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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83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0:49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같은 뜻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 동지가 아닙니다.

같은 뜻을 가졌다고 해도 바르지 못하면 동지가 아닌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뜻을 같이 한다면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뜻이 같아도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동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같은 종교, 같은 지역, 같은 성씨, 같은 동문이라고 해서 모두 동지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관념일 뿐이지 바른 정신으로 모인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무리를 만들고 여기에 안주합니다.

 

이것으로 세속의 이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고귀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진정한 동지입니다.

여기에는 나의 이익과 함께 상대의 이익을 배려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동지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해서 업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셋째, 네 가지 업 중에서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이 있습니다.

두 번째가 성숙하는 순서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이고

세 번째가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입니다.

 

재생 연결식이 발생하도록 과보를 만드는 시간에 따라서 일어나는

네 가지의 업이 있습니다.

 

하나, 현생에 받는 업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현생에 받는 업입니다.

만약 현생에 받아야 할 업이 조건이 성숙되지 않으면 이 업은 사라집니다.

 

둘, 다음 생에 받아야 할 업입니다.

업의 과보를 현생이 아닌 다음 생에서 받는 업입니다.

만약 다음 생에 받아야 할 업의 조건이 성숙되어서 나타나지 않으면 이 업은 사라집니다.

 

셋, 연속적으로 받는 업입니다.

업의 과보를 받는 시기가 연속적으로 계속해서 받는 업입니다.

현생과 다음 생이 지나가서 과보가 나타나는 업입니다.

 

넷, 잠재적 힘을 갖고 있지 않은 업입니다.

더 이상 과보가 나타날 만한 잠재적인 힘을 갖고 있지 않은 업입니다.

더 큰 힘에 의해서 방해를 받는 업으로 효력이 상실한 업을 말합니다.

 

힘을 상실한 업이기 때문에 현생이나 다음 생이나 계속해서 나타나는 업과 달리

시간을 넘긴 것입니다. 이때 힘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업의 과보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라한은 죽음의 마음에서 과거에 지은 모든 업의 힘이 소멸하여 사라집니다.

그래서 태어남이 없습니다.

 

주석서에서는 업의 과보가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 중에 업은 네 가지가 있다.

현생에서 받는 업, 다음 생에 받는 업,

연속적으로 받는 업, 잠재적인 힘을 갖고 있지 않은 업이다.

 

이중에 첫 번째, 금생에서 받는 업은 하나의 속행의 과정에서 속행의 마음 7가지 중에

선하거나 선하지 못하거나 그 첫 번째 속행의 의도가 현생에서 받는 업이다.

그것은 현생의 몸에 과보를 준다.

 

첫 번째, 잠재적 힘을 갖고 있지 않은 업은,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업은 있지만

업의 과보는 없었고, 업의 과보는 없을 것이고, 업의 과보는 없다는

세 개조의 방법에 따라 잠재적 힘을 갖고 있지 않은 업이라고 한다.

 

두 번째, 다음 생에 받아야 할 업은

행위를 성취한 7번째 속행의 의도가 다음 생에 받는 업이다.

 

세 번째, 연속적으로 받는 업은 속행의 첫 번째와 마지막 일곱 번째 사이에 있는

다섯 개의 속행의 의도가 연속적으로 받는 업이다.

그것은 미래의 기회를 얻을 때 과보를 준다.

윤회가 계속되는 한 이것은 끝나버린 업이 되지 않는다.‘

 

이상의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 네 가지는

앞서 공부한 17개 인식의 과정 중에서 모두 7개의 속행에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업이 시간을 넘기면 소멸하는 이러한 과정은 수행과도 연관됩니다.

현재의 행위가 선한 의도를 가졌을 때는 선한 과보가 나타납니다.

그러면 이 때 나타날 수 있는 불선 과보가 힘을 잃어버립니다.

 

수행을 해서 계속해서 선한 의도를 내면 계속해서 선한 행위를 하게 되고

계속해서 선한 과보가 나타나기 때문에 불선 과보가 나타날 기회를 차츰 잃게 됩니다.

 

물론 이런 와중에도 나타날만한 무거운 불선 과보가 나타나지만,

대체로 수행을 해서 선한 의도를 내면 선한 과보의 힘이 커져서

불선한 과보가 힘을 쓰지 못하도록 합니다.

 

마찬가지로 불선한 의도를 내면 불선한 행을 해서 불선한 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면 이때 선한 과보가 힘을 잃습니다.

 

선한 의도에 의한 업이나 불선한 의도에 의한 업이나

모두 저마다 가속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체적인 힘을 가지고 속력을 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 선한 의도에 의한 선한 행을 해서 선한 과보가 나타납니다.

이때의 이익은 선한 과보가 나타나서 이익이며,

이 순간에 불선한 과보가 나타나지 않아서 또 이익을 얻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이때 불선 과보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역시 불선 과보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오랫동안 살면서 행해 온 선하지 못한 행으로 인해서 받는 과보로부터

한 번에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만약 한 번에 벗어났다면 그 수행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사람으로

마지막으로 조건이 성숙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인내하면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원히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 발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면 언젠가는 궁극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넷째, 네 가지 업 중에서 성숙하는 장소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네 가지 업 중에서 두 번째가 성숙하는 순서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이고,

세 번째가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이고,

이번 바로 네 번째가 성숙하는 장소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입니다.

