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삶의 질을 바꾼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이는 선하지 못한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며,
오랜 습관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바뀌길 원한다면,
먼저 바꾸려는 마음이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무엇을 바꾸려는 탐욕을 가지고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바꾸려 해서 바뀌지 않으면 화를 내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알아차려야할 대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닌, 자신의 몸과 마음이어야 합니다.
몸만 알아차리는 것으로는 절반의 성공밖에 이룰 수 없으므로
반드시 대상을 주시하고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만
완전한 성공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자는 몸과 마음을 함께 알아차려서
궁극의 진리를 얻도록 하셔야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와 같이 죽음의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면 즉시 다음생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이때 죽음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태어나는 곳의 재생연결식이 다릅니다.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곳은 네 곳입니다.
욕계 악처의 재생연결식, 욕계 선처의 재생연결식,
색계의 재생연결식, 무색계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욕계 악처는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가 되는 재생연결식입니다.
욕계 선처의 재생연결식은 인간과 여섯 곳의 욕계 천상에 태어나는 재생연결식입니다.
재생연결식은 현생에 처음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일생에 한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재생연결식이 일어난 뒤에
즉시 잠재의식으로 바뀌어서 한 일생의 마음이 계속합니다.
이렇게 일어난 재생연결식은 즉시 몸을 만듭니다.
몸이 불교에서는 물질이라고 하는데, 물질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네 가지 조건이 결합되어야 합니다.
이때 재생연결식이 생긴 뒤에 물질이 만들어질 때
이 물질의 조건은 업, 마음, 온도, 자양분입니다.
이 네 가지 조건이 성숙되어서 재생연결식 뒤에 비로소 재생연결식에 따른
몸이 만들어집니다.
이때의 업이란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과거에 행한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이때 마음은 정신적 특성들입니다.
재생연결식이 오온의 식이고 여기서 말하는 정신적 특성은 수, 상, 행을 말합니다.
그리고 온도는 생명이 태어날 수 있는 열의 요소를 말합니다.
그리고 자양분은 물질이 만들어지는 요소를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재생의 정신과 물질이 형성됩니다.
이때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재생입니다.
과거의 생명과 다른 것이 재생이고, 같은 것이 환생입니다.
환생은 항상 하여 영원하고 자아가 있다는 힌두교의 교리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상하며, 괴로움이 있고, 무아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 없이는 누구도 해탈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윤회를 끝내는 해탈은 부처님의 가르침 밖에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밝히신 무상, 고, 무아는 원래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일반적 속성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진리를 찾아내신 것이지,
무엇이나 새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이상의 네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정신과 물질이 만들어지는데,
이때 태어나는 곳과 함께 남자나 여자의 성별이 만들어집니다.
사람으로 태어날 때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태어나는데 이때 업이 개입됩니다.
그래서 남여의 성별, 미추, 수명, 성격 등등의 기능적 요소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현생의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고
이렇게 철저한 원인과 결과의 조건하에서 성립된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우리가 사는 이 삶이 무엇하나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삶에는 장난이 없습니다. 모두 현실입니다.
그리고 실재하는 것은 모두 진실입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업의 작용 하에 있습니다.
임종 순간에 죽음의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마음의 특성입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사라져야 다음 마음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일어나서 사라지지 않으면 다음 마음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항상 같은 마음이라서 변하지 않는 마음이 되어서 영원한 마음이 됩니다.
그러면 죽지 않을 수 있으며, 무엇이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월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일어나서 사라지지 않은 마음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죽는 순간의 마음은 끊어지지 않고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계속 흐릅니다.
시간이 끊어지지 않고 흐르듯이 마음도 똑 같이 흐릅니다.
여기서 흐른다는 표현은 같은 것이 아니고,
흐를 때마다 새롭게 일어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흐르는 마음은 공간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죽음의 마음 뒤에 오는 재생연결식은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공중의 전파와도 같습니다.
인공위성에 의해 세계가 한 시간대에 같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죽음의 마음 뒤에 오는 재생연결식은 천상의 어디에도 즉시 전해집니다.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때에도 지구의 어느 장소이건 한순간에 전해집니다.
이때 마음이 전해지면서 중간단계의 기착지가 있지 않습니다.
시간이 잠지 멈추지 않듯이, 빛이 잠시 쉬었다가 가지 않듯이
즉시 전해집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죽은 사람의 마음이 재탄생할 때
알맞은 장소를 고르기 위해서 어딘가에 머문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존자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물었습니다.
“나가세나 존자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기서 죽어서 브라만 세계에 다시 태어나고,
또 한사람이 여기서 죽어서 케시미르 지방에 다시 태어날 때,
그들 중에 누가 먼저 도착합니까?”
