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고통스러운 과거는 나의 과거가 아닙니다.
그 순간은 이미 지나가고 사라져 버렸으며 다만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뿐입니다.
고통은 그것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겪게 됩니다.
나의 과거가 아니고 한편의 영화를 보듯이 분리해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기억은 실재가 아닌 관념입니다.
관념은 허상입니다.
번뇌를 부수는 깨달음은
관념이 아닌 실재하는 현상에 머물 때에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고통을 경험했다면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원인을 새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음은 같은 원인을 끊임없이 되풀이합니다.
이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범부의 숙명입니다.
여러분, 현자와 범부의 선택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은 5가지 근기를 가지고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믿음,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중에서 믿음은 많아서도 안 되고 부족해서도 안 되고 적절해야 합니다.
믿음이 많으면 맹목적 신앙이 되고 부족하면 지혜가 계발되지 않습니다.
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력이 많으면 들뜨고 부족하면 게을러집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집중도 적절해야 합니다.
집중이 부족하면 고요함이 없고 넘치면 졸음에 빠집니다.
지혜도 적절해야 합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어리석고 많으면 간교해집니다.
오직 알아차림 하나만 제외하고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많거나 부족하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룰 때 바른 견해가 생깁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중도적 관점으로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대상의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바른 견해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중도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이 있으면 믿음과 지혜가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노력과 집중이 균형을 이룹니다.
이처럼 믿음과 지혜가 균형을 이루도록 돕는 것이 알아차림이며
노력과 집중이 균형을 이루도록 돕는 것이 알아차림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오근의 중심축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알아차림 하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수행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더 정확히 말하면
첫째,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이 있어야 하고
둘째, 대상에 마음을 보내는 행위인 알아차림이 있어야 하고
셋째, 이것을 아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상 세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알아차림이란 마음이 아니고 마음의 작용인 행위입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하고 있는 것을 깨어서 알지 못합니다.
누구나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몸에 부딪히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할 때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합니다.
그래서 그냥 무심히 합니다.
이처럼 무심히 하는 것은 수행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란 대상에 마음을 정확하게 보내는 행위이고
다시 이것을 마음이 받아들여서 압니다.
일반적으로 알아차린다고 할 때는 대상과 아는 마음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알아차림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본다, 이해한다, 겨냥한다, 관찰한다, 주시한다, 라고
말할 때에도 똑같이 대상과 아는 마음이 생략되어 있다고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보고 안다, 이해하고 안다, 겨냥하고 안다, 관찰해서 안다,
주시해서 안다, 라고 하는 ‘안다’라는 마음이 뒤에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알아차림은 깨어있는 마음으로 대상에 마음을 보내는 행위이므로 선한 행위에 속합니다.
그래서 선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율을 지키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 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며
부적절한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을 돕는 것이 바로 분명한 앎입니다.
알아차림이 대상을 겨냥하는 것이라면
분명한 앎은 대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모든 대상은 저마다 특성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러한 대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알아차리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분명한 앎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좌선과 경행을 할 때만 하는 수행이 아닙니다.
일상의 모든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러나 사실 모든 경우에 모두 알아차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일상의 생활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분명한 앎이란 분명한 이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난 대상을 이해하고 지혜로 지켜보는 수행입니다.
수행자가 바른 알아차림으로
있는 그대로 대상을 지켜보면 올바른 통찰력이 생깁니다.
그러면 대상에 대한 목적과 대상의 적합성과
대상에 대한 영역과 대상의 실재에 대한 이해가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분명한 앎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바른 알아차림의 결과로서 지혜에 속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반드시 이러한 분명한 앎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알아차림과 함께 하는 분명한 앎은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유용성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이것은 알아차릴 대상의 목적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하여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할 때 이것이 이로운 것인지, 해로운 것인지를 알아차려서
이로운 것을 선택하도록 해야 합니다.
목적에 대한 분명한 앎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수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집멸도라는 사성제를 알아 가장 숭고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수행을 할 때는 그만 두고 싶은 유혹이 계속됩니다.
