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자는 오직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을 할 때 원인을 알려고 하거나 좋거나 싫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수행에서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가 자기가 판단을 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판단은 자기 몫이 아니고 스승의 몫입니다.
정신세계의 판단은 경험자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수행자의 지혜는 알아차린 결과로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생각으로 판단한 것과 지혜로 아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수행은 알아차림의 지속이 필요한데 중간에 결론을 내리면
알아차림이 지속되지 않고 생각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의무는 알아차리는 것이고
알아차린 결과로 나타나는 지혜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조건이 성숙되어서 나타난 것이라고 아셔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마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수많은 지류를 흐르는 마음은 잠시도 자기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저 조건에 의해서 흐르기만 합니다.
흐르는 물이 자기를 돌아보기 어렵듯이
사람도 흐르는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이끄는 마음이 이제 이끌기만 하는 역할만 할 것이 아니고
이끌고 있는 그 자체를 돌보는 것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흐르는 마음은 감각적 욕망의 거친 물살이 되어 알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동안을 흘러갑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감각적 욕망의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욕망의 지배를 받고 사는데 부처님께서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에 알아차림을 두고
욕망의 물이 흐르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을 하기 위해서 먼저 대상을 알아차리고
다시 알아차리는 그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추론입니다.
그래서 추론을 통찰지혜로 뚫어 본 사람들의 견해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견해 차이에서
스스로 알아차려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분명한 근거인
느낌과 지각과 의도를 통해서 마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기 위해서는 물질을 보는 시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추론적인 마음을 사실적인 물질을 보듯이 해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어떤 형상으로 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은 느낌으로 느끼거나 그냥 알아야 합니다.
초기의 수행자들은 대상을 눈으로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면 모양을 만듭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의 실재하는 느낌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릴 때도 모양으로 보려 해서는
결코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차츰 모양보다는 느낌을 알아차려야 하며,
나중에는 그냥 아는 마음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관문 중의 하나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릴 때 보이지 않는 마음을 모양으로 찾으려하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눈으로 보려고 하면 나중에는 머리가 아픕니다.
볼 수 없는 마음을 보기 위해 노력을 해도 볼 수도 없고 병까지 얻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눈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눈을 사용하면 형상을 만들기 때문에 물질적형상이 아닌 그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좌선을 할 때 눈을 감는 것은
모양을 보지 말고 느낌과 아는 마음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모양을 대상으로 하는 형상의 세계에서는 느낌과 마음을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눈으로 보지 않고 느끼거나 마음으로 알아야
관념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으로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명칭을 붙여서는 안 됩니다.
명칭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사마타 수행을 할 때는 명칭이 효과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명칭은 마음을 대상에 보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명확하게 드러나게 합니다.
처음에 수행을 할 때 명칭을 붙여서 대상을 붙잡는 수행을 할 필요도 있습니다.
명칭을 붙이는 것은 사마타 수행방법이지만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명칭을 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때는 명칭을 붙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명칭은 거친 대상입니다. 그리고 마음과 느낌은 미세한 대상입니다.
거친 대상이 가로막으면 미세한 대상들이 드러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초기에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에서는 명칭을 붙여서 대상을 겨냥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마음이나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때는 명칭을 붙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 먼저 대상이 있어야 하고,
다음에 마음을 대상에 보내는 알아차림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아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이렇게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반드시 3가지 조건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명칭을 붙이면 하나가 더 포함됩니다.
먼저 대상이 있어야 하고, 명칭을 붙이고, 이것을 알아차려야하고,
다음에 마음이 대상을 압니다.
이 과정에서 명칭이 하나가 더 붙기 때문에
네 가지 조건이 하나가 되어 형성되어야 합니다.
명칭이 대상을 겨냥하는 데는 좋은 효과가 있으나
미세한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장애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명칭을 붙이면 알아차림이 대상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고
명칭을 겨냥하기 때문에 실재하는 대상의 성품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가령 오른발, 왼발이라고 명칭을 붙이거나
일어남, 꺼짐이라고 호흡에 명칭을 붙일 때를 가정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면서 명칭을 붙이다보면 오른 발, 왼발을 알아차리거나,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의 실제를 알아차리지 않고 명칭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른 발을 알아차릴 때 왼발이라고 입으로 외울 수도 있으며,
왼발을 움직이는데 마음은 오른발이라고 외울 수도 있습니다.
호흡도 마찬가지입니다.
호흡이 일어나고 있는데 꺼짐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호흡이 꺼지는 순간에 일어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명칭과 알아차림이 정확하게 대상을 겨냥해야 하는데,
알아차림이 명칭을 보게 되면 보아야 할 대상을 겨냥하지 않고
그냥 입으로만 외우는 것입니다.
