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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90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1:0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지식이 있는 곳에는 다툼이 있지만 지혜가 있는 곳에는 다툼이 없습니다.

지식은 남이 한 말을 기억하거나 철학적 사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실천적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모름지기 지식의 과정을 거쳐 지혜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고귀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지식이 지나치면 맹목적이고 아만심이 강해집니다.

뿐더러 지혜가 지나쳐도 간교해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에서 지혜로 나아가되 지혜에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지혜가 최고라고 해도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며

한순간의 정신적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식에서도 알아차려야 하지만 지혜가 났을 때도 똑같이 알아차려야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많은 불교도들은 마음이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옮겨간다거나

환생을 한다고 하는 그릇된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존재한다고 그릇되게 믿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재생은 환생이 아닙니다.

 

재생에 관한 불교의 가르침은 영혼 재래나 환생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거나, 대범천으로부터 나와 다음 존재로 옮겨가는

불변하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재생은 전에 있던 마음이 뒤의 마음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고,

전에 있던 마음은 사라지고 그 마음에 담긴 과보가 다음 마음에 전해져서

상속되는 것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의 마음은 끝나서 다시 일어나지 않고 사라지며,

죽을 때 마음에 담긴 과보가 다음에 전해져서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므로

이것을 재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환생은 같은 마음이 지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영원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한 존재가 죽을 때, 몸을 떠나는 것은 영혼이라고 말하기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기 유충이 번데기가 되어도 계속해서 성충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이,

거주할 빈자리가 없으면 영혼이 몸에 매달려서 떠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는 조상 대대로 깊이 뿌리박혀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존재가 다른 존재로 영혼이 옮겨가서 환생을 한다고 하는 믿음은

사견일 뿐입니다.

 

위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그릇된 견해는 마음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으로 알고,

죽을 때 오직 몸만 사라질 뿐이라고 하는 그릇된 믿음 때문에 유지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모기의 유충이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가 성충이 되면 성충은 유충도 아니며 번데기도 아닙니다.

새로운 형태의 존재로 거듭 난 것입니다.

유충은 유충이고, 번데기는 번데기고, 성충은 성충입니다.

이것들이 성장과정을 거쳐서 새롭게 태어난 것이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충에 번데기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알이 일정한 조건이 성숙되어 새가 됩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면 알과 새는 다른 것입니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렇듯이 재생과 환생을 이러한 시각으로 이해하셔야 되겠습니다.

 

이들은 아직 바른 연기법의 지식을 얻지 못한 까닭에

마음이 무상하고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음은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나고

일어난 곳에서 1센티미터도 움직이지 못하고 즉시 사라집니다.

또, 한 순간에 하나 밖에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연속적인 두 순간이 동일하게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마음이 일어나면 그 마음은 사라지고,

그 마음이 가지고 있는 가속도에 의해서, 그 과보에 의해서

다음 마음이 새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을 매 순간 이렇게 살고 있으며.

한 생이 끝나면 다음 생으로 옮겨가는 과정도 지금 이 순간에 옮겨가고 있는

그런 방식을 그대로 적용받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매 순간 찰나 생, 찰나 멸하며, 다음 생에서도 새롭게 일어나는 것이지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이해하는 데,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이기 때문에,

이것이 나의 마음이 아니라고 아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다음에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가 있는 사견을 어떻게 제거하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견(邪見)이란 잘못된 견해를 말합니다.

 

사견은 나라고 있는 자아가 없는데 내 몸과 마음이라고 아는 유신견과,

모든 것은 변하고 항상 하지 않은데, 변하지 않고, 항상 하고, 영원하다고 하는 상견이 있습니다.

그리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하는 단견이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없애기 위해서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 집중력을 키운 뒤에 지혜가 나야 비로소 이러한 사견이 제거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고정관념에 의해서 대상을 보기 때문에

결코 우리는 사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역사는, 인류는 이러한 사견으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이 나와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힌,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해서 지혜를 얻어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한 사물을 바르게 볼 수가 없습니다.

사물을 바르게 보지 않고서는 세상사의 번뇌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사견으로 대표되는 유신견은 사실 무아의 반대입니다.

무아는 윤회를 끝내기 위한 진리이지만, 유신견은 윤회를 계속시키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 유신견은 단순한 이 윤회만 돌게 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뿐인 비참한 세계에 떨어져 살게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유신견을 가지고 윤회하는 동안 천상에서만 태어날 수 없습니다.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사악도도 경험을 해야 되기 때문에 윤회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비참한 존재계인 지옥으로 떨어지게 하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고 뿌리 뽑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근본 원인이 바로 사견인 것입니다.

