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교육은 가르쳐서 육성하는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잘못된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교육을 한다고 자기 성질을 부리면 오히려 잘못된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가르치는 자가 욕심을 부리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교육은 자애로운 마음으로 해야 하며,
자기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객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바른 교육은 대안을 제시하여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입니다.
교육이 지식을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혜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을 지도하는 사람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교육을 하기에 앞서 스스로에 대한 교육이 앞서야 합니다.
그리고 남에게 하는 교육은 일방통행식의 교육이 아니고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는데 어떤 것이든 선택하라는 선택권을 주는 것이 바른 교육입니다.
그러한 선택권을 줄 때 자신이 선택한 것에 따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질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죽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부처님 시대에 인간의 수명은 100살입니다.
그러나 꼭 100살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업의 과보에 따라 약간 더 살 수도 있고 일찍 죽을 수도 있습니다.
역대의 부처님의 수명은 모두 다릅니다.
그러나 역대 부처님들은 그 시대의 수명의 3분의 2를 사시다가 반열반에 드십니다.
그래서 고따마 부처님께서도 80세에 열반을 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등잔불은 몸과 마음의 생명력입니다.
내가 더 살고 싶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살고 싶지 않은데도 지은 업 때문에 더 살아야 합니다.
더 살 수 있는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고 죽는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을 무아라고 합니다.
마음은 있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조건만 있습니다.
다음은 죽기 전에 나타나는 표상과 다음에
죽은 마음과 재생연결식의 흐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죽기 전에 살아있을 때는 잠재의식이 흐릅니다.
이 잠재의식은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의식입니다.
이때 죽음을 목전에 두고 흐르는 잠재의식의 상태에서 속행이 진행될 때
6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통해서 다음 생을 결정하는 표상이 일어납니다.
속행은 한 순간의 마음이 17번 일어나고 사라질 때 생기는 7가지 마음 중에서
나타나는 속행 5개를 의미합니다.
잠재의식에서 나타난 이 표상의 영향을 받은 채로 죽음의 마음이 일어나고
계속 표상의 마음이 다음 마음에 전해져서 재생연결식이 생깁니다.
물론 죽기 전의 잠재의식과 잠재의식에서 나타난 속행의 마음과
그리고 죽음의 마음과 그 뒤에 오는 재생연결식은 모두 다른 마음입니다.
하지만 잠재의식에서 생긴 표상은 다음 마음에 그대로 전해져서 상속됩니다.
이때의 상속을 과보라고 합니다.
이 과보가 바로 원인과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전생과 다음 생이 전혀 엉뚱하게 일어나지 않고
일정한 흐름 안에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전생과 현생이 같다고도 할 수 없고 전혀 다르다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과보가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잠재의식이 흐르다가 죽음에 직면하면
현생의 마지막 마음인 죽음의 마음이 일어났다가 즉시 사라집니다.
늘 그래오던 것처럼 이때도 순간적으로 일어나서 순간적으로 소멸합니다.
죽음의 마음은 일생에 한번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생에 한번만 죽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마음이 일어나기 직전에 어떤 하나의 업이 6가지 감각기관의 문에 나타납니다.
이때 나타나는 것이 3가지가 있습니다.
업과 업의 표상과 태어날 곳의 표상입니다.
이때 나타나는 표상이 다음 생을 결정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때 무엇을 보느냐가 바로 다음 생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래서 죽음 직전에 나타나는 표상 3가지를 살펴보시겠습니다.
첫째,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을 결정한 업이 보입니다.
이때의 업이란 자기가 일생동안 살아오면서 있었던 일이나
죽기 직전에 자신이 한 행위 중에 하나를 보는 것입니다.
가령 선하게 산 사람은 선하게 살아온 모습이 보일 것이고
선하지 못하게 산 사람은 선하지 못한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살면서 5가지의 무거운 업을 지은 사람은 이 업의 힘이 강해서
이 업이 다른 행위들을 가려버리고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가 의식 속에 강하게 저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5가지 무거운 업을 지은 사람은 그 사실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잠재의식 속에 깊게 저장되어 있다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것이 무거움이기 때문에 무거움으로 나타나서 다른 업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만약 일생을 통해서 선하거나 선하지 못한 강력한 업을 만들지 못했다면
거의는 죽음 직전에 행한 업이 떠오릅니다.
이것이 죽음에 근접한 업입니다.
죽음에 근접한 업이 없으면 습관적인 업이 나타납니다.
수행자는 수행한 모습이 나타나서 그대로 과보를 받아 다음 생에 더 훌륭한 수행자가 될 것이며,
도둑질을 한 사람은 도둑질을 한 모습이 나타나 그대로 과보를 받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을 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업이 나타납니다.
