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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96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1:1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누구나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허물 중에서 내가 있다고 하는 견해가 가장 큰 허물입니다.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면 자존심이 눈을 멀게 하여

잘못을 저지르고도 용서를 빌 줄 모릅니다.

 

자아가 강하면 진실을 외면하고

남에 대해서도 가혹한 결정을 내립니다.

가장 큰 허물인데도

허물인 줄을 모르는 것이 무지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성스러운 자의 제자들은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항상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을 지속하여 마음은 변하고 일시적이며

연속하는 두 순간에 동일하게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통찰합니다.

 

그리고 성스러운 자의 제자들은 어떠한 번뇌도 없이

모든 불결한 번뇌의 흐름에서 해방되어

오로지 무상의 지혜로 가득 차 바로 이번 생에서 열반을 실현합니다.

 

먼저 있던 무상과 따라오는 도 사이에 어떤 불결한 번뇌도 없으면 7일 이내에

궁극의 깨달음인 아라한의 도를 얻을 수 있다고 경전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주일이면 아라한의 도를 얻을 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대상과 아는 마음을 밀착시켜서 일주일 동안만 계속한다면

바로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동안 어떠한 번뇌도 스며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마음이 일어날 지라도 항상 법이 보여주는 그대로,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지혜로 통찰해서 집중을 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통찰을 얻은 것은 곧 생멸을 아는 것으로

이는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실지견입니다.

 

그냥 대상을 단순하게 보는 것이 여실지견이 아니고

바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무상을 보는 것이 여실지견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오온을 있는 그대로 실상을 보게 되며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이 곧 괴로움의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상을 알면 괴로움의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란 단순하게 대상을 지켜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인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을 볼 때라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관한 지혜를 얻은 수행자들에게 과연 어떤 이익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답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탐심이 일어났을 때 위빠사나 수행자가 탐심을 알아차리면

더 이상 그 탐심은 자라지 못하고

탐심이 단순한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일 뿐이라고 알게 됩니다.

따라서 이때 연기의 과정이 중간에서 멈추게 됩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탐심이 소멸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탐심에 대한 아무런 알아차림이 없다면

그 뒤를 따라 집착이, 그 뒤에 업의 생성이 피할 수 없이 따라옵니다.

또한 업의 생성이 일어나면 반드시 태어남이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태어남을 얻은 것은 괴로움을 얻는 것이고

결국 이로써 연기의 바퀴에 갇히고 마는 것입니다.

윤회의 순환은 계속되어 재생의 굴레를 끝없이 돌리도록 만듭니다.

 

일어남과 사라짐, 즉 무상을 보는 수행을 하는 것은

재생의 굴레를 멈추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의 바퀴살을 부서뜨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또한 연기의 연결고리들을 잘라 부수는 일입니다.

 

또한 이처럼 생멸을 보는 수행은 무명을 종식시키고

통찰지혜를 얻으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결국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괴로움의 진리일 뿐이라는 사실을

위빠사나의 통찰지혜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렇게 꿰뚫는 통찰을 하게 되면 지혜가 나타나고 무명이 사라집니다.

초전법륜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일어났다. 지혜가 일어났다.

통찰지가 일어났다. 영지가 일어났다. 광명이 일어났다.’

이 말씀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것에 대한 선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선언이 있은 뒤에 전법을 시작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본인이 깨달은 것을 이 세상에 드러내시고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이렇게 선언하고 포교를 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괴로움의 진리에 대해서 꿰뚫는 통찰을 얻게 되면 무명은 지혜가 됩니다.

따라서 무명은 사라지고 지혜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눈이 일어났다, 지혜가 일어났다, 통찰지가 일어났다,

영지가 일어났다, 광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모두 지혜입니다.

그 지혜를 다양하게 표현한 것들입니다.

 

연기법에 따르면 무명이 지혜가 될 때

행은 더 이상 식으로 연결되는 힘을 갖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은 이들 수십만 가운데서 고귀한 존재들의 길을 획득한

단 한 사람도 찾기가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태어났으면 죽고 다시 태어남을 되풀이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선한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어렵고,

윤회를 끊는 일이란 더욱 희귀한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연기가 시작에서부터 끊어지는 것입니다.

연기가 연결된다는 것은 이후 존재인 새로운 오온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함으로써 태어남의 토대가 되는 기능들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무명이 지혜가 되는 순간부터 멈추게 됩니다.

따라서 연기의 고리가 시작에서부터 끊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움뿐인 오온을 만들게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견이 제거되면 그 결과로써 나타나는 모든 오온이 모두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심이 제거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의심으로 인해 일어난 모든 오온이 멈추게 될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한 단계, 한 단계 다른 번뇌나 잠재적 성향으로 인한 결과로

나타나는 모든 오온이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

자비심으로 여러분들에게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라고 권유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을 모르면 결코 도과를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알아차려서 그 마음이 변하는 무상을 봐야 합니다.