 

사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것들의 생명을 빼앗고, 훔치고,

삿된 음행을 하고, 부모를 살해하거나,

심지어 부처님의 몸에 상처를 내서 피를 흘리게 하는 큰 죄를 저지르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렇듯 모든 잘못된 행위와 악행은 사견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심지어 도둑질을 하고도 이것은 나의 견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도둑질을 하고도 이것은 나의 가치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사견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괴로운데 미래에도 괴롭고 싶습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지옥으로 떨어지게 하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고

뿌리 뽑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견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가장 굳고 깊게 자리 잡혀 있는 유신견, 상견, 단견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참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원인을 불선업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로 범인은 사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사견에 의해서 불선 행위가 저질러지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형수를 처형하는 것은 집행관이지만

결국 죽음의 형을 선고하는 진정한 힘은 판사에게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존재하는 근본 원인은 무명과 갈애이고, 이 무명과 갈애는 사견에 의해서 생깁니다.

사견은 잘못된 견해이고, 잘못된 견해는 모르는 마음입니다.

 

사형수의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무명과 갈애이지만, 결국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유신견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범인은 무명과 갈애이지만, 진짜 범인은 유신견이라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지각이 있는 존재를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바로 사견입니다.

밖으로 나타난 업은 실제 범인이 아닙니다.

이렇듯 사견은 위험하고도 해로운 것입니다.

사견이 왜 근본 원인이 되는지에 관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눈에 보이는 행동은 범인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잘못된 마음이 바로 범인인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싶고, 자고 싶고, 말하고 싶다는 온갖 종류의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내가 먹고 싶다. 내가 자고 싶다. 내가 말하고 싶다. 등등

내가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인식은 각각의 정신적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개아로써의 나, 자아, 나의 것 등으로 발전합니다.

생각 혹은 의식은 인식의 대상과 감각기관의 문이 접촉하여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눈이 물질에 부딪혀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개아, 나, 자아, 나의 것이라는 것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는 것을 내가 본다고, 듣는 것을 내가 듣는 것이라고

잘못 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보는 것이 아니고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형상이라는 감각대상에 부딪혀서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지 내가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보는 것이 아니고 단지 감각기관에 의해서 보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을 감각기관인 의(意)라는 생각, 그 마음이 아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는 없습니다.

 

이렇게 아는 것은 조건에 의한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아는 것이지,

여기에 나라고 하는 자아는 없습니다.

 

보는 자, 듣는 자, 행위 하는 자는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원인으로 인한 결과일 뿐입니다.

 

성내는 마음과 탐욕의 마음이 일어날 때

이것들은 단지 성내는 마음과 탐욕의 마음일 뿐이라고 알아야합니다.

또한 이런 마음들이 그 자체의 기능과 역할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수행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수행자는 오직 의식만 있는 것이라고 알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정신적 상태의 일어남이 단지 현상일 뿐이고,

그 순간의 의식만 있을 뿐이지 거기에 나, 자아, 나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로 이런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하며,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이 이러한 결과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이유는,

귀라는 감각기관이 소리라는 대상이 일어남으로 인해서 그것을 아는 마음이 있지,

그 소리를 그 마음을 내가 스스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코가 냄새를 맡고 그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지 여기에 자아는 없습니다.

코와 냄새라는 감각기관의 원인으로 인해서 그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몸과 마음을 통찰한다는 것은

이러한 원인과 결과를 통해서 결코 이 속에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한편, 질투심이나 보시에 대한 생각 등등 어떤 생각이나 의식이 떠오를 때,

그것은 단지 정신적 상태일 뿐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이 일어날 때에도 이는 단지 생각이나 의식일 뿐이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생각들은 그 자체의 기능과 역할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일 뿐이지,

여기에 나, 또는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의식은 두 현상들, 그러니까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부딪히는 것들의 결과로써

연속적으로 무리지어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안다는 것은 모두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의 부딪힘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그 외에 어떠한 것도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초월적 힘도 여기에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이것들을 일어나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아가 아니고 단지 원인과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원인과 결과가 과보가 되어서 상속되는 그 흐름의 과정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을 뿐이지,

결코 여기에 자아가 있거나 초월적 존재가 있어서

이것들을 진행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아셔야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