이때 다른 주석서에서는 3번째 습관적인 업이 2번째 업보다 앞서서 작용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재생연결식을 결정하는 업이 보인다는 것은 자기가 일생동안 살아온
행위 중에 하나의 모습이 보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중요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왜 선하게 살고 왜 선하게 살지 못한 것을 행해서는 안 되는가 하면
바로 이러한 결정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괴로운데 다음 생까지 괴로움을 가지고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습관적으로 살기 때문에 지금도 괴롭고
다음 생도 괴로운 일을 계속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살아오면서 업을 지을 때 형상이나 그 업을 지을 때 사용한 기구 등 업의 표상이 나타납니다.
업의 표상은 상징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어떤 광경이 나타나거나 소리, 냄새, 맛, 닿음, 생각이 나타나
이것들이 그대로 다음 생에 재생연결식으로 전해집니다.
가령 선한 일을 할 때의 형상이나 선한 일을 할 때 사용했던 기구들이 상징적으로 나타납니다.
살아서 베푼 사람은 베푸는 형상이나 이때 사용한 특징적인 기구들이 표상으로 나타납니다.
살아서 살생을 많이 한 사람은 칼이 보이거나 이와 유사한 표상이 나타납니다.
의사의 경우는 환자의 모습이 보이거나 흰 가운이나 수술용 칼이 보일 것입니다.
이때 살생을 한 사람에게 보이는 칼이나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사용한 칼은 서로가 다른 과보를 받습니다.
만약 낚시 바늘이 보인다고 했을 때는 고기를 많이 잡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살생의 과보를 받아서 그 세계에 태어납니다.
무엇이나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한 상징적 표상이 나타나면
그 힘이 강력하게 다음 생으로 전해져서 바로 똑같은 과보가 다시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두 번째 역시도 우리가 죽을 때 나타나는 표상을 익히 알아야하겠습니다.
이미 어떤 표상이 나타났을 때는 이것을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이미 이 상태에서 마음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흐름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셋째, 죽은 뒤에 즉시 다음 생으로 연결되는 태어날 곳의 표상이 보입니다.
선정수행을 한 사람은 화려한 궁전이 보일 것이고
지옥에 갈 사람은 고통스러운 불이 보일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죽을 때 얼굴에 표정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죽음과 동시에 다시 태어날 곳의 표상은 물이나 숲, 산, 그리고 어머니의 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죽기 전에 자기가 갈 곳이 아름다우면 미소 지으면서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 곳이 사악도이면 미소 지으면서 죽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워서 찡그린 얼굴로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해서 알아차리는 힘을 키우면
이런 경우에도 나쁜 표상이 올 것이 좋은 표상으로 바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나 이상과 같은 3가지 중에 하나를 표상으로 보고
그 표상의 힘이 죽음의 마음에 그대로 전해져서 다음 생을 결정하는 재생연결식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미 죽음의 마음 직전에 다음 생이 결정되고 빠르게 그곳에서 태어납니다.
이때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마음을 재생하지만
원인과 결과라는 과보로 인해서 누구도 이 과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3가지 경우입니다.
일생동안 자기가 해온 자기의 업, 행위가 보이고
두 번째는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한 상징적인 것들이 보이고,
세 번째는 자기가 한 업에 의해서 갈 곳의 세계가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도 여기서 이 흐름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업의 작용 때문에 선업은 선업의 과보가 가속도가 붙습니다.
그리고 선하지 못한 업은 선하지 못한 업의 가속도가 붙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여러 생 동안 같은 지위를 얻거나 같은 부자로 태어나기도 하고
또 여러 생을 비천하게 살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은 모두 하는 일에 대한 표상이 떠올라서 그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라한의 경우는 자기가 500생을 원숭이로 살았던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의 왕비는 3생을 거듭 왕비로 태어난 것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의 동일한 지위와 삶을 사는 경우가 허다한 경우는
바로 선한 행위와 선하지 못한 행위가 그대로 상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번 선하지 못한 흐름에 들면 다시 선한 흐름으로 오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수행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하면 새로운 선업의 과보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과보의 힘이 다음 생을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는 이러한 일반적 흐름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 때문에,
살아온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새로운 선한 표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설령 과거에 잘못한 일로 인해 괴로움 속에서 살더라도
수행을 통하여 새로운 업을 행하여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면 됩니다.
이렇게 잠재의식의 속행에서 나타난 표상이 죽음의 마음에 전해지고
다시 재생연결식이 생기는 과정에서 죽음의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흐름의 힘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마음도 하나의 과정일 뿐이며, 마지막 마음도 일어난 표상을 받아들여서 전하고
사라지는 기능 밖에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흐름을 주도하는 어떤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오직 조건에 의한 흐름만 있습니다.
마음이 흐르는 속도는 언제나 일정합니다.
마음이 한 순간에 머무는 것은 빛이 머무는 순간의 백만분의 일보다 적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마음이 재생연결식으로 바뀌는 과정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러나 티베트의 경전에서 존재가 죽음 뒤에 49일 동안 존속하는 중간단계가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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