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노력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얻는 것도 노력을 해야만 되고
포기하는 것도 노력을 해야만 됩니다.
노력은 먼저 마음의 노력이 있어야하고
다음으로 몸의 노력이 따라야합니다.
마음의 노력만 있으면 생각에 그치므로
몸의 노력이 함께해야 완전한 노력이 됩니다.
마음의 노력과 몸의 노력을 함께 실천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노력을 하려면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야합니다.
이러한 의도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이 없으면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게으름은 어리석음으로부터 옵니다.
결국 어리석으면 노력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윤회하는 모든 행위의 근본원인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모곡 사야도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의식은 매순간 하나씩 일어나기 때문에
어떤 의식이 일어나든 그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려야만 합니다.
의식이 두 가지 내지 세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불가능합니다.
수행의 과정에서 통찰력이 점점 명확해질수록 알아차림은 일어남과 사라짐에만 집중됩니다.
또한 일어남과 사라짐의 의식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빈도가 줄어들고
알아차리는 시간도 점차 길어집니다.
일반적으로 이 시점에서 수행자는 통찰력을 가지고
탐욕, 성냄, 어리석음, 탐욕 없음, 성냄 없음 등의
어떤 마음이 일어났다가 스스로 사라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압니다.
수행자는 이제 어떤 의식도 연속하는 두 순간에
동일하게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의식의 수명은 하나 내지는 두 순간입니다.
의식의 수명이 하나 내지는 두 순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의식은 한 순간에 하나밖에 없지만 두 순간을 포함해서
하나의 순간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식의 수명이 하나 내지는 두 순간이라는 것은
한 순간에 일어나서 사라지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의식은 한 순간에 하나만 존재합니다.
이 한 순간은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매우 빠른 순간입니다.
그래서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경전과 수행을 통하여 마음이 한 순간에 하나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의 수명이 하나 내지 두 순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은 태어남이라는 시작이 있고 태어났으면 소멸하는 사라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남이라는 또 한순간의 마음과 사라짐이라는 또 한 순간의 마음이 있어
기본적으로 하나의 마음이 완성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초기 부파불교에서는 한 순간의 마음을 하나 내지 둘이라고 하지 않고,
발생, 지속, 소멸로 분류하기도 하기도 하였습니다.
설일체유부라는 부파불교에서는 이것을 발생, 유지 쇠퇴 소멸의
네 순간으로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식은 하나이고 한 순간에 하나밖에 없지만
일어났다 사라지는 두 가지 순간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의식의 수명이 하나 내지는 두 순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마음이 소멸하고 저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는 이미 사라진 하나의 마음 뒤에 또 새로운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음을 알아차렸을 때
자신이 주시하는 마음이 이미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발견해야합니다.
마음이 소멸하는 것은 사실 알기가 어렵습니다.
사라져서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사실은 소멸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보려고 할 때 아무 것도 없으면 이미 있던 마음은 소멸한 것입니다.
그렇게 소멸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은 워낙 빠르기 때문에 소멸하는 그 끝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렸을 때 아무 것도 없는 그 상태를 아는 것이
있는 마음이 소멸한 것으로 이해하셔야 되겠습니다.
사라진 후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상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일어나자마자 즉시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무상합니다.
수행자가 어떤 마음을 알아차리든 그는 오직 무상, 즉 마음의 사라짐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마음의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무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수행자는 아직 마음이 항상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계속하여 오온의 본성인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이 말은 무상을 알기 위해서 변화하는 과정을 보라는 뜻이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워낙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그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대상이 변화하는 것을 보면 됩니다.
느낌도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바로 그 느낌을 통해서 그것을 보는 마음도 함께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유추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추론적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의 과정에서 우선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을 압니다.
그리고 무상함으로써 괴로움이 온다는 것을 압니다.
이 괴로움을 해결할 길이 없어서 무아를 알게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통찰력을 가지고 무상을 보고 깨달으면
이제 고(苦)라고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어 위빠사나 통찰로 고를 보고 깨달으면 이제 무아라고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점진적으로 지혜가 성숙되어서 최종적으로 무아를 알았을 때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열반에 이르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마음을 보아서 생긴 지혜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러분들이 무상, 무상하고 아무리 읊어보았자 무상을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무상은 언어로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적 수행을 통해서 오는 통찰지혜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매 순간 수행자는 자신의 오온이 항상 보여주고 드러내고 있는 무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무상은 어디에 있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의 느낌들이 매순간 변하는 것들이 바로 무상입니다.