어떤 문장을 소리를 내서 독송하는 수행을 할 때는 상관이 없으나
몸과 마음의 변화를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는
이렇게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대상 따로, 명칭 따로, 아는 마음 따로 제각각 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관념적인 수행을 하는 것이라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명칭을 붙이면 마음과 느낌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분주해서 고요함이 깨집니다.
고요함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 대상인 마음과 느낌이 드러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이 드러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명칭을 붙이는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명칭을 떼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오래 동안 습관적으로 명칭을 붙여온 수행자의 경우에는 명칭을 붙이지 않기가 어렵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하고 있는 수행방법을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사수하려는 일반적 심리적 현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를 싫어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또한 명칭을 붙이지 않았을 때의 고요함을 모르기 때문에
붙이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지도 않습니다.
이때 수행자는 의식의 발상을 전환해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보려는 의도를 내야 합니다.
수행이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런 시도가 없으면 수행이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명칭을 붙이려 할 때는
명칭을 붙이려고 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명칭을 집착하기 때문에 붙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라서 바꾸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번 바뀌면 새로운 세계를 볼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일을 하기 때문에
이처럼 일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습니다.
그러면 명칭이 쉽게 떨어집니다.
또 이렇게 해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 있으며
수행의 이익도 함께 얻을 수 있습니다.
제가 미얀마에서 수행을 할 때 명칭을 붙이는 스승 밑에서 4년 동안 수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상에서나 좌선을 할 때나 경행을 할 때도 항상 명칭을 붙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볼 때도 봄, 봄이라고 했으며
먹을 때도 먹음, 먹음을 하고 먹었습니다.
좌선 중에 일어남, 꺼짐이라고 명칭을 붙였으며
경행을 할 때도 오른발, 왼발이라고 명칭을 붙였습니다.
이런 수행밖에 몰랐기 때문에 계속해서 명칭을 붙이는 수행을 했으며
나름대로의 수행을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4년이 되었을 때 장애가 생겨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수행이란 여러 가지의 장애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대한 장애도 있고, 수행자끼리의 장애도 있고,
또 여러 가지의 다른 장애도 많습니다.
새로운 정신세계를 간다는 것은 온통 장애를 딛고 넘어가야 하는 과정뿐입니다.
고귀한 진리가 그냥 길을 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길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자신의 축적된 성향입니다.
그러므로 습관과의 싸움이지만 자신의 마음을 오직 자신의 내면으로 돌리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주는 남을 미워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런저런 장애가 있기 마련입니다.
스승님은 이런 고통을 호소해도 그냥 알아차리라는 말뿐입니다.
지나고 보면 이 말이 옳지만 당하고 있는 입장에서 답답하기만 한 일입니다.
이런 장애 속에서 알아차리는 힘은 약하고 괴로움은 더 커져서
급기야는 소화를 하지 못해 얼굴이 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체력도 고갈되고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어서
수행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태까지 되었습니다.
이때 다른 명상원에서 온 한 수행자가 저에게 마음을 알아차려볼 것을 권했습니다.
딱히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도 모르고 그냥 막연하게 마음을 알아차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당장 정신적 안정을 얻게 되고 소화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있는 명상원에서는 몸을 위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곳이라서
마음을 집중적으로 지도하지 않았습니다.
효과를 본 저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더 잘하고 싶어서
스승님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거듭된 질문에도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스승께서는 알고도 답변을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명상원의 수행방법이 아니라서 답변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이 일을 계기로 오랫동안 수행을 했던 명상원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처로 갔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처에서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명칭을 붙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동적으로 붙는 명칭을 떼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명칭을 붙이면서 수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사야도께서는 계속해서 명칭을 붙이지 말라고 하고
저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답변만 되풀이 하면서 수행을 했습니다.
그러자 사야도께서는 명칭을 붙일 때
명칭을 붙이는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도 좌선을 시작하고 일어남, 꺼짐의 호흡을 알아차리려고 할 때
문득 명칭을 붙이지 말라는 사야도의 말씀이 생각나서
명칭을 붙이려는 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랬더니 순간적으로 명칭을 집착하고 있는 마음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명칭이 전자동으로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오히려 제가 좋아서 습관적으로 붙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좋아서 붙이고 있다는 것을 안 뒤 당장 그 시간부터 명칭이 붙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명칭을 붙이려고 해도 붙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더욱 놀랐습니다.
그렇게 오래 동안 붙여온 명칭이 단 한순간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다시 붙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놀라운 효력을 체험했습니다.
그간 제가 집착을 해서 명칭을 붙였다는 사실을 안 것은 일종의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가 나면 더 이상 집착을 하지 않습니다.
사실 습관이라는 것도 자신이 좋아서 지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습관도 지속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쉽게 제어될 수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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