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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82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0:46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자신과 무관한 일에 대해서도 관대해야 되겠지만,

자신의 이익과 직결된 일에 대해서도 똑같이 관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관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관용이 있는 자리에는 탐욕이 없고,

탐욕이 있는 자리에는 관용이 없습니다.

관용은 선한 마음이고 탐욕은 선하지 못한 마음입니다.

 

받아들이는 마음에는 반드시 베푸는 마음이 따릅니다.

받아들여서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므로 자연스럽게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관용은 선한 덕목의 으뜸입니다.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원인과 결과를 알아

모든 것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지혜가 생겨 모든 일에 걸림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인식할 수 없는 마음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셋째, 4가지의 업입니다.

업은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업이라는 말의 정확한 뜻은 ‘의도를 가진 행위’입니다.

이때의 의도는 갈애를 말합니다.

그래서 갈애를 가지고 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한 행위가 바로 업입니다.

그러므로 의도가 없는 행위는 업이 아니기 때문에 과보를 받지 않습니다.

 

아라한과 부처님은 모든 번뇌가 완전하게 불타버렸기 때문에 업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성자들은 행위는 하지만 의도를 가지고 하지 않기 때문에 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때는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아라한이나 부처님은 받을 과보가 없기 때문에 윤회에서 끝나고

다시 재생을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이라고 해서 모든 업이 면죄되지는 않습니다.

성자들도 이미 과거에 지은 업은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성자들은 이미 모든 번뇌가 끝났기 때문에

아무리 고통을 겪어도 새로운 업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범부는 업의 과보를 받고 계속해서 새로운 업을 일으키고

성자는 지은 업을 받되 새로운 업을 일으키지 않는 차이가 있습니다.

 

업은 선업과 불선업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익한 업과 해로운 업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항상 선하거나 선하지 못한 마음을 갖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이러한 업은 다시 선과보와 불선과보를 일으킵니다.

 

마음이 원인이라면 행위는 결과입니다.

다시 어떤 행위인가라는 원인에 따라서 그에 따른 과보의 결과가 있습니다.

이것이 업의 법칙입니다.

 

불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업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지혜가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업을 잘못 이해하면 지나치게 업에 의존하여

모든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숙명론자나 운명론자가 될 위험도 있습니다.

 

업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업의 종류를 살펴보겠습니다.

업은 4가지가 있는데

첫째, 기능에 따라 일어나는 업이 있습니다.

둘째, 과보가 발생하는 순서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이 있습니다.

셋째,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이 있습니다.

넷째, 과보가 발생하는 장소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4가지 업 중에서 기능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이 있습니다.

기능이란 역할을 뜻하며, 업이 행해지는 작용을 말합니다.

기능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은 다시 4가지의 업이 있습니다.

어떤 업이 일어나거나 다음 4가지의 기능 가운데서 하나 내지는 여러 가지 기능을 합니다.

 

하나, 발생하는 업입니다.

발생하는 업은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인 과보를 낳는 업을 말합니다.

죽은 뒤에 재생을 연결하는 순간에 과보를 낳는 업이 바로 발생하는 업입니다.

 

이때뿐만 아니고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과보의 마음이나 업에서 생긴 물질을 생산하는 업도 발생하는 업입니다.

그래서 모든 선하거나 선하지 못한 의도를 발생하는 업이라고 합니다.

이 업의 과보로 새로운 몸이 만들어집니다.

 

둘, 돕는 업입니다.

마음이 과보를 발생시키지 못할 때는 다른 업이 발생하도록 돕는 업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날 때 인간으로 태어나도록 다른 업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수명을 연장하여 돕는 역할을 합니다.

축생으로 태어날 때도 축생으로 태어나도록 다른 업이 끼어들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수명을 연장하여 돕는 역할을 하는 업입니다.

 

셋째, 방해하는 업입니다.

마음이 과보를 발생시키지 못할 때 다른 업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억압하고 방해하는 업입니다.

그래서 괴롭거나 즐거운 과보에 대항하여 기간을 단축하는 업입니다.

돕는 업이 기간을 연장한다면 방해하는 업은 기간을 단축합니다.

 

그래서 선업이 더 높은 세계로 재생하도록 하는데

방해하는 업이 끼어들어서 단축시키면 더 낮은 세계에 태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축생을 태어나게 하는 업이 작용할 때 방해하는 업이 끼어들어서 단축시키면

축생보다 더 높은 세계에 태어나는 역할을 하는 업입니다.

 

넷, 해치는 업입니다.

약한 업을 눌러서 없애버리는 역할을 하는 업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업이 성숙되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날 때 발생한 업에 따라 오래 살다가

해치는 업이 일어나 갑자기 죽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업입니다.

 

죽을 때 나쁜 업에 의해 악처에 떨어지는 표상이 나타나서 악처에 떨어지는 것을

선업이 나타나서 악업을 해치는 역할을 하여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합니다.

이상 4가지의 업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둘째, 4가지 업 중에서 성숙하는 순서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이 있습니다.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발생하도록 역할을 하는 업입니다.

재생연결식이 발생하도록 과보를 만드는 순서에 따라서 4가지 업이 있습니다.

성숙하는 순서라는 것은 익어가는 방법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을 의미합니다.

성숙하는 순서에 따라서 일어나는 업 중에 하나, 무거운 업이 있습니다.

 

무거운 업이란 자체의 힘이 너무 강해서

다른 어떤 업도 이 업을 없애고 재생연결식이 될 수 없는 업을 말합니다.