이러한 무상을 소리 내어 암송하거나 기도문처럼 읽어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법인 무상이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온은 일어날 뿐만 아니라 항상 사라집니다.
수행자는 이것을 오로지 위빠사나 통찰을 통해서만 알 수가 있습니다.
무상을 관념으로 보지 말고, 무상을 다른 데서 찾지 말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실재하는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오른발 왼발을 봐야, 호흡의 일어남 꺼짐을 보아야 무상인지 모릅니다.
먼저 대상에 집중한 뒤에 고요함이 온 뒤에 지혜가 나서
그때서야 비로소 무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고요함이란 조건이 성숙되지 않으면 무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이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그것들의 느낌을 보기 시작해야합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마음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마음의 길이라고 불리는데
이 길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렇듯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특성을 가진 오온을 바르게 아는 지혜를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라고 합니다.
이 지혜는 우리의 존재 안에서 실재하는 것은
오온의 일어나고 사라짐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실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떤 선입관 없이, 고정관념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실지견,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의 진정한 진리는
그 대상이 오직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변한다는 것, 바로 무상입니다.
그리고 변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 고(苦)입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해결할 수가 없어서 바로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느낌들이
모두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무상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온의 무상, 고, 무아는 오온의 실재에 관한 지혜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순간들은 너무도 빠르게 한 순간에 흘러가기 때문에
명확히 표현할 수가 없고,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그것이 얼마나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혹은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하는지, 자세하게 알 필요는 없습니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한 순간에 머무는 속도는 빛이 머무는 속도의 백만분의 일보다 더 낮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빠르기를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부처님께서 혜안으로 밝히신 이런 말씀을 신뢰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이 매순간 빠르게 변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마음의 무상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물질이 한 번 변할 때 마음은 그 한 순간에 17번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이처럼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을 우리는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통해서 그 마음의 빠르기를 가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시 주인 의식으로 돌아가 보시죠.
수행자는 반드시 들숨과 날숨의 의식을 주의해서 알아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수행자는 반드시 들숨과 날숨의 의식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주의해서 알아차려야만 합니다.
이는 단순히 호흡을 보는 것만이 아니고 호흡의 생멸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들숨과 날숨인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수행자들이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
호흡을 주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호흡은 주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은 호흡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에서 가장 두드러져서 보기가 쉬운 것이라서
누구나 주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주인 의식이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아라한들도 역대 모든 성자들도 벽지불들도
모두 처음에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호흡을 주 대상으로 삼아서 수행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호흡을 주 대상으로 하고 이 주 대상인 호흡에서도
호흡을 아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
호흡을 아는 그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마음을 보아야 되는 이유, 그 뿌리를 보아야 되는 이유가
바로 그 자체가 무상의 진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들숨의 의식을 알아차리면 그것 역시도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날숨의 의식을 알아차려도 그것은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할 뿐입니다.
이미 사라져버린 의식을 무상이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에 뒤따르는 의식, 즉 먼저 있던 의식이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의식을
바로 위빠사나의 도라고 부릅니다.
이렇습니다. 모든 것들은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 일어나고 사라진 현상 그 자체가 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상을 모릅니다.
그것들은 실재하는 성품인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가지고 있지만
지혜가 없기 때문에 일어나고 사라진 현상이 무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때 일어나고 사라진 현상이 바로 무상이라고 아는 것을 위빠사나의 도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수행을 하는 시간 내내 수행자는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고
또한 그것들의 무상함을 지각하는 알아차림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의 마음속에는 오직 무상과 도,
이 두 가지만 가지고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관념적 대상의 고요함이 있고, 그것을 아는 마음은 사마타 수행의 도입니다.
실재하는 대상의 무상이 있고, 그것을 아는 마음이 바로 위빠사나의 도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해서 집중력이 생기면 오직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게 되고,
이렇게 알아차리면 다음 단계로 무상 고 무아를 아는 마음과 위빠사나의 도
두 가지만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몸과 마음을 통해서 그것들이 늘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이 있다는 것을.
그러나 이렇게 알기 까지는 무상한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항상하다, 영원하다, 변하지 않는다고 알았습니다.
이제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로서 그것들이 무상하다고 알았다면
원래 모르는 무상이 발견된 것이고,
무상을 안 위빠사나의 도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무상과 위빠사나의 도,
무상과 위빠사나의 도 이 두 가지만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있는 무상을 알아차린 것이 바로 위빠사나의 도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입니다.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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