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마음은 하나이며 그리고 한순간에는 하나의 마음만 있습니다.
상좌 불교도의 마음과 대승 불교도의 마음이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도의 마음과 회교도의 마음이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가 있는 사람의 마음과 종교가 없는 사람의 마음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순간마다 일어나는 마음의 종류는 모두 다릅니다.
마음은 아는 것으로는 하나이지만
태어난 세계와 정신적 수준과 쓰임새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마음으로 구별합니다.
마음은 마음의 작용을 말할 때의 마음이 있고,
감각기관의 하나인 마음이 있고,
대상을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심(心), 의(意), 식(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모두 같은 마음이며, 필요에 따라서 다르게 부릅니다.
이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특별히 다른 마음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마음을 찾게 됩니다.
마음을 찾으면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현재를 알고 있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마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려고 마음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을 어디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은 항상 현재 여기에 있습니다.
항상 여기 마음자리에서 대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6입에 감각대상인 6경이 와서 부딪혀서
마음이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르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보이는 대상이 카메라 렌즈에 와서 부딪히는 것과 같습니다.
렌즈가 피사체에 가서 장면을 담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밖에 있는 장면이 렌즈에 와서 닿아서 영상이 찍히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눈이 물체가 있는 밖으로 나가면 마음이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대상을 따라다니게 됩니다.
그럴 때는 알아차리기가 어렵고 고요함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밖에 있는 대상에 마음이 팔리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가 바로 갈애가 일어나 집착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물론 밖에 있는 대상에 마음을 보내서 알아차리는 경우도 있지만,
처음에는 감각기관에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의 순서입니다.
이런 순서를 지켜야 알아차리는 힘이 생깁니다.
이처럼 감각기관에서 감각대상을 알아차리면 대상에 대한 선입관 없이,
대상에 대한 좋고 싫음 없이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알아차릴 때도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중요한 기본입니다.
자! 수행자 여러분!
잠시 제 말을 주목하고 따라서 해보십시오.
이제 수행자 여러분은 현재의 자세 그대로 잠시 눈을 감아보십시오.
그리고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려보십시오.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들은 마음을 보려고 마음을 찾았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현재 무슨 마음이 있는가, 찾는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찾는 마음이 있기 전의, 있던 마음을 사라지고
현재 마음을 보려고 하는 새로운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때 마음을 보려고 한 것이 대상입니다.
그래서 ‘현재 내 마음이 마음을 보려고 하고 있네!’ 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다른 곳에서 찾거나
무엇인가 구체적인 형상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일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등잔불이 등잔불을 보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때로는
있던 마음이 남긴 느낌의 잔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대상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에 의해서 일어난 느낌입니다.
이것은 마음과 느낌을 연계해서 보는 다른 수행방법의 하나입니다.
마음이 있는 자리는 현재입니다.
마음을 몸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자리를 빨리어로 빠리무캉(parimukham)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면전(面前)에서, 또는 앞에서라는 말입니다.
면전이란 얼굴을 마주대한 앞이라는 의미로 눈앞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편의상 전면이라고 합니다.
경전에는 부처님께서 자리에 앉아 전면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을 보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호흡을 몸에서 알아차린 것이 아니고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리신 것을 말합니다.
이 방법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들의 수행방법입니다.
전면이라고 해서 꼭 전면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위에서, 옆에서, 뒤에서 보는 느낌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요약하면 몸이 아닌, 몸 밖에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편의상 전면이지, 몸이 아닌 어느 위치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전면이라는 말에 모두 포함됩니다.
마음이 전면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몸과 마음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마음이 뇌에 있다는 학파와 마음이 심장에 있다는 학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부처님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마음은 몸과 함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몸의 어느 특정부위에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이 몸 밖에 전면에 있다는 것은 마음이 몸을 벗어나서 밖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태어날 때 재생연결식이 생긴 뒤에 몸이 만들어져서
몸과 마음이 결합되면 일생동안 마음이 몸을 떠나지 않습니다.
만약 마음이 몸을 떠난다면 죽을 때입니다.
죽을 때 마지막 마음이 일어나서 사라지면 몸의 기능도 똑 같이 소멸합니다.
그리고 마음도 끝납니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는 유체이탈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여기서처럼 전면에서 지켜보는 마음을 유체이탈이라고 느낄 뿐입니다.
이때도 마음은 몸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몸과 함께 있습니다.