수행자가 오온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지혜를 얻게 되면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쉼 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오온의 본성에 대해 혐오감을 느낄 때

이러한 지혜를 혐오의 지혜라고 합니다.

 

수행자가 이러한 지혜를 얻은 이후에 꾸준히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해서 알아차리면

결국 그의 수행은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끝을 보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도의 지혜입니다.

 

이들 세단계의 지혜를 얻음으로써 그는 큰 수다원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도의 지혜로 인해서 열반에 들어서 과의 지혜를 성취하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혐오의 지혜에 대해서 잠시 살펴봐야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도과에 이르는 지혜의 단계를 빨리어 경전에서는 10단계로 나눕니다.

그러나 조금 더 상세하게 나눌 때는 16단계의 지혜로 분류합니다.

 

이때 혐오의 지혜는 8단계에 속합니다.

16단계 지혜 중에서 5단계 소멸의 지혜가 성숙되면

6단계 두려움의 지혜와 7단계 고난의 지혜와 8단계 혐오의 지혜로 성숙됩니다.

 

혐오의 지혜는 싫어하게 되는 지혜로 정신적,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고 기댈 것도 없고 진저리가 나는 것일 뿐이라고 보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행복하지 않고 수행에 대한 열의가 식어지고 알아차림이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나 천상이나 그 어느 세계도 좋게 보이지 않고 혐오감만 갖게 됩니다.

 

이러한 지혜의 단계는 위빠사나 수행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단계에 이르러 혐오감이 일어나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다음 단계의 지혜로 성숙되어야 합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한 성자는

우주의 제왕이나 천계의 전륜성왕보다도 더 높은 지혜를 얻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자란 사악도로부터 벗어난 자라고 하셨습니다.

즉, 수다원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성자란 6가지 극악한 죄를 행하지 않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수다원은 나병환자,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 혹은 불구자로 태어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길어도 일곱 생 안에 아라한이 되어 궁극의 열반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연기법에 의하면 수행자가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고

그 일어남과 사라짐이 괴로운 것이라고 알면

그러한 지혜가 바로 지혜의 도에 이르는 것으로

이것은 연기가 시작에서부터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위빠사나의 도로서 12연기가 중간에서, 끝에서, 시작에서부터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써 갈애와 교만, 사견이 제거됩니다.

따라서 연기는 중간에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괴로움과 근심, 고뇌가 일어날 때마다 기회는 사라집니다.

이렇게 되면 12연기가 끝에서 끊어집니다.

 

그러므로 연기는 시작에서 끊어질 수 있고, 중간에서 끊어질 수 있고,

끝에서 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성제에 의하면 일어남과 사라짐은 괴로움의 진리이며 이로 인해서 일어난 지혜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게 하는 길에 대한 진리입니다.

갈애와 교만, 사견이 소멸되는 것은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진리가 멈추는 것으로

생과 노사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에 해당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려서 그 마음이 무상이라는 것을 알고

무상 뒤에 오는 괴로움을 통해서 무아를 알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아서 집착을 일으키지 않고

업의 생성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게 됩니다.

이 느낌이 소멸하면 연기가 회전하지 않아서 비로소 그 위대한 해탈의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해탈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알아차림이고, 2차로 알아차림을 하는

그 마음을 보는 심념처 수행을 하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바른 길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바로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아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고

그 집착을 일으키지 않음으로써 받을 것이 없어서 윤회를 끊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대상을 알아차려야 하고 알아차린 그 마음을 다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알아차림은 사성제를 모두 포함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시라도 빨리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만일 수행자가 단 하루라도 수행을 늦춘다면 그는 하루만큼의 기회를 잃는 것으로

언제 어떤 곤란이 일어나서 죽음에 닥칠지 모르는 것입니다.

더욱이 과중한 압박을 받는 시대인 요즘 어떤 위험과 질병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다음 생에 사악도로 떨어질 잠재적 위험을 막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얻는 이익이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도과를 성취하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되어서 그 오랜 괴로움의 여정을 끝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오늘 수행을 해야 되는 이유는 다시 한 번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자신만의 행복이 아니고 스스로 얻은 행복을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행복과 더불어 남의 행복까지 배려하는

그러한 아름다운 마음을 갖는 것이 수행입니다.

 

오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고양시키고

그리고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탐욕이 있을 때는 단지 탐욕이 있는 마음을 지켜봐야 합니다.

그러면 된 것입니다.

성냄이 있을 때는 화를 내고 있는 마음을 지켜보면 됩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어리석은 마음이 있을 때는 지금 단지 어리석은 마음이 있네, 라고 알아차리는 것 외에

또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바로 일어난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서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 늦기 전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셔서

바로 무상을 알고, 고를 알고, 무아를 알아서

고통뿐인 이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