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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91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1:0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누가 여러분의 마음을 괴롭힙니까?

누가 여러분의 마음을 속박합니까?

 

자기가 자기 마음을 괴롭힙니다.

자기가 자기 마음을 속박합니다.

 

그래서 별것도 아닌 일을 크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괴로움은 자신의 마음이 만듭니다.

 

마음이 괴로우면 몸도 괴롭습니다.

그러니 항상 봉사만 하는 몸을 괴롭히지 마십시오.

 

당신은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마음을 괴롭힐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부정하지 마십시오.

이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숨을 들이쉬려는 의식이 일어날 때마다 이렇게 알아차리고

숨을 내쉬려는 의식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나 또는 자아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은 수행자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수행자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은

나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수식관을 하기 때문입니다.

 

개아라던가, 나라던가, 주관성, 혹은 자아의식 등 어느 정도 이것들이 없어지면

유신견이 어느 정도 사라진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정견의 주도하에서 철저히 수행을 한 후에라야 가능합니다.

 

호흡은 생명과 생명을 이어주는 기능입니다.

호흡은 살아있는 조건에 의해서 저 스스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지

이것이 나의 호흡은 아닙니다.

 

만약 이 호흡이 나의 호흡이라고 한다면 마지막에 죽는 순간에 숨을 거둘 때

나는 나의 호흡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호흡이 사라질 때 사라지지 말라고 지시하면 사라지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을 때가 되면 그 마음도 떠나고 호흡도 끝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나의 호흡입니까?

단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연속적 과정에만 있을 뿐이지

이것은 결코 내가 소유하거나 나의 호흡은 아닙니다.

 

집중은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사견을 제거하고 정견을 돕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이란 계와 집중이라는 정과 정견이라고 하는 혜입니다.

그래서 계, 정, 혜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정정만으로는 이끌어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정견과 정사유가 주도하여 정정진, 정념, 그리고 정정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지혜가 있어야 알아차릴 수 있고, 알아차림을 지속시켜 집중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유신견은 나, 자아,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있을 때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느낌, 지각, 행위가 일어날 때

일어난 것은 단지 느낌, 지각, 행위일 뿐이지,

그것이 나, 또는 자아가 아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수, 상, 행이 일어날 때 이것은 단지 수, 상, 행이지

이것이 나의 수, 상, 행이 아니라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느낌이 일어날 때도 그것은 단지 느낌일 뿐이지 나 또는 자아가 아니며,

행위의 경우에도 행위일 뿐이지 나 또는 자아가 아닌 것입니다.

수행자가 이러한 단계에 이르면 유신견이 일시적으로 제거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한다는 것이 이 글을 읽는 것처럼,

이 말을 듣는 것처럼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가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해도 알아차림을 놓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놓치는 경우가 많을수록 사견을 근절시키는 데 시간이 길어집니다.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된다면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이 더 강해지고

그럼으로써 수행자가 목표를 달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더욱 짧아집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느낌, 지각, 행이 하나하나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잘 지켜보아

자신의 오온에 대한 통찰지혜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잘못된 견해를 없애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 지혜가 나면 저절로 유신견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어둠에서 밝음으로 와서 그것들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견해를 없애려고 하지 말고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가장 완전한 방법에 이를 수 있는 길입니다.

이것이 사견을 제거하는 수행입니다.

 

그러나 무상, 고, 무아, 즉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숙고하지 않는다면

아직 통찰을 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수행이라도 사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무상, 고, 무아를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사견을 강화하는 수행도 있습니다.

자아를 강화하거나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강화하는 수행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에 이르러서

몸과 마음의 분리되어서 서로 각각의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이러한 지혜를 통해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성숙되고

다음에 현상을 바로 보는 지혜가 생겨서 무상, 고, 무아를 알아차릴 때

우리는 비로소 유신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다음에는 상견과 단견을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모든 것들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무명은 12연기의 시작입니다.

이 시작은 시작을 말하는 시작이 아니고 근본원인이 되는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무명 이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갈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명을 강화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있다고 하는 유신견입니다.

유신견으로 인하여 탐욕과 성냄이 일어나 무명을 가속화시킵니다.

 

수행자가 유신견, 상견, 단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알아차린 뒤에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합니다.

단순히 알아차리는 것으로 그쳐서는 지혜가 성숙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과 함께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고 알아차림을 지속시켰을 때만이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알게 되고

다음 단계로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되는 지혜가 생깁니다.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되면 사견이 제거됩니다.

