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붓다의수행법·위빠사나·묘원법사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93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1:08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것이 좋아하는 일이던 좋아하지 않는 일이던

알아차려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고 있는 일이 가시적으로 성과가 있어 보이던 보이지 않던 간에

알아차려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좋은 것만 받아들이고 싫어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정한 관용이 아닙니다.

무엇이나 알아차려서 받아들이는 것만이 수행자의 참다운 모습입니다.

받아들이면 불선심이 선심이 되고, 불선업이 선업이 됩니다.

 

좋아하는 것만 하려고 한다면 어린아이의 정신 수준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던 싫던, 무엇이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모곡사야도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계속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만 있습니다.

마음이 한순간에 하나만 있다고 알아야 무상, 고, 무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마음의 종류는 매우 많습니다.

아마도 1,000가지, 2,000가지의 많은 마음들이 있을 것입니다.

 

주석서에서는 마음의 종류를 89~121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곡사야도’께서는 마음을 13가지 종류로 분류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부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서는

알아차릴 마음을 16가지로 분류한 것과는 약간 다릅니다.

그러면 ‘모곡사야도’께서 분류하신 13가지의 마음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외부에서 방문한 의식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의 의식, 혀의 의식, 몸의 의식입니다.

이것들을 외부에서 방문한 의식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눈이 대상을 볼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

귀가 소리를 들을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

코가 냄새를 맡을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

혀가 맛을 볼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

몸이 부딪혀서 의식이 일어날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

이것들을 모두 외부에서 방문한 의식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내부에서 방문한 의식입니다.

탐욕이 있는 마음, 성냄이 있는 마음,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

탐욕이 없는 마음, 성냄이 없는 마음, 의(意), 혹은 의식(意識)입니다.

 

여기서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방문한 의식이 아니고

내부에서 일어난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냄이 있는 마음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일어나지 않고

내부에서 일어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다섯 가지 마음이 일어날 때는

외부에서 방문한 의식이라고 알아차리고,

지금 말씀드린 여섯 가지 마음이 일어날 때는

내부에서 방문한 마음이라고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주인의식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주인의식이라는 것은 들숨의 의식과 날숨의 의식입니다.

이때 주인의식이라는 것은 수행자가 알아차려야 할, 주 대상을 말합니다.

이때 들숨의 의식은 호흡의 들숨과 날숨을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 13가지의 마음을 ‘모곡사야도’께서는 정하셨습니다.

 

마음의 종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혼란을 겪을 것은 없습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만 일어나기 때문에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마음의 종류가 많은 것 때문에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눈으로 볼 때 아는 마음이 감각기관이나 감각대상에 붙지 않고

그것을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 번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본다는 사실은 눈이라는 감각기관과 보여 지는 감각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성숙되어서 보는 마음이 성립이 됩니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말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감각기관에 마음을 보내지 않고, 감각대상에 마음을 보내지 않고,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에 부딪혀서 일어나는 그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눈이 대상을 볼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1차적 현상에,

2차적으로 그것을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린다는 그런 의미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이상 13가지의 마음의 범주 안에 보통 사람들이 가진 모든 마음들이 다 포함됩니다.

어떠한 마음이 일어나든 간에 그것은 감각대상과 감각기관이 부딪혀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들 6문을 통해서만 의식이 일어날 수 있으며,

마음은 6문을 벗어나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저 홀로 일어날 수 없고, 물질적인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는 정신적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아니고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 때 유체이탈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은 죽기 전에 몸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울러 감각기관인 6문에 여섯 가지 대상이 부딪혀서

여섯 가지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18계(界)라고 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아닌 것은 불교에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한 인간의 번뇌를 해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오직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봅니다.

 

또한 마음과 느낌과 지각과 마음의 의도 등 동시에 일어나는 구생법(俱生法)이 있습니다.

이 구생법은 함께 일어나서 함께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느낌과 지각과 마음의 의도는 마음의 작용으로 분류합니다.

바꿔 말하면 식(識)은 아는 마음이고 ‘수, 상, 행’은 마음의 작용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상 네 가지의 정신적 현상인 ‘수, 상, 행, 식’이 일어날 때 물질은 제외되지 않습니다.

오온은 함께 일어나고 함께 존재하며 함께 사라지는 법이므로

오온 중에 하나를 알아차리는 것은 나머지 오온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마음이 가장 뚜렷하고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인 ‘심념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면 오온 중에 호흡을 볼 때는 신념처 수행을 하는 것이지만

호흡을 보는 그 마음을 볼 때는 심념처 수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호흡은 몸에 있기 때문에 몸을 알아차리는 신념처 수행이고,

그것을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심념처 수행으로 바뀝니다.