이때 전면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마음이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생긴 입체적 현상입니다.
일어난 마음은 빠르게 사라지고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전면이라는 공간이 생긴 것이지
실제로 마음이 밖으로 나간 것은 아닙니다.
자! 잠시 수행자 여러분께서 눈을 감아보십시오.
그리고 과거에 다니던 초등학교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니면 함께 놀던 친구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면 옛날의 그 선생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좋습니다. 이제 눈을 뜨십시오.
지금 수행자 여러분들은 과거의 학교와 친구를 그리고 선생님을 생각했습니다.
이때 여러분들이 과거를 생각한 자리가 바로 마음자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면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몸이 아닌 공간에서 생각을 했습니다.
뇌에서 생각한 것도 아니고 심장에서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이 마음자리에서 생각을 하고 대상을 압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릴 때도 이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려야합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어느 곳에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편의상 전면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몸의 어느 위치에도 있지 않기 때문에 물론 가슴에도 없습니다.
마음이 심장을 토대로 일어났다는 것은 정신과 물질이 일어난 토대를 말하는 것이지
그곳에 마음이 거주하며 머문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토대는 원인과 결과로써의 의미를 말합니다.
저희 쉐우민 스승님께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말씀하시면서 항상 가슴을 가리키십니다.
그래서 저도 처음에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항상 가슴을 주시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마음은 없고 무겁고 단단한 느낌만 있었습니다.
너무 힘을 주어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없는 마음을 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 결과였습니다.
그곳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려고 너무 힘을 주어서 집중을 했기 때문에
얼마 지나서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고 심지어는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말을 스승께 말 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근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할까봐 말도 못하고
그냥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우연히 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한 뒤부터
마음이 가슴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승께서 가슴을 가리키신 것은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마음이 남긴 느낌을 가슴에서 알아차리라는 의미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처음에는 마음을 붙잡고 있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마음이 남긴 느낌을 가슴에서 지켜보라는
매우 훌륭한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마음과 가슴의 느낌을 연계해서 알아차리는 것은 뒤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에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마음을 새로 내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음을 새로 낸다는 것은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새로 의도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도는 노력의 일환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저절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려는 의도가 선행 되는 노력을 해야
비로소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수행은 한 가지만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수행은 믿음과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과 지혜가 하는 것입니다.
이상 5가지를 오근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앞에서 이끌어주면 노력을 하게 되고, 노력을 해야 비로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알아차릴 때 계속해서 노력을 하면 바로 집중이 됩니다.
이처럼 집중이란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러한 집중력에 의해서 지혜가 성숙됩니다.
그래서 수행의 시작은 알아차림이고, 다음 목표가 집중이며,
이러한 집중에 의해서만 지혜가 납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지혜는
다시 앞에서 믿음과 함께 힘을 합쳐서 더 열심히 노력을 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알아차림을 만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근이 오력이 되어 수행을 하는 힘이 생깁니다.
만약 수행이 잘 된다면 이상 5가지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이 잘 안된다면 이상 5가지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5가지 중에서 실제로 수행을 실천하는 것은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력의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 3가지의 힘이 오근을 조화롭게 하여 오력을 키웁니다.
이러한 힘이 있어야 수행을 잘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마음을 새로 내게 하는 힘입니다.
이 힘이 없으면 마음을 새로 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새로 낸다는 것은 다음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한 번 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로 낸다는 것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알아차림을 지속해서 집중이 되면 계속해서 마음을 새로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마음을 내로 낸다고 인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새로 내는 것을 인식할 수 없더라고 계속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매순간 마음을 새로 낸다고 알지 못하지만
새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바퀴가 굴러갈 때 바닥에 닿는 점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아무리 빠르게 굴러가도 닿는 접점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이것이 매순간 변하는 현재입니다.
그래서 실재하는 것은 현재밖에 없습니다.
바퀴가 바닥에 닿는 순간에 생긴 접점은 이미 사라지고 계속해서 새로운 면과 부딪칩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도 이와 똑같습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이 계속해서 새로운 대상과 만나는 것입니다.
이때 매순간 새롭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대상의 변화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상이 매순간 새로운 것이라고 알면
그것을 아는 마음도 자연스럽게 새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알아차릴 대상이 같은 것이 아니고 새롭게 느낄 때 지루하지 않고 흥미를 느낍니다.
이런 과정에 의해서 집중력이 생기고 무상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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