 

마지막으로 업이 성숙하는 장소에 따라서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소는 위치, 요점, 이유, 원인 등등의 뜻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 선하지 않은 업입니다.

선하지 않은 업은 착하지 않은 업을 말합니다. 그래서 불 선업입니다.

선하지 않은 업은 열 가지입니다.

 

몸으로 짓는 업 세 가지와 말로 짓는 업 네 가지와

마음으로 짓는 업, 세 가지를 합쳐서 모두 열 가지입니다.

이상 열 가지를 ‘선하지 않은 업의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상 열 가지의 반대가 되는 것은 ‘선한 업의 길’입니다.

 

몸으로 짓는 업 세 가지는 살생, 도둑질, 음행입니다.

말로 짓는 업 네 가지는 거짓말, 중상모략, 욕설, 잡담입니다.

마음으로 짓는 업 세 가지는 탐욕, 성냄, 사견입니다.

 

여기서 사견은 잘못된 견해로, 허무주의적 견해와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견해와

원인을 부정하는 견해, 세 가지입니다.

 

둘, 욕계의 선한 업입니다.

욕계의 선한 업은 몸으로 짓는 업 세 가지와 말로 짓는 업 네 가지와

마음으로 짓는 업 세 가지입니다.

불선업 열 가지의 반대가 되는 선한 업, 열 가지가 욕계의 선한 업입니다.

 

셋, 색계의 선한 업입니다.

색계 선한 업은 색계 5선정의 세계입니다.

색계 초선정을 닦으면 색계 초선정의 세계에 태어나고

나머지도 5선정까지 선정을 닦으면 각각의 선정의 세계에 태어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하면

색계 5선정의 정거천에 태어나서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합니다.

왜냐하면 아나함은 욕계의 감각적 욕망이 모두 제거되었기 때문에

색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넷, 무색계의 선업입니다. 무색계도 4선정이 있습니다.

선정 수행을 해서 무색계 4선정을 얻으면 각각에 맞는 무색계 선정의 세계에 태어납니다.

무색계의 마음도 색계의 마음처럼 과보의 마음을 일으켜,

무색계에 태어나는 재생 연결을 하고 잠재의식과 죽음의 마음을 갖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 따라서 결정된 고귀한 덕은 재생 연결과 삶의 과정에서

그와 비슷한 과보를 발생시킵니다.

여기서 이것이 네 가지의 업입니다.

이상으로 여러 가지의 업을 모두 설명하였습니다.

 

이상의 업으로 인해 인식할 수 없는 마음인 재생 연결식과 잠재의식과

죽음의 마음이 무엇이며, 여기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인식할 수 없는 마음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네 가지의 세계와 네 가지의 재생 연결식과 네 가지의 업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제 마지막으로 네 가지의 죽음이 있습니다.

죽음의 네 가지 원인과 죽음과 태어남인 재생 연결식의 업이 일어나는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죽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죽고, 그리고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죽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죽음이 의미하는 진정한 내용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인식할 수 없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혜안으로 본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죽음이나 오온의 기능이 모두 정지됩니다.

사실은 마음이 찰나 생, 찰나 멸하기 때문에 매 순간에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한 일생을 기점으로 태어나고 죽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죽음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각각의 원인이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을 등잔불에 비유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등잔불의 심지가 다 타서 불이 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직 기름은 남아있지만 심지가 다 탄 것은 생명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의 에너지가 끝난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 의도가 없으면 이미 죽음을 향해서 간 것입니다.

불행한 상태에서 이러한 경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둘째, 등잔에 있는 기름이 다 타서 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업이 다 하여 죽는 경우입니다.

심지는 있지만 기름이 없으면 등잔불이 탈 수가 없습니다.

 

업이 다 했다는 것은 늙어서 수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생명들이 태어나는 곳에 따라서 일정한 수명이 있는데

이것이 모두 업에 의해서 결정되는 수명입니다.

 

천상에는 천상의 수명이 있어서 그 곳의 수명대로 삽니다.

그러나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은 업대로 살다가 죽습니다.

살생을 많이 했으면 단명한 것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셋째, 등잔불의 심지와 기름이 다 타서 불이 꺼지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살고자 하는 생명력과 업이 모두 소멸하여 죽는 경우입니다.

업의 에너지의 소멸과 수명이 다 하여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죽음입니다.

 

넷째, 등잔불의 심지와 기름이 모두 소진되지 않았지만

바람이 불어서 불이 꺼지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업의 에너지와 수명이 아직 남아있지만 과거 생이나 현생의 업 중에서

하나가 들어와서 생명을 파괴하여 죽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뜻하지 않은 재앙으로 인해

갑자기 목숨을 잃는 것을 말합니다.

 

이상의 네 가지 죽음 중에서 앞선 세 가지 경우는 자기 수명대로 살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시기에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네 번째 죽음은 자기 수명대로 살지 못하고

적당한 시기가 아닌 상태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은 네 가지 유형을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이 안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죽습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는 각자의 업의 조건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천상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만 사악도와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업의 영향을 받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은

평소에 자기가 한 행위대로 죽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유념하셔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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