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어리석어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여 생긴 괴로움이 있다면
이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냥 ‘잘못 했네!’ 라고 알아차리십시오.
자기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다면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잘못에 대한 고통을 겪을수록 냉철한 자기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없으면 잘못이 되풀이 됩니다.
만약 고통을 외면하려고 했다면 이는 아직 미혹한 것이며,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잘못한 것으로 인해 손실을 보지 않고 이익을 얻었다면,
가치 판단이 흐려져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잘못한 것에 대한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십시오.
잘못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유신견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단계로 수행자가 알아야할 것은
어떤 의식이 일어나든 그것은 나, 자아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닌,
단순한 의식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그리고 온갖 종류의 의식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써,
수행자는 그것들이 단순한 의식일 뿐,
그 이상이 아님을 잘 인지하고 있어야합니다.
왜 탐욕이 일어났어!
왜 화를 냈어!
왜 이렇게 어리석지! 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나 그것을 배척하거나 없애려고 하지 말고,
단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것들은 나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있어왔던 고정관념이기 때문에
새로 아는 마음이 일어나면 된 것입니다.
어떤 의식이 일어나든 수행자는 거기에 집중하여
각각의 의식이 일어날 때마다 그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의식은 나, 자아, 나 자신, 내 것 등으로
인격화 시킬만한 것이 없이 단순한 정신적 현상일 뿐이라고 알아야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들 마음 안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단순한 정신적 현상일 뿐이지,
그것이 나의 소유이거나 내 마음이 일으킨 것들이 아닙니다.
단지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단순한 정신적 현상이라고 이해해야합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일어났을 때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유신견을 가진 상태가 되지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일어났을 때 알아차리면
단지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바뀌기 때문에 유신견이 사라집니다.
알아차릴 때는 오직 대상과 아는 마음밖에 없으므로 사견이 붙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수행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온갖 사견이 우리를 지배하지만
수행을 할 때는 알아차림이라는 선한 행위가 있어서
단지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기 때문에
이 순간만큼은 사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안식이 일어날 때 보는 자가 없으므로 보는 것은 내가 아니며,
이식이 일어날 때 듣는 자가 없으므로 듣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한 들음일 뿐이지,
거기에 나, 자아, 나 자신, 내 것 등으로 인격화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만듭니다. 내가 듣고 내가 본다고.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겪습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서 보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겪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가 대상을 볼 때 보는 자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어떠한 믿음이나 견해를 유신견이라고 합니다.
만일 수행자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
단지 안식일뿐이고, 의식의 무더기일 뿐이라고 지각한다면,
거기에는 단지 몸이 있다는 유신(有身)만 있을 뿐이지
여기에 사견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유신견은 나의 몸이라고 하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몸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몸은 있습니다. 이것을 유신이라고 합니다.
유신은 단지 몸이 있다는 견해로 정견이지만
유신견은 몸이 나의 몸이라고 하는 잘못된 견해를 말합니다.
그래서 유신(有身), 몸은 있습니다.
그런데 유신에 견(見)이 붙으면
이것은 나의 몸이라고 하는 잘못된 견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몸이 나의 몸이라고 하는 소유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나의 마음이라고 하기 때문에 잘못된 견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신은 다섯 가지 무더기라고 하는 오온을 뜻합니다.
오온 중에 하나를 나, 자아, 혹은 인격체로 보는 잘못된 견해가 바로 사견(邪見)입니다.
예를 들면 안식이 일어날 때 내가 보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이것이 바로 유신견입니다.
이와 같이 소리를 들을 때나, 이식이 일어날 때 내가 듣는다고 여긴다면
이것 또한 유신견입니다.
비식이 일어날 때 내가 냄새를 맡는다고 여기면 이것 또한 유신견입니다.
의식이 일어날 때 내가 생각한다고 여긴다면 이 또한 유신견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안이비설신의라는 감각기관의
의(意)가 대상을 생각하고 마음이 단지 그것을 아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들이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현상이지 여기에 자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식을 자아, 또는 나 등으로 인격화하여 잘못 받아들이는 것이 유신견입니다.
수행자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는 것은 단지 오온의 작용으로 알고
거기에 아무런 자아나 내가 없다고 아는 지혜를 얻을 때
유신견이 뿌리 뽑히고 제거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유신견은 쉽게 제거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몸과 마음을 통찰하여 도과를 얻어야 유신견이 비로소 조금씩 약해집니다.
범부들은 항상 몸이 있다고 하는 유신과 개체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사견을
뒤섞어버리곤 합니다. 그래서 유신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수행자는 몸이 있다는 유신이 있을 뿐이라고 알고
이 몸이 내가 아니라고 하는 정견을 가져야합니다.