“오, 왕이시여, 그들은 동시에 도착합니다.
오, 왕이시여, 왕께서는 어느 지방에서 태어나셨습니까?”
“존자시여, 칼라시라 불리는 마을입니다.”
“칼라시는 여기서 얼마나 먼 거리에 있습니까?”
“존자시여, 여기서 약 200마일이 됩니다.”
“왕이시여, 그러면 케시미르는 여기서 얼마나 멀리 있습니까?”
“존자시여, 약 12마일이 됩니다.”
“그러면 왕이시여, 이제 왕께서는 지금 칼라시 지방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 존자시여, 지금 생각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다시 케시미르를 생각해 보십시오.”
“존자시여, 지금 생각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그러면 이 둘 중에 어느 것을 더 빨리,
그리고 어느 것을 더 늦게 생각했습니까?”
“모두 똑 같습니다.”
“왕이시여,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죽어서 브라만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는 자는,
여기서 죽어서 케시미르에 태어나는 사람보다 느리지 않습니다.”
“나가세나 존자시여, 비유를 한 번 더 들어주십시오.”
“오, 왕이시여, 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마리의 새가 하늘을 향해 날다가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은 나무에 동시에 내려앉는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때 어느 새의 그림자가 땅에 먼저 드리우고, 어느 새의 그림자가 그 다음이 되겠습니까?”
“두 그림자가 동시에 나타나서 그들 중에 어느 하나가 이르거나 나중이 없습니다.”
이처럼 마음은 공간에 걸림이 없으며
잠시도 멈춤이 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흐릅니다.
수행자 여러분!
생명이 사는 세계는 31개이며, 어디서고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죽고 태어납니다.
인간이 인간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도 수많은 생명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지구도 인간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들이 윤회하면서 나고 죽는 곳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큰 틀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상 말씀드린 죽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과 잠재의식은
나고 죽는 과정에서 인식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인식할 수 없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인 물질을 통해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추론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근거한 바탕위에서 생긴 추론이라서 실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죽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이 연결되는 것이 태어남이고,
이 태어남은 반드시 원인과 결과라는 과보에 의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지혜가 바로 무아입니다.
모든 것이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며, 이것을 결정하는 자아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없기 때문에 더 나아가서 이것을 관장하는
초월적 존재도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초월적 존재의 유무는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아닙니다.
불교는 오직 자신의 번뇌를 해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으로 보아서 초월적 존재의 유무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일 뿐입니다.
또 이상의 사실에서 볼 때 마음이 행위를 하고, 행위가 업을 만들고,
업이 과보가 되어 다음에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지난 업의 결과는 받아야 하지만,
그 결과에만 종속되는 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만들어진 업의 지배를 받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만이 업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거부라는 것은 있는 업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새로운 업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새로운 선한 업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토록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우연히 되지 않고,
업자성 정견으로 모두 자기가 한 행위의 과보를 받아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하겠습니다.
여기에 어떤 절대적 힘이 작용하지 않고,
모든 것들이 원인과 결과로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가 한 걸음 바른 지혜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무엇이 윤회를 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무엇이 윤회를 하는가요?
자아가 합니까?
누구의 힘에 의해서 합니까?
우리는 아침에 동쪽에서 해가 떠서 저녁이면 서쪽으로 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도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해는 매일 같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압니다.
이것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달이 뜨고 지는 것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뜨고 지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이 같은 현상이 반복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단지 고정관념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매일 뜨는 해는 같은 해가 아닙니다.
매일 뜨는 해가 같지 않다는 것은 달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상을 바로 보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생각으로 그냥 같은 것으로 압니다.
하루가 지나면 시간이 흐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마음도 흐릅니다.
시간도 같은 시간이 아니고, 그것을 보는 마음도 같은 마음이 아니고,
그리고 대상도 같은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 무엇도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몸을 알아차리면 같다고 알 수도 있겠지만
몸에 있는 느낌을 보면 하나같이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이때의 몸은 관념입니다.
관념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에 있는 실재하는 느낌은 변합니다.
살아있건 살아있지 않건 모든 것들은 진동합니다.
진동한다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무상(無常)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들은 생성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러한 과정들은 일정한 원인에 의해 결과를 만드는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누구도 개입할 수 없으며 어떤 인격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단지 조건에 의한 흐름만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원인과 결과로 지속되는 것들이 그 자체의 힘으로 흐르는지
아니면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조정당하고 있는지
이것을 알아야 무엇이 윤회를 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무엇도 개입하지 않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합니다.
그래야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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