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세간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지만 출세간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습니다.
세간에서는 성공과 실패라고 결론을 내리지만
출세간에서는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만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성공하고 무엇을 실패하였습니까?
성공을 해서 항상 행복하고 그 성공이 영원한 것이었습니까?
실패를 해서 항상 불행하고 그 실패가 영원한 것이었습니까?
진정한 성공은 어떤 상황에서나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을 때입니다.
진정한 실패는 알아차리는 마음이 없을 때입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이 행복이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마음이 불행입니다.
아는 마음이 지혜이고, 모르는 마음이 무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공과 실패를 따질 것이 아니고,
알아차리는 마음을 갖느냐? 아니면 알아차리지 못하는 마음을 갖느냐?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 무엇이 윤회를 하는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몸에 있는 통증을 살펴볼 때 여기서도 아프고 저기서도 아픕니다.
모두 같은 통증으로 보면 고정관념으로 보는 것이고,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느낌은 모두 다르다고 아는 것이 실재를 보는 것들입니다.
이렇듯 대상의 실재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느낌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뒤에 변화하는 무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지혜가 납니다.
이 지혜를 가지고 보면 비로소 원인과 결과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생기면
비로소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의 지혜가 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동일하지 않지만 연속적으로 지속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순간의 윤회입니다.
이 윤회에서는 원인과 결과만 있지 자아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아가 윤회하는 것이 아니고, 원인과 결과가 흘러가는 윤회만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일생동안 지속되다가 마지막에 죽음의 마음이 끝나면 한 일생이 끝납니다.
그런 뒤에 재생 연결식이 일어나면 다시 새로운 생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일생의 윤회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한 순간의 윤회가 일생의 윤회와 맞먹는 것입니다.
같은 흐름이 지속된다고 아셔야 하겠습니다.
순간의 윤회나 일생의 윤회나,
마음에 있는 종자가 상속되면서 흐르는 것은 같습니다.
여기에 자아가 없다는 것도 같습니다.
단지 업이 일으키는 과보가 원인과 결과로 흐르는 과정만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윤회하는 것이 아니고, 과보가 윤회하는 것입니다.
12연기에서 무명을 원인으로 행(行)이 일어날 때 무명은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래야 다음에 행이 일어납니다.
마음은 한 순간에 두 가지를 대상으로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일어난 것은 당연히 사라져야 합니다.
무명도 마음입니다.
그러나 무명의 마음이 순간에 일어나서 순간에 사라졌다면
다음에 행이 일어날 때 무명의 마음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단지 과보가 전해지는 것이지, 일어났다 사라진 마음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때에도 역시 자아는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무명으로 끝나고,
다음 순간에 새로운 마음이 행(行)을 맞이합니다.
이것이 순간순간의 상속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본 구도가 윤회이며,
모든 것들은 이런 기본 구도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이것을 일생의 윤회라고 말합니다.
나는 과거에 어디서 온 것이 아닙니다.
어느 장소에 살았건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의 원인으로 현재가 있기 때문에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거의 어디서 온 것이 아니고,
과거의 원인으로부터 현재의 결과로 온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윤회입니다.
내가 온 것이 아니고 원인이 와서 결과를 일으켰다는 것이 추상적이지만
이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에 인격체는 없습니다.
물론 정신과 물질이 있지만,
매순간 일어나서 사라지는 정신과 물질만 있기 때문에
이것이 옮겨 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나’라고 하는 자아를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 시각으로만 보아서 그렇지,
지혜로 보면 이러한 견해는 매우 합리적인 것이라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원인으로 현재의 결과가 생겼을 때
이 흐름을 운반하는 것은 역시 정신과 물질입니다.
정신과 물질이 있지만 이것들이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져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상황을 주도하는 것이 바로 정신과 물질이 아니고, 원인과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방식으로 현재의 원인에 의해 미래의 결과로 갑니다.
현재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그 결과를 받는 것이지,
자아가 있어서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도 단지 원인과 결과만 있습니다.
윤회는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힌두교에도 윤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는 재생이고, 힌두교의 윤회는 환생입니다.
불교의 윤회는 자아가 없기 때문에 과보가 전해지지만,
힌두교의 윤회는 자아가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자아가 다음 생으로 갑니다.
이때 불교는 무상하기 때문에 자아가 없다고 하지만,
힌두교는 항상 하기 때문에 자아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아가 없는 곳에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월적 존재가 없지만,
자아가 있는 곳에서는 항상 하고 영원한 초월적 존재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마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차이에서 생긴 것입니다.
혜안으로 마음을 보았을 때와,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에 의해서 전해 진대로
알고 있는 마음인가에 따라서 견해가 갈립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다양한 마음과 마음의 작용과 업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이러한 지혜를 얻기 위한 것들입니다.
과연 내가 있어서 윤회하는가?
아니면 자아가 없고 조건에 의해 윤회하는가를 알기 위해서 마음공부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자아나 불멸의 영혼대신에 존재의 유동성과 영속성을 알아
무아의 지혜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거울을 볼 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이때 여기에 실재하는 모습이 거울에 투영되어 나타나듯이,
여기에 있는 모습과 거울에 비친 모습은 다른 것입니다.
같다고 본 것은 관념이며, 실제는 다른 것입니다.
