납니다.
속행은 마음이 빠르게 진행하는 것으로, 8번에서 대상이 결정되면
빠르게 일어나는 일곱 번의 인식과정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속행입니다.
그런 뒤에 16번과 17번에 등록을 합니다.
등록은 아는 마음이 대상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앞서 일어난 속행이 갖고 있는 마음을 다시 아는 마음이 받아들여서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등록이라는 것은 무엇이라고 아는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때 하나만 아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두 번이나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때의 등록은 쉬는 마음이며 가라앉히는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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