유신견이라는 잘못된 견해가 생기는 것은 바로 유신과 사견이 뒤섞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유신과 견이 붙어서 잘못된 견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윤회의 전 과정을 살펴보면 반드시 유신에 사견이 뒤섞이면서 진행되어온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과연 그렇지 않던가요? 오온은 항상 함께 일어나지만
그 중 어느 것 하나가 두드러지게 일어납니다.
어떤 오온이 일어나던 이를 단순한 오온의 일어남으로 알 뿐
그것을 나, 자아 등과 섞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온은 있지만 오온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여 집착하는 것이 혼합된 견해입니다.
이제 수행자는 유신이 무엇인가 분명히 알게 되었으므로
유신을 바른 견해와 결합시킬 수가 있어야합니다.
유신에 정견이 섞이면 다시 유신이고,
유신에 사견이 섞이면 유신견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른 견해를 가질 때만이 내가 있다고 하는
유신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내가 있다고 하는 유신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때
영원히 윤회 계에 머물러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바람직하지 못한 법을 버리고
바람직한 법인 정견을 가져야 합니다.
수행자가 있는 그대로,
즉 유신을 유신으로만 보아 사견과 혼동하지 않으면
사견의 족쇄를 깨부수고 더 이상 혼란스럽게 되지 않아
비로소 다음 생에 지옥으로 떨어질 위험에서 벗어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신견은 무아와 반대되는 견해입니다.
우리가 어리석음도 어리석음으로 그치지 않고
어리석음을 조정하는 것이 유신견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모든 고통, 모든 불행, 모든 괴로움을 지켜보십시오.
반드시 그 뒤에는 유신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가 아니고,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나의 소유가 아닌 것을, 나의 것이 아닌 것을
나의 것이고 나의 소유라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내가 나의 소유가 아니듯이, 여러분의 자식도 여러분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물며 나조차도 나의 소유가 아닌데
우리들은 다른 것들을 함께 소유하려고 합니다.
아내를 남편을 자식을 부모를 형제를 나의 소유로 두는 한
여러분들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유신견을 가진 이상
사악도에 떨어지는 비참한 운명을 계속 맞이해야합니다.
바로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런 유신견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족쇄를 푸는 것입니다.
그 유신견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바로 유신견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유신견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으로밖에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 마음을 보는 수행만이
유신견으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아셔야하겠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필요성을 오늘 다시 한 번 강조해드리는 바입니다.
다음은 모곡 사야도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궁극의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은 수다원의 도, 사다함의 도,
아니함의 도, 그리고 아라한의 도를 거쳐야합니다.
첫째 단계인 수다원의 도를 얻기 위해서는 사견과 의심을 제거해야합니다.
바로 이 사견이 지금 말씀드린 유신견, 상견, 단견,
그리고 원인과 결과가 없다는 무인견입니다.
또 여기서 말씀드린 의심이란 불법승 삼보에 대한 의심입니다.
이 사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하는데,
부처님께서 실천하신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해서 의심을 한다면,
사견은 제거될 수 없습니다.
상좌불교의 칠론 중의 하나인 분별론의 주석서
삼모하위노다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행동하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분별하지 않고, 마음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심념처가 청정에 일는 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이야기 하면,
사견을 가진 사람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길이 청정의 길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청정이란 말고 깨끗하다는 말이지만,
사실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감각대상을 감각기관이 있는 그대로 보아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없이 깨끗하고 계행이 조촐한 것을 청정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사견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지적으로 무딘 자가
도를 성취하는 데는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은 심념처가 작합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다는 것은
화가 났을 때는 화난 마음이 있네!
욕심을 부렸을 때는 지금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있네!
미워할 때는 지금 내 마음이 미워하고 있네!
있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등의 복잡할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다고 하지만
이것이 사실 쉬운 방법은 아닙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보이지 않고 실체가 없기 때문에
사실 알아차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집중력을 키운 뒤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또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바르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모곡 사야도께서는 실질적인 수행법을 원하는 요즘 사람들이
보다 쉽게 접근하고 적용할 수 있기 위해서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방법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13가지 종류의 마음은 모두 마음으로,
이것들이 모두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이들 13가지 마음 모두를 동시에 알아차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순간에 하나의 마음만 일어나는데
어떤 마음이거나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은 반드시 한 순간에 하나의 마음만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겠습니다.
이 마음이 소멸하고 저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은 하나의 마음이 사라지자 또 하나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은 매순간 빠르게 흐르고, 그것을 찰나생 찰나멸이라고 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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