단지 거울에 비친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전혀 다르지만 그대로 비춰졌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윤회입니다.
산에서 소리를 지를 때 메아리가 울립니다.
이때 처음에 일어난 소리는 사라지고 없지만 같은 소리가 반복해서 울립니다.
종이에 도장을 찍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장을 찍을 때도 도장은 종이에 옮겨가지 않지만
종이에는 똑같은 형태의 글자가 남아서 날인됩니다.
그래서 다른 여러 곳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윤회는 자아가 있거나 실체가 있어서 상속되는 것이 아니고,
원인이 있어서 결과로 옮겨가는 것들입니다.
윤회에 관하여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존자의 대담을 들어보시겠습니다.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물었습니다.
“존자시여, 다시 태어날 때 아무 것도 옮겨가는 것이 없이 일어납니까?”
“왕이시여, 그렇습니다. 다시 태어날 때 아무 것도 옮겨 가는 것이 없이 일어납니다.”
“존자시여, 그러면 저에게 예를 들어서 설명해 주십시오.”
“오, 왕이시여.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한 등잔에서 다른 등잔으로 불을 옮겨 갔다면,
하나의 등잔이 다른 등잔으로 옮겨간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오, 왕이시여. 바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어떠한 것도 옮겨가는 것 없이 일어납니다.”
“존자시여. 예를 하나만 더 들어주십시오.”
“오, 왕이시여. 왕께서 어렸을 때 시를 가르친 선생님으로부터
어떤 구절이나 다른 것을 배운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예, 존자시여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구절이 왕의 스승으로부터 왕에게로 넘어왔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왕이시여.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어떤 것도 옮겨 가지 않고 일어납니다.”
“존자시여. 다음 존재로 태어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 왕이시여. 다음 존재로 태어나는 것은 정신과 물질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존재로 태어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정신과 물질입니까?”
“오, 왕이시여. 다음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몸과 마음이 아니지만 이 몸과 마음을 갖고 태어납니다.
왕이시여. 인간은 행위를 합니다.
그것은 선할 수도 있고 선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로 인하여 또 다른 몸과 마음이 다음 존재로 태어납니다.”
“존자시여. 만약에 다음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이 몸과 마음이 아니라면,
인간은 자신이 한 악한 행위로부터 자유롭지 않겠습니까?”
“만약 인간이 또 다른 존재로 태어나지 않는다면
인간이 한 행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이시여. 인간이 또 다른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한 악한 행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주십시오.”
“오 왕이시여.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망고 열매를 훔쳤는데,
그 망고 주인이 그를 붙잡고 왕에게 데려와서
‘왕이시여. 이 사람이 나의 망고 열매를 훔쳤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망고를 훔친 사람이 ‘나는 망고를 훔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심은 망고는 내가 가진 것과 다른 것입니다.
나는 벌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왕이시여, 그러면 이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합니까?”
“존자시여. 그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왕이시여,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존자시여,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말을 해도
그는 망고를 훔쳐갔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합니다.”
“왕이시여, 이와 마찬가지로
이 몸과 마음으로 인간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행위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로 인하여 다른 몸과 마음을 가진 다른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악한 행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존자시여. 정신과 물질에 의하여 선행이나 악행을 짓게 되는 업은 어디에 머뭅니까?”
“왕이시여. 그림자가 형체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업(業)은 인격적 개체에 수반됩니다.”
“업은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존자시여 예를 들어 주십시오.”
“왕이시여 아직 열리지도 않은 과일을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까?”
“존자시여. 그럴 수 없습니다.”
“오, 왕이시여. 마찬가지로
생명체의 연속이 끊어지지 않는 한 그 업이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지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존자시여. 부처님이라는 분이 실제로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계십니다.”
“존자시여. 그렇다면 여기 계시든가, 저기 계시든가 지적할 수 있습니까?”
“왕이시여. 부처님은 번뇌를 소멸하고 남은 육체를 여읜,
완전한 열반의 경지에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습니다.
부처님은 실제로 여기 계신다든가, 저기 계신다든가 지적할 수 없습니다.”
“존자시여. 예를 들어 주십시오.”
“왕이시여. 큰 불이 타고 있을 때, 그 불꽃이 사라졌는데도
불꽃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존자시여. 불꽃이 없어지면 불꽃을 지적할 수 없습니다.”
“오, 왕이시여.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번뇌의 불을 끔과 동시에
남은 육체를 떠난 완전한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미 가버린 부처님을 여기 계신다든가, 저기 계신다든가 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몸으로 삼고 있는 것에 의하여 부처님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부처님에 의해 가르쳐졌기 때문입니다.”
“존자시여. 잘 알겠습니다.”
이렇게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존자의 대화에서 우리는 윤회의 실상을 알 수 있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원인과 결과를 알아서,
그리고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모든 것들이 원인과 결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만 있다면
거기에서 의심에서 해방됩니다.
이러한 의심에서 해방되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자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모두 순간적인 마음들의 연속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집착을 끊는 것이 수행자의 최고의 사명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초기불교 > 붓다의수행법·위빠사나·묘원법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88 (0) | 2010.12.27 |
---|---|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87 (0) | 2010.12.27 |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85 (0) | 2010.12.27 |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84 (0) | 2010.12.27 |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83 (0) | 2010.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