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누구나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알며 모두 선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실행에 옮기지 못하며,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모릅니다.
선한 것을 아는 것은 생각이고, 선하게 사는 것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위빠사나 수행은 선(善)과 불선(不善)을 초월한 해탈의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은 변명이며,
아직 행복해 질 수 있는 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것입니다.
복을 빌거나 삿된 것에 매달려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습니다.
자신의 통찰지혜를 얻는 것에 매달리는 것이 가장 완전한 선택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부터 한국명상원에서 하고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 방법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수행자가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드리는 내용은 네 가지 대상중의 하나인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것입니다.
위빠사나는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사념처(四念處)수행이라서
네 가지를 고루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스승에 따라서 어느 하나의 염처(念處)를 집중적으로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더라도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 중에 나타나는 장애를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비로소 수행이 향상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일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뿌리를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수행에 대한 기록 중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기록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마음에 대한 분석은 논장에서 자세하게 밝혀져 있지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 방법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따금 마음에 대한 글이 있다고 해도 대체로 관념적인 내용들이 많으며
모두 마음을 분석하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실천적 수행 방법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위빠사나 수행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큰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스승이 많지 않아서
수행에 대한 기록 역시도 없는 실정입니다.
물론 마음을 알아차리는데 특별한 방법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마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수행을 하거나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수행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입문서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도제식으로 할 때는 입문서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현대인들에게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야 수행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음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달리 보이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추론적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은 사마타 수행과 달리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 하나면 됩니다.
하지만 초보자에게는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수행자들의 마음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인데
이 말은 매우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대상을 알아차릴 때
고정관념 없이 알아차리는 것을 말하며,
바라는 것 없이, 없애려는 마음 없이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대상은 반드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무상을 아는 것까지 포함해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까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기록도 없지만
마음을 알아차리는 스승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이 지난 뒤에 열반하신 미얀마의 ‘모곡’ 사야도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셨고 또 훌륭한 기록을 남기셨습니다.
모곡 사야도는 ‘레이디’ 사야도의 뒤를 이어 연기법을 펴시면서
특히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지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현재 모곡 사야도의 제자들에 의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계승되고 있습니다.
다른 또 한 분의 스승이 계신데, ‘마하시’ 사야도의 제자이신
쉐우민의 ‘우 꼬살라’ 사야도께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지도하셨습니다.
우 꼬살라 사야도께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기록이 없이 단지 가르침만 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자들이 글을 쓰기 위해서 수행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것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사안은 아닙니다.
모곡 사야도께서는 논장의 대가이시고, 특히 12연기에 대한 탁월한 법문으로
미얀마에서 훌륭한 스승으로 추앙받습니다.
모곡 사야도께서는 교학자이시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신 보기드믄 스승이십니다.
일반적으로 교학을 하면서 수행을 하기가 어려운데
사야도께서는 교학과 수행을 모두 하셨기 때문에 뛰어난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모곡 사야도께서 12연기와 함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지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연기(緣起)와 마음이 중요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12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유신견이 없어야 합니다.
유신견이란 내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정신과 물질이 원인과 결과로 진행되기 때문에 무아라는 사실을 알아야
연기의 고리가 끊어지고 해탈을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무아를 아는 것이고
무아를 알기 위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비로소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 유신견이 제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1996년에 쉐우민 사야도를 친견한 뒤에 그로부터 4년을 기다리다가
2000년에 쉐우민 명상원에 가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배웠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 뒤에 비로소 수행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번뇌로부터 벗어나는데
매우 신속하고 뛰어난 방법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심념처 수행에 대한 기록이 없고
단지 가르침만으로 지도 받으면서 수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답답하게 수행을 했고 제 자신이 겪은 오류도 많았습니다.
마음이란, 스승으로부터 아무리 가르침을 받아도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틈틈이 제 자신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기록을 하면서
체계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 2003년, 모곡사야도의 제자이신
미얀마의 쉐민모 선원의 ‘우 소바노’ 사야도에게서 12연기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12연기만 배운 것이 아니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도 함께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이때 그간 제가 해오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이론적인 기록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모곡 사야도의 기록을 처음 접하고 보니
그간 제가 쉐우민 우 꼬살라 사야도와 우 떼자니야 사야도로부터 배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바른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곡 사야도의 자세한 수행 방법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더 확신을 가지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정진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알면서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미세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가 하는 수행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확립할 수 있게 되니,
비로소 마음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모곡 사야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수행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도 얻었지만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 것이 더 큰 소득이었습니다.
현재 모곡 사야도의 가르침은 쉐민모의 우 소바노 사야도에 의해서 계승되고 있습니다.
쉐우민 사야도의 가르침은 제자이신 우 떼자니야 사야도에 의해서 계승되고 있습니다.
이미 두 분의 큰 스승께서 모두 열반하셨지만
제자들에 의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계승된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한정된 수행자에 의해서 계승된다는 것은
교학보다는 수행이 어렵고 다른 수행보다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쉐우민 사야도께서는 미얀마의 수행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지금 이 수행법을 이제 한국에서 다 가져가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수행을 열심히 해야 한다.‘라고 미얀마 제자들에게 독려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자긍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법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곤 했습니다.
모곡 사야도의 수행 방법과 쉐우민 사야도의 수행 방법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표현 방법과 접근 방법이 다를 뿐이지 마음을 알아차리는
실천적 방법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방법이나, 모곡 사야도의 방법이나, 쉐우민 사야도의 방법이나,
지금 여기서 제가 밝히는 한국명상원의 수행 방법도 큰 틀에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같고, 단지 접근하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쉐우민에서 몇 년 간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배우면서
틈틈이 이론을 정리하면서 수행을 했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스승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기록하고,
그리고 수행을 하면서 또 하나하나 질문을 하면서 체계적으로 정리해왔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정리한 내용으로
지금 한국 명상원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 방법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을 말할 때는 일반적으로 계보를 밝힙니다.
정신세계에서는 스승을 밝히지 않으면 믿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자신이 만든 수행은 그만큼 위험과 독소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검증된 수행, 그리고 수행에 대한 기록이 있는 수행,
그리고 직접 배우는 스승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종교가 진리인지 비밀이고,
수행자가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는지도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혹세무민하는 종교와 지도자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받기 마련입니다.
역사가 있는 종교라고 해서 모두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스승이 누구인지를 알아야하며 그 스승이 말씀하신 기록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짧은 이 인생을 살면서 바른 스승과 바른 수행법을 만나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인연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검증된 스승의 가르침은 받는다는 것은 수행자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시대나 스승의 가르침 없이 홀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스승이 없다.’는 말은 ‘내가 하는 수행은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독선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도 모르고 말하거나
더구나 장애가 생겼을 때 알맞게 대처할 수도 없습니다.
책은 관념이라서 통찰지혜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마음에 대한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정신세계에서는 모르면서도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이 큰 허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의 쉐우민 사야도께서는 잘못된 질문에는 침묵으로 답변하시곤 했습니다.
잘못된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바르게 말을 해주어도 왜곡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서 밝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 방법을 쉐우민 방식이라고 하지 않고
한국 명상원 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저의 스승이신 쉐우민 사야도께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제가 밝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모두 쉐우민에서 배운 것을
제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모든 수행자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데
유익한 길잡이가 되도록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나, 모곡 사야도께서나, 쉐우민 사야도께서 모두 열반하셨지만
그 분들의 훌륭한 가르침은 지금 여기에 남아서
우리들의 마음에 새롭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접하기 어려운 마음에 대한 것을 받아들이시어
수행의 밑거름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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