선한 업에서는 선정의 경지에 이르는 업입니다.

불선업에서는 도덕적 기준을 부정하여 지옥에 떨어지는 업입니다.

 

이때의 불선업을 중국에서는 무간업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사이가 없는 업입니다.

지옥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런 지옥으로, 빈틈이 없는 지옥을 무간지옥이라고 합니다.

 

가장 무거운 업에 속하는 5가지 무간업은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

아라한을 살해하는 것,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 승가를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이상 5가지의 업은 그 과보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선업으로 무거운 업일 때는 선정수행을 닦은 마음입니다.

이 선정의 업은 사소한 악업의 힘보다 무겁기 때문에

다음 생에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습니다.

 

불선업으로 무거운 업일 때는 선정수행을 닦았다할지라도

나중에 무간업을 지으면 선정수행의 업이 나타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간업의 지배를 받아 지옥에 떨어집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래서 누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때 선정수행을 하면 윤회하는 세계에서 태어나지만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지혜가 성숙되어 윤회가 끝나는 업의 과보를 받습니다.

 

선정수행을 해서 천상에 태어난다고 해도

다음 생에 반드시 천상에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일시적인 행복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아예 괴로움뿐인 세간을 완전하게 벗어나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을 하는 것입니다.

 

둘, 죽음에 가까운 업이 있습니다.

이것은 죽기 전에 지은 업입니다.

현생에 마지막 마음이 일어나서 마지막 업을 짓습니다.

죽기 전에 선한 마음을 먹으면 선한 업을 짓습니다.

그런 뒤에 선한 과보를 받아 선한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선하지 못한 마음을 먹으면 선하지 못한 업을 짓습니다.

그런 뒤에 선하지 못한 과보를 받아 선하지 못한 세상에 태어납니다.

 

상좌불교 국가에서는 죽기 전에 금생에서 지은 선업에 대하여 말해줍니다.

이렇게 해서 죽을 때의 마음이 선업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불심이 두터운 신도일 경우에는 죽기 전에 스님께 올릴 가사를 준비하여

만지게 하고 돌아가신 뒤에 가사공양을 올리겠다는 것을 죽어가는 사람에게 알려줍니다.

이런 형식이 모두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하는 의식입니다.

실제로 미얀마에서는 죽음 직전에 이른 부모님께 이런 효도를 합니다.

 

셋, 실행된 업입니다.

이 업은 평소에 습관적으로 한 행위를 죽기 전에도 그대로 하는 업입니다.

평소에 한 행위는 축적된 성향이 되어 죽기 전에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만약 평소에 수행을 해서 알아차림이 확립된 사람은

죽기 전에도 알아차리면서 죽어서 선한 업을 만듭니다.

그러나 평소에 불선업을 많이 행하고 산 사람은 역시 죽기 전에도 그런 생각을 해서

불선업의 과보를 받아 좋지 못한 세계에 태어납니다.

 

넷, 이미 지은 업입니다.

이미 실천을 해서 가지고 있는 강하지 못한 미약한 업을 말합니다.

죽기 전에 무거운 업이나, 죽음에 가까워 일어난 업이나, 실행된 업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이미 지은 미약한 업이 나타나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도록 합니다.

 

주석서에서는 업의 과보가 우선적으로 나타난 순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다른 4가지 업이 있다.

무거운 업, 가까운 업, 실행된 업, 이미 지은 업이다.

 

선한 것이든 선하지 못한 것이든 무겁거나 가벼운 업 중에서

어머니를 살해한 업이나 혹은 고귀한 경지의 선정의 업이 무거운 업이고

이것이 먼저 과보를 준다.

 

그와 마찬가지로 실행된 것과 실행되지 않은 것 중에서

좋은 행위이든 나쁜 행위이든 실행된 업이 먼저 과보를 준다.

 

가까운 업은 죽을 때의 기억이 나타난 업이다.

죽음에 가까운 사람이 그 업을 기억할 수 있다.

그것에 따라 태어난다.

이 3가지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자주 반복하여 지었기 때문에 이미 지은 업이라고 한다.

앞에 있는 3가지 업이 없을 때 바로 이것이 재생연결을 일으킨다.’

 

이상의 주석서의 내용을 보면

죽을 때 살아서 지닌 무거운 업은 피할 수 없이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습관적인 행위를 한 실행된 업이

죽음에 가까워서 일어난 업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죽음에 가까웠을 때 일어난 업은 특별한 경우에 행해질 수 있는 업이고

그렇지 않다면 평소에 살던 그대로의 습관적인 업이 나타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을 죽는 연습이라고 합니다.

죽을 때의 마음이 업이 되어 다음에 재생연결식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면서 어떤 경우에나 선하지 못한 무거운 업을 짓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평소에 수행을 해서 죽을 때 수행자의 알아차림이 유지되면

더 나은 세상에 태어나거나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

경전에 밝혀진 것을 보면 죽을 때 아라한이 된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죽을 때 어떤 마음을 먹어서 어떤 업을 짓고 그 업이 어떤 과보를 결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수행을 죽는 연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죽을 때 먹지 않던 마음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평상시의 습관대로, 살아온 대로 마음을 갖고

그 마음에 따른 업을 받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무엇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고

현재 알아차리는 수행을 계속해야 하겠습니다.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느냐가 바로 죽을 때의 그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얻지 못합니다. 하고 있는 그 결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