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부처님의 경전을 평생을 읽어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언젠가 그 참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스승의 말을 10년을 들어도 말한 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차츰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대개는 수행을 하지 않고 편하게 얻으려고 합니다.
아울러 수행을 하면서 조금도 참지 못할뿐더러 가르침대로 따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발전하지 못합니다.
이미 모든 진리는 밝혀져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 수준만큼 밖에 알지 못합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이란 점진적으로 지혜를 계발하는 과정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관념을 보지 않고 실재를 보기 때문에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마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뿌리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모든 일의 뿌리는 일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뿌리를 보아서 얻는 지혜는
대상의 실체를 알기 때문에 대상을 끊는 효과가 있습니다.
무지는 모르기 때문에 무엇이나 계속하지만
지혜는 분명하게 알아서 무엇이나 더 이상 지속하지 않고 끊습니다.
결국 내가 집착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바꾸려하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내가 있다고 하는 유신견입니다.
모르면 당하고 알면 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집착을 안 뒤부터 명칭을 붙이고 싶어도 이제 붙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수행을 할 때 스승의 말씀을 쉽게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강력하게 하려는 의지를 내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결연한 의지가 필요하고 확신에 찬 믿음이 필요합니다.
수행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과적인 수행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번뇌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위빠사나 수행은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생각으로 듣고 모두 실천할 수 없는 것처럼,
수행을 할 때에도 스승의 말씀을 모두 실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수행이 어렵다는 것이고 자신과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있어도 누구나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것 또한 이처럼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합니다.
스승이나 책에 있는 말은 모두 관념입니다.
자기가 생각으로 받아들인 것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또, 들은 말을 실천하고 싶어도 잊어버리고 생각이 나지 않아서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스승으로부터 누차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말을 들었어도
실제 수행을 할 때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한 번 듣고 두 번 듣고 거듭 들었을 때,
어느 날 문득 저도 모르게 스승이 하신 말씀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귀에 못이 박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습관을 실천할 뿐이지 새로운 습관을 길들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습관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듣고 또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실천하는 계기가 옵니다.
수행자 여러분!
눈을 감고 좌선을 시작하면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자기 의지대로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얼마나 알아차리는 힘을 키울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믿음과 노력과 선업의 과보까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경험하지 않은 미지의 정신세계를 탐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은 한 가지의 힘으로 되지 않고 복합적인 힘의 작용이 따라야 합니다.
제가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말을 무수히 듣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수행방법이라서 바꾸려 하지 않고 집착한 때문이며
변화를 싫어하는 오만함과 나태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제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새로운 습관이 길들여지지 않아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우리가 산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살기보다
과보의 힘으로 굴러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과보가 바로 원인과 결과이며 자신의 성격이며 자신의 습관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해보지 않은 것이라서
낯설기 때문이며 아직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의지를 내야하고 수행에 대한 말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똑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말도 같은 말이 아닙니다.
시간이 다르고 마음이 다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방법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도반과 훌륭한 스승이 없으면 수행을 계속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에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필요한 집중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먼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습니다.
있는 몸도 알아차리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보이지 않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수행자마다 근기가 있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집중력을 키워야 합니다.
집중이란 고요한 마음의 집중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상에 마음을 머물게 하여 고요함을 얻어야 합니다.
이러한 집중을 위해서는 먼저 몸을 겨냥하고 겨냥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러한 방법이 가장 안정적으로 집중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고요한 마음의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집중이 되어야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들뜨고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미세한 대상인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마음 자체가 보이지 않는 미세한 것이라서
이렇게 고요한 상태에서만이 마음을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시작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다음으로 대상에 마음을 머물게 하여 고요한 마음의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라야 지혜가 납니다.
이런 지혜를 얻기 위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에
수행자가 처음에는 몸을 알아차려서 집중력을 키우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의 주 대상은 호흡입니다.
호흡은 항상 있는 대상이라서 알아차리기가 좋습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합니다.
화가 났을 때의 호흡은 거칠고 고요할 때의 호흡은 미세합니다.
그래서 호흡을 통하여 현재의 마음의 상태도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들이 몸을 알아차리는 것조차 해본 일이 없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마음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수행을 시작한 초기에는 몸으로 오기도 어렵고
몸에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누구나 집중력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마음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몸을 알아차려서 충분히 집중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제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처에 가서 수행을 할 때
몸을 알아차리는 곳에서 집중력을 키운 것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쉽게 마음을 알아차리는 다양한 방법에도 적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날인지 알 수 없지만 수행이 전에 없이 흐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큰 스승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요즈음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보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그리고 수행이 잘 안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큰 스승님께서는 제 수행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스승님께서는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소홀히 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아서 그것에만 매달린 것이 수행에서 장애로 나타난 것입니다.
저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지도자께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실 때
비로소 수행에 균형이 필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병행하여
비로소 정상적인 수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로만 말하는데
사실 나는 사념처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사실이 주는 교훈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가 전면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다가
대상이 약해지면 얼른 몸으로 와서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이렇게 몸을 알아차리다가 알아차리는 힘이 커지면 다시 자연스럽게
전면으로 가서 마음으로 대상을 알아차릴 수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몸과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의 균형입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겠지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반드시 몸과 마음을 함께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부의 수행자들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상근기이고
몸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하근기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서 특정한 대상 하나를 알아차릴 경우라면 몰라도,
적어도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사념처가 고루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네 가지 대상 모두를 균형을 맞추어서 알아차리라고
사념처 수행을 설법하신 것입니다.
마음은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상근기와 하근기가 따로 없습니다.
선정의 세계에서는 선정수행의 단계가 있고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7청정과 16단계의 지혜가 있습니다.
이때 높은 단계의 지혜가 상근기이고 낮은 단계의 지혜가 하근기가 아닙니다.
수행 방법에 따라서 상근기와 하근기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순간의 마음가짐의 차이에 따라서 지혜가 다른 것입니다.
한 시간 안에도 마음이 집중될 수도 있고 집중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가 날 수도 있고 무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세계는 매순간 높고 낮은 정신세계를 왕래합니다.
제가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집착하고 있었던 것은,
이것을 상근기라고 생각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그렇게 잘 되던 수행이 잘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스승으로부터 몸의 중요성을 듣고 다시 몸을 알아차려서
수행의 균형을 이룬 뒤에 상근기와 하근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 순간의 마음에 낮고 높은 두 가지의 마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까지 먼저 몸을 알아차려서 집중력을 키우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드렸습니다.
집중력은 고요한 마음이 전제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요한 마음이란 직관력을 키우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반드시 먼저 몸을 알아차려서 집중력을 키운 뒤에
그 집중의 힘으로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흐름을 알아차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어렵다는 사실은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행은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의 마음은 같습니다.
반드시 기초의 과정을 거쳐서 다음 단계의 지혜가 나는 것만이
바른 수행자의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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