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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95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1:1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당신이 최고요.’ 라고 말한다면

이때의 반응은 자신이 최고라는 우월감을 가질 수도 있고,

그냥 의례적인 소리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최고라면 자신이 최고라는 자만에 빠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최고라고 한다면,

최상의 정신적 상태가 있어도 최고가 된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최고라고 할 때 유신견을 가진 것입니다.

 

그때 만약 최고의 상태였다면

단지 그것은 자아를 가진 상태가 아니고 그 순간의 정신적 상태가 최고일 뿐이지

최고를 가진 자는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모곡사야도’께서 말씀하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외부와 내부에서 방문하는 의식은 이들이 때때로 나타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빨리어 경전에 따르면

‘비구들이여! 이처럼 빛과 같이 빠른 마음은

번뇌라고 하는 손님에 의해서 더렵혀진다.’ 라고 했습니다.

 

즉 때때로 일어나는 생각들은 손님입니다.

손님은 주인이 아니라서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따금씩 일어나기 때문에 손님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할 때 번뇌가 찾아온 것을 손님이라고 보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손님을 손님으로 맞이하는 순간,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 나타난 모든 대상을 손님이라고 보는 부처님의 견해가 매우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다섯 가지 장애입니다.

 

감각적 욕망, 악한 의도, 이런 것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이 손님이 온 것으로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손님이라는 의식은 그것이 맞이해야 될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손님을 우리가 내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이 나타나던지 그것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일러, 손님이라고 여기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면서 나타난 모든 대상은 손님입니다.

통증, 졸음, 망상, 여러 가지 형태의 고통스러운 것들도

단지, 와서 보라고 손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들은 와서 보아달라고 나타난 것이지

없애달라고, 다른 것으로 바꾸어 달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와서 보라고 나타난 대상을,

와서 보라고 나타난 손님을 손님으로 맞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상으로 맞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심념처는 언제, 그리고 어디서 수행을 해야 하는가요?

명상원에서만 수행을 해야 하는가요?

답은, 마음이 일어나는 곳에서 어디서나 수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걷는 중에 마음이 일어난다면 걷는 동안 수행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걷는 동안 각각의 발걸음마다 제 각기 다른 의식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사라진다는 사실 또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수행은 특별한 장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눈을 떠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든 행위를 하는 동안 그 행위를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이 있고,

알아차리고 있는 그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있습니다.

 

자신이 먹고 마시는 중에 이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면

바로 그 순간에 그 자리에서 그것에 대한 알아차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동안 현재를 아는 마음이 일어나면

또한 그 순간에 그 자리에서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특징은, 현재 있는 실재하는 것을

현재 그 순간에, 그 장소에서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고

이렇게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찰나 집중이 되어서 지혜가 납니다.

알아차림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알아차림과 함께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네 가지 분명한 앎은 바른 행동과 바른 마음을 갖는 것으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분명한 앎은, 이익이 있는지, 시기나 상황이 적절한지, 바른 대상인지, 어리석지 않은지를

능동적으로 용의주도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면 이렇게 대상을 관통하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이때 수행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주의 깊은 알아차림과

이해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주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과 함께 알아차린 그 마음을 보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다 밀착하여 주의 깊게 알아차릴수록

수행자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더욱 큽니다.

 

산만함과 불안 그리고 혼란함이 많으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가 머물러서 자리를 잡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도 수행자가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해서 지켜보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의 이익을 위해 분명하게 설명하자면,

이미 사라져 버린 먼저 있던 마음은 무상이고,

다음에 따라오는 마음은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도(道)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무상에 이어 도(道)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라지는 마음은 변화하며

연속하는 두 순간에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무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라진 마음 뒤에 따라오는 도의 마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뒤에 따라오는 마음은 위빠사나의 정견, 즉 위빠사나의 도입니다.

따라서 무상과 도(道), 무상과 도(道), 이렇게 반복되는 연속하는 현상들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현상은 하나같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 중에 마음이 일어나서 사라진 것은 무상이고

다시 이것을 아는 마음이 바로 도(道)입니다.

 

그러므로 일어나서 사라진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무상과 도(道)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궁극적으로 이것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도(道)에 의해 열반이라는 과(果)를 얻습니다.

 

중요한 점은 위빠사나 수행 중에 먼저 있는 무상과 다음에 따라오는 도(道)가 동시에

연속적으로 계속되어 무상과 도(道) 사이에 번뇌가 스며들 여지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사라진 마음을 놓치지 않고 즉시 알아차려서,

먼저 있던 마음이 이미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그것이 무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또한 다음에 즉시 따라오는 마음을 도(道)라고 하는 이유는,

먼저 있던 마음이 이미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매우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라지고 없는 것을 아는 것이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지혜가 난다는 사실은 장작을 비벼서 불이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순간은 매우 빠르게 분명하게 정확하게 일어납니다.

