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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89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1:0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말을 할 때는 말하려는 의도와 말하는 행위와

말에 대한 결과가 있습니다.

 

먼저 말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습관적으로 말하게 되고

그 결과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됩니다.

 

말하려는 의도는 마음이 말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려고 한다면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뿐더러 말의 끝이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면

단지 그 결과를 알아차리면 됩니다.

 

말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르지만

이미 지난 일을 붙잡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말하려는 의도가 좋은 마음이면 좋은 마음으로 말하게 되고

말 하고 나서도 좋은 마음이 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만이 자신도 좋고 남도 좋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까지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부터는 미얀마의 모곡 사야도께서 설하신 마음에 대한 것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왜 해야 되는지

모곡 사야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요약해보겠습니다.

 

먼저 심념처의 중요성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강조하여 반복해서 나타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는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숫자별로 모은 경전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잘 닦여지고 계발된 마음만큼 융통성 있고 유연한 다른 어떤 법도 알지 못한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잘 닦여지고 계발된 마음만큼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법도 알지 못한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잘 닦여지고 계발된 마음만큼 커다란 소득과 이익을 주는 다른 어떤 법도 알지 못한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잘 닦여지고 계발된 마음만큼 이로운 다른 어떤 법도 알지 못한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잘 닦여지고 계발된 마음만큼 더한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다른 어떤 법도 알지 못한다.’

이상이 부처님의 말씀이십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얻는 이익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융통성이 있고 유연해집니다.

쉽게 적응할 수 있습니다.

커다란 소득과 이익을 줍니다.

이롭습니다.

행복과 즐거움을 줍니다.

 

이렇듯 마음을 알아차리면 이상과 같은 이익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익은 번뇌를 뿌리 뽑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하고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괴로움의 온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하는 마음과 일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인해 괴로움이 일어났다면

바로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본질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일하는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순간에 번뇌가 소멸합니다.

 

물론 지혜가 나기 전까지는 순간적인 소멸이지만

일단 소멸이 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알아차리는 마음이 일어나면 있는 마음은 순간적으로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잘 닦여지고 계발된 마음은 수행을 하는 마음입니다.

잘 닦여지지 않고 계발되지 않은 마음은 수행을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잘 닦여지지 않고 계발되지 않은 마음의 결과는 이와 반대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는 마음은 고요함과 지혜가 계발되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습니다.

 

융통성이 없고 유연하지 못합니다.

쉽게 적응할 수 없습니다.

소득과 이익이 없습니다.

이로움이 없습니다.

고통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닦여지지 않은 마음과 닦여진 마음의 차이가 서로 반대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법구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모든 법들에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가 지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그에게는 반드시 고통이 뒤따른다.

마치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이상은 법구경의 게송이었습니다.

 

이때의 마음은 6가지 감각기관인 안, 이, 비, 설, 신, 의 중에서

의(意)에 해당되는 마음입니다.

 

또 다른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은 마음에 의해서 인도되고

마음에 의해서 이끌려간다.

모든 것들은 오직 마음이라는 하나의 법의 힘을 쫓아간다.

이때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수, 상, 행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은 모든 행위에 앞서 가는 것이며 모든 현상에 앞서 일어납니다.

모든 육체적, 정신적 행위는 마음이 협력하거나 협조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선한 행위를 하던 악한 행위를 하던 마음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떠한 행위도 먼저 의도하지 않고 일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의도는 오직 마음 안에서만 일어납니다.

 

우리의 마음이 제어될 때 우리의 몸 또한 제어됩니다.