생각으로 아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서 바르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식탁에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것을 보면 먹고 싶은 갈애가 일어납니다.

이어서 그것에 대한 강한 욕구가 일어나고, 업의 생성이라고 하는 육체적 행위가 따릅니다.

달리 말하면 갈애가 일어나자마자 이어 집착이 따라오고

다시 업의 생성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먹는 것 하나를 보는 것에서도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이라는

3가지 요소가 갖추어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갈애를 원인으로 하여 집착이 일어난다.’

이것은 갈애와 집착 사이에 원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 원인이 없다면 결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갈애나 집착 어느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때의 원인은 조건, 동기, 연(緣)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건 지어진 것이라고 할 때는 원인과 결과에 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때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일어난다고 했을 때 갈애는 원인이고 집착은 결과입니다.

이 결과인 집착이 다시 원인이 되어서 집착을 원인으로 업의 생성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일어난 것은 사라지면서 다음 것을 일어나게 하고 사라지는 것이

바로 원인과 결과입니다.

 

다시 그 다음의 고리는 ‘집착을 원인으로 하여 업의 생성이 일어난다.’ 인데

이때 업의 생성은 원인이 되는 집착 없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집착은 일어날 뿐만 아니라 또 다음 현상이 일어나기 위한 원인을 남기며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이때의 원인은 인과관계의 연속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과보의 상속이라고 합니다.

 

이 과보의 상속을 윤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윤회는 매순간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매순간 흐르는 윤회가 죽음을 끝으로 다음에 이어지는 것도 한 일생을 흐르는 윤회로 봅니다.

 

모든 존재는 갈애와 집착, 그리고 업의 생성이 끊임없이 연속하여 일어나는

소용돌이 속에서 회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내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것이 과연 연기법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치하는지 탐구해보셔야 하겠습니다.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일어난다고 할 때

여기서 갈애와 집착 사이에 원인을 독립적 요소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원인과 결과를 연속적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집착은 원인이 되는 갈애로 인해서 일어나며

갈애는 집착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을 남기며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집착은 왜 일어납니까?

저절로 일어나는가, 아니면 갈애로 인해서 일어나는가요?

 

그렇습니다. 집착은 갈애를 원인으로 일어납니다.

갈애와 집착과 업의 생성이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상견과 단견은 잘못된 것입니다.

 

유신견, 상견, 단견은 원인과 결과가 배제된 견해입니다.

모든 일은 원인과 결과이므로 상호의존적입니다.

그러므로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이제 수행자는 집착이 갈애로 인하여 일어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수행자들이 연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집착이 갈애로 인하여 일어난다는 사실을 제삼 강조하였습니다.

 

수행자는 이를 통해서 이 세계의 현상들이 저 스스로 원인 없이

또는 우발적으로 일어난다는 생각과 관념을 없앨 수 있습니다.

 

선행하는 현상인 갈애는 집착이라는 결과가 일어나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이처럼 집착이 일어나기 위한 길을 만드는 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그러므로 집착은 갈애를 원인으로 해서 일어납니다.

수행자는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 숙고를 해야 합니다.

 

바꾸어 얘기하면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일어난다고 하지만

집착은 또다시 갈애를 원인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역으로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수행자가 이러한 연결고리를 분명하게 알면 연기법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만일 수행자가 과거와 현재 사이에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다는 말을 고집한다면

이는 단견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과거를 원인으로 현재가 있다는 원인입니다.

이것은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연결한 것이 아니고 원인이 연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만든 것이 아니고 원인이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서 왔을까요, 그리고 어디로 갈까요?

바로 과거의 원인으로부터 현재의 결과로 왔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결과가 원인이 되어서 다시 미래의 결과로 간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오직 원인 밖에 없습니다.

어떤 누구의 힘도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이 원인이 바로 조건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먹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나면 먹는 것에 대한 강한 집착이 따라오고

다시 신업인 행위와 구업인 말이 따라옵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밖에 나가서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말합니다.

연기는 이렇게 계속 이어집니다.

 

먼저 먹고 싶은 갈애가 일어나서 집착이 일어나는 원인을 남기며 사라집니다.

이때 집착은 갈애와 집착 사이에 연결고리로 작용하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또한 집착은 업의 생성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하고 사라집니다.

그럼으로써 이것은 의식이 작용하여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현상은 단지 일어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현상에 자리를 내어주면서 사라진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수행자는 상견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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