이때는 알아차림의 느슨한 틈이 없어야 합니다.

 

가령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뒤따라가서 본다면,

일어나고 사라진 현상을 그 즉시 알아차리지 않고 조금 차이를 두어서 본다면,

그 순간 마음에 번뇌가 들어옵니다.

그러면 지혜가 성숙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은 현장성, 일치성, 즉시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따라가면서 보아서는 안 되고, 일어난 즉시, 일어난 순간에 일어남과 함께

그것을 알아차려야, 그때 지혜가 열려서 위빠사나의 도가 성숙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상과 아는 마음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틈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틈을 두면 번뇌가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번뇌로 인해서 지혜가 성숙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얻는 도의 현상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동안 수행자에게 적절하거나 부적절한,

혹은 바람직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온갖 종류의 마음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들 또한 수행의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는 어쨌거나 이러한 마음의 흐트러짐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이들을 단지 수행의 대상으로 여겨야만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 법문을 듣는 여러분들은 이 법문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냥 아는 마음으로 들으셔야 합니다.

마음에 대한 이러한 법문을 들을 기회는 많지가 않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마음을 봅니다.

일어난 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을 볼 때 어느 경우에는 추악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됩니다.

 

이때 그 추악한 것이 나의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유신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추악한 것을 본 그 마음을 보지 않고,

‘추악한 것을 보았다.’라고 나의 마음으로 생각하면 이미 일어난 지혜가 소멸되고

과거로 회귀해 버립니다.

 

수행자 여러분!

추악한 마음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본 마음이 새로 일어난 것은 매우 청정한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마음을 본 청정한 마음은 보지 않고

과거에 있었던, 조금 전에 있었던 추악한 마음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우리는 위빠사나의 도를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때 그 추악한 마음도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현상을 본다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의 도입니다.

그리고 추악한 마음이 무상하다고 알고 그 무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무상을 알고 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타난 대상을 대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즉, 유신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의 소유로 해서 즉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모든 현상은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그것은 나의 마음이 아닙니다.

 

왜 그것들을 기억해서 나의 마음으로 가지고 고민해야 합니까?

이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이미 지나간 것은 과거이고,

그것을 일으킨 마음이나 그것을 아는 마음이나

모두 아는 순간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느 것도 현재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입니다.

 

이 무상을 아는 것이 위빠사나의 도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무상과 도 밖에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법의 여섯 가지 덕목 중에서 ‘와서 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빨리어로 ‘에히빠시꼬’라고 합니다.

법은 모든 이들이 와서 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법은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인 무상의 법이 쉴 새 없이 계속되는 것을

알아차려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의 여섯 가지 덕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잘 설해져 있습니다.

둘째, 지금 이곳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시간을 지체하지 않습니다.

넷째, 와서 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열반으로 이끌어 줍니다.

여섯째, 현명한 사람에 의해 직접적으로 체험됩니다.

이상이 여섯 가지 법의 덕목입니다.

 

여기서 나타난 모든 법들은 와서 보라고 나타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법은 왜 나타나는가요?

대상은 왜 생겼습니까?

 

그렇습니다.

법은 와서 보라고 나타났습니다.

대상은 와서 보라고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타난 법을 보지 않고

그 법을 없애려거나 화를 내고 욕심을 부립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는 ‘법을 법답게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현상이나 어떤 괴로운 현상, 어떤 즐거운 현상이나

그것들은 모두 나타난 대상이고,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고정관념, 선입관, 유신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그것들이 봐달라고 하는 그대로의 상태를 보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본다는 사실은,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있다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동안 알아차림을 놓치는 순간이 거의 없으면

이제 수행자가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일어남과 사라짐 사이에

어떤 불결한 번뇌도 들어오지 않는 단계가 따라오게 됩니다.

 

이제 수행자는 번뇌의 족쇄가 산산이 부서진 단계에 이르게 되어

첫 번째 도인 수다원의 도를 성취할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여기 이 교단의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이 무상한 것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그는 무상을 인식하고 무상을 경험하면서 항상 마음으로 해탈하고 통찰지로 직관하다.

그는 번뇌가 다하여 더 이상 번뇌가 없고 마음을 통한 해탈과 통찰지를 통한 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얻으며 지낸다.’

이상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이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대상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그 맞이한 대상의 실재 성품은 모두

변한다는 것이고, 괴롭다는 것이고, 자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의 실재하는 성품을, 와서 보라고 나타난 현상을,

우리는 항상 있는 그대로의 법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법을 법답게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