 

심념처라고 해서 마음만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오온이 함께 작용하여 알아차리는 것인데,

그 중에서 마음에 대한 것을 두드러지게 알아차려서 바로 심념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한 존재를 이루는 오온은 상호 연관되어 있는데, 앞서 말씀드린 것들은

마치 라임주스에 설탕, 과일, 주스, 소금, 물이 원료로 들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때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도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들숨의 의식과 날숨의 의식이 심념처를 닦는 중에 주인의식으로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심념처에서나 신념처에서나 수념처가 배제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들 세 가지의 알아차림이 합쳐져 최종적으로

사성제의 진리를 알아차리는 법념처로 종결되어야 합니다.

 

오온이 함께 작용하듯이 사념처도 모두 함께 작용합니다.

그래서 오온이나 사념처는 모두 한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최종적으로 법념처로 종결된다는 것인데,

이 법념처는 처음에는 다섯 가지 장애인 5개(蓋)로부터 시작해서

다섯 가지 무더기인 5온,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6입,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인인 7각지, 고집멸도 4성제로써

이것들을 통틀어서 법념처라고 말합니다.

이때의 법은 알아차릴 대상으로써의 법과 진리로써의 법, 두 가지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모곡사야도’께서 말씀하신 13가지의 마음의 종류를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먹고 싶고, 냄새 맡고 싶어 하는 마음은 탐심에 속하고, 질투나 인색은 성냄에 속합니다.

보시를 하려는 마음은 탐욕이 없는 마음에 속합니다.

들뜨고 산만한 마음은 어리석은 마음에 속합니다.

 

어리석지 않은 마음인 지혜는 위의 13가지 마음 안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지 않은 마음은 왜 13가지 마음 안에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리석지 않은 마음이 정견이라는 도지,

즉 지혜인데 이것이 바로 알아차림의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13가지의 마음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앞서서 말한바와 같이 이들 마음은 한순간에 오직 하나씩만 일어납니다.

그래서 아무리 마음이 많아도 하나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보통 수행의 대상이 되는 마음이 너무 많아서 알아차리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수행자는 이때 마음이 매순간 오직 하나씩만 일어나는 점을 반드시 상기해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는지

다른 사람에게 쉽게 얘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탐심이 일어나면 탐심이 일어났다고 정확하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큰 어려움 없이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늘 말합니다.

‘나 기분 나빠, 나 기분 좋아.’ 이것들이 모두 느낌을 느끼는 마음들입니다.

 

바로 자기가 기분 좋은 것은 누구보다 먼저 자기 자신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기분이 나쁜 것은 누구보다도 먼저 자기가 알 수 있습니다.

 

이때 기분이 좋을 때 기분이 좋은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기분이 나쁠 때 기분이 나쁜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을 때 기분이 좋은 마음을 보지 못하면 더 많은 것을 집착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기분이 좋기 때문에 더 고통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분이 나쁠 때 기분이 나쁜 마음을 알아차리면 더 이상 기분이 나빠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분이 나쁜 마음을 알아차리는 새로운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뿌리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수행자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고 있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열반의 입구로 가는 바른 길로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해탈은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반에 이르기 전에 이런 과정을 거쳐서 먼저 몸의 느낌과 호흡이 사라지고,

그 뒤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서 마음이 사라진 상태가 바로 열반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눈을 뜨고 있을 때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눈의 의식이 일어난 것으로, 수행자는 이때 눈의 의식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소리를 들을 때는 귀의 의식이 일어나고, 이때 귀의 의식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냄새를 맡을 때는 코의 의식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맛을 볼 때도 혀의 의식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의 가려움이나 즐겁고 불쾌한 감각이 느껴질 때는 몸의 의식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섯 가지 감각기관 중에서 의(意)는 빼고 ‘안이비설신’이라는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부딪혔을 때 그것을 아는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대상이 무엇이라고 아는 1차적 알아차림이 있고,

2차적으로 알아차린 그 마음을 대상으로 보는 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알아차림 하나로써는 대상을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대상의 힘은 워낙 크기 때문에.

 

그렇지만 알아차린 1차적 현상들에 알아차린 그 마음을 보는 심념처 수행을 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빨리 대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힘을 키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이익입니다.

 

알아차림 하나만으로는 되지 않기 때문에

알아차리고 있는 그 마음을 다시 알아차려서

우리는 두 번, 세 번 대상과 아는 마음을 분리해서

청정하게 하는 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목표입니다.

 

바로 이러한 청정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계속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