이때 수행을 계속하는 것이 이익인지, 그만 두는 것이 이익인지 알아차려서
수행의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습관적인 것을 선택하여 목적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이익이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목적 또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이익을 선택하지 못하면 손실이 따른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목적은 그 목적만큼의 중요한 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둘째, 적합성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하는 행위가 유익하고 건전한가에 대해서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누구나 완벽한 조건이 성숙된 상태에서 수행을 하기란 어렵습니다.
이러한 적합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생기면
수행자에게 주어진 시간과 장소와 개인적 성격 등을 고려할 수 있게 됩니다.
때와 장소와 자신의 성격을 이해하면
이에 따라서 여러 가지 알맞은 방편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턱대고 수행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과 그리고 자신의 성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이롭고 유익하다고 할지라도
시기와 장소에 따라서 적절한지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법을 나눌 때도 바쁜 사람을 붙잡고 말하는지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누는지도 알고
이로움이 없다면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상대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데
그것을 자꾸 주려하면 그 또한 상호 괴로움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두 가지인 유용성에 대한 분명한 앎과 적합성에 대한 분명한 앎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들 두 가지는 종교적인 것 이상에 속합니다.
셋째, 감각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감각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은
수행자가 수행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에 부딪혀서 아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선정수행을 할 때는 선정수행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사념처 수행의 대상인 몸과 마음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자신이 알아야 할 대상의 영역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각자 자기에게 알맞은 수행을 해야지 엉뚱한 것을 붙들고
그것을 상상하거나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몸에서 일어난 현상은 분명하게 물질적 현상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마음에서 일어난 현상은 분명하게 정신적 현상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만약 관념적인 생각에 빠져 있거나
몸과 마음의 대상이 아닌 것은 영역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알아차리고
수행의 대상인 고유한 영역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특히 알 수 없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거나 풀 수 없는 의문을 갖게 될 때
이것을 알아차리고 실재하는 몸과 마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넷째, 어리석지 않음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이것이 현혹되지 않은 앎이며 실존에 대한 분명한 앎을 말합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 어리석은 마음으로 알아차리는지
또는 어리석지 않은 마음으로 알아차리고 있는지
이것을 알고 수행을 해야 합니다.
어리석지 않은 마음으로 대상을 알아차리면
유신견, 상견, 단견을 갖지 않고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대상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무상, 고, 무아는 생각으로 알아서는 그 참 성품을 알 수 없고,
반드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실천적 수행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두 가지 분명한 앎은 진실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일상생활에서의 알아차림에 속합니다.
그래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은 수행에 기본이 되는 두 가지의 축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알아차림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의 요소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마음이 있어서 하는 행위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알아차림이지,
일하는 마음 그 자체를 알아차리는 수행은 아닙니다.
그래서 다음으로 대상을 알아차리고 분명한 앎을 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이 수행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력의 현장이며
살아있는 그 실체를 직접 대상으로 삼아서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추측만 했을 뿐이지
실제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생명력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에서는
이것은 관념이 아닌 실재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갖는 의미는 매우 현실적이고 중요합니다.
불교와 달리 다른 종교에서는 초월적 존재나 창조주에 귀의하는 것이라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출발부터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알 수 없는 것과 알 수 있는 것의 차이입니다.
이처럼 위빠사나 수행이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한다면
다른 종교는 신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출발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하면서
불필요한 일에 옳고 그름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나 서로 지향하는 것이 다르면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이익입니다.
특히,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현상계를 아는 것이 마음입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에 부딪힐 때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론 여기에 똑같이 필요한 것이
감각기관과 감각대상과 여섯 가지 아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모든 것의 가장 핵심적 주제를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깨달음이 있고 윤회가 끝나고 지고의 행복이 있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끕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이끄는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사실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모든 행위에 앞서 가기 때문에
선한 마음이 있으면 선한 행위를 하고
선하지 못한 마음이 있으면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항상 선한 마음이 되어서 선한 행위를 하고
그 결과로 선한 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니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음은 내부에서 일어난 마음이 있습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란 선하지 못한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관용, 자애, 지혜라는 선한 마음도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이것들이 모두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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