마음이 자유롭고 통제되어 있지 않으면

육체적인 행위 또한 아무런 제약 없이 생각과 감정을 마음대로 표현할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제어하는 핵심요소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하려고 하는 의도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이 의도가 바로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워낙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져서 그 실체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우리들의 눈꺼풀 하나를 깜박거리는 것도 마음의 의도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워낙 빠르기 때문에 이러한 의도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몸은 저 스스로 하게 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몸은 장님이고, 마음은 앉은뱅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저 스스로가 움직일 수 없지만 앞에서 이끌기 때문에

몸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자아의식, 나, 또는 개체로서의 정체성이라는 사견이 머무르는 곳이며,

또한 유신견이 자라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나, 즉 자아라는 망상은 우리의 마음 뒤에서 강력한 힘으로 작용해서

어떤 정신적, 육체적 언어적 행위를 일으키는데 그것은 이런 마음의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개아, 자아의식입니다.

바로 이것이 유신견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몸은 병이 자라는 곳이며 마음은 유신견이 자라는 곳입니다.

몸과 마음은 고통의 온상이 될 수도 있고, 지혜와 기쁨의 선택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논장의 분별론 주석서인 ‘삼모아위노다니’ 에는

알아차림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행동하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지나치게 분별하지 않는

심념처 수행의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이 청정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유신견이 강한 사람, 내가 무엇이라고 하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심념처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유신견이 강하면 결코 윤회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유신견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이것은 사견의 성향을 가진 지성적이지 못한 수행자가 도를 얻기 위해서

간결하고 꾸미지 않은 심념처 수행이 적합하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해보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별로 효과가 없는 경우를 봅니다.

 

우선 몸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호흡을 3번 이상 알아차리기가 어렵다고 호소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심념처 수행을 해서 호흡을 몸에서 알아차리지 않고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리도록 하면 쉽게 호흡을 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같은 호흡도 몸에 일어난 호흡을 알아차리면 신념처이고,

호흡을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수념처이고,

마음으로 알아차리면 심념처이고,

호흡을 무상의 법으로 알아차리면 법념처입니다.

 

삼장에 정통하신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는 빨리어 경전에 비추어보고,

삼장과 주석서에 입각해서 오늘날의 수행자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복잡하지 않고

간단명료한 방식의 심념처를 만들어내셨습니다.

 

여기에서 비록 심념처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다른 3가지 염처의 알아차림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마치 신선한 라임원액과 설탕과 소금, 물이 들어있는 라임주스와 같습니다.

이처럼 대상으로 하는 염처만큼 두드러지거나 명백하지는 않을 지라도

나머지 3가지 염처 또한 포함되어야 합니다.

 

나머지 3가지 염처라는 것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 외에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그리고 마음의 대상인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함께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을 상응하는 법으로, 함께 존재하며 함께 일어나고 함께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심념처 수행을 한다고 해서 나머지 신념처, 수념처, 법념처 수행이 포함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 4가지가 모두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상응하는 법은 오온이 따로 떨어져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작용하면서 서로 되먹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온의 색, 수, 상, 행, 식이 서로 다르지만 함께 모여서 작용을 합니다.

몸의 요소인 지, 수, 화, 풍도 각각의 느낌이지만 함께 작용하는 것도 상응하는 법입니다.

 

불교는 하나로 보는 시각과 전체로 보는 시각 두 가지가 모두 작용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아는 방법에 대해서 대장로 사리뿟따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어 쉽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읽는 것은 틀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아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의 심념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흔히 위빠사나 수행자를 경원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신의 마음이 읽힐까봐서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며

설령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해도 관용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알아차리지,

배척하거나 경멸하거나 비판하기 위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차림이란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적어도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상대를 비난하거나 경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자가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경계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자는 나의 잘못된 부분을 더 따뜻하게

더 관용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수행자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쉽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탐심이 일어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때 우리는 탐심이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날 때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으며

사라질 때에도 또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보지 않을 때는 자신의 마음이 봅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마음이 증인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항상 자신이 새로운 증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이 모든 일을 하기 때문에 일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뿌리에 접근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하고 있는 마음을 새로운 증인이 지켜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를 스스로 제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처음부터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모든 일을 하기 때문에 일하는 그 마음을 본 적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특별한 수행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항상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그런 수행방법이라고 아셔야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마음을 알아차려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스승에 의해서 특별한 지도를 받으면

쉽게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