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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02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1:26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떠난 것을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누구나 떠나게 되며,

다만 늦고 빠르고의 시간이 다를 뿐입니다.

 

떠난 것은 이미 과거입니다.

새로운 만남에 충실하십시오.

실재는 현재에만 있습니다.

 

떠난 것이 사람이 되었건, 시간이 되었건,

명예나 재산이나 건강이 되었건

모두 지나간 것입니다.

 

떠난 것들은 저마다 조건에 의해서 떠난 것입니다.

거기에는 떠난 것도 없고, 떠나보낸 것도 없고

오직 무상만 있습니다.

 

누구도 이 흐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떠남을 아쉬워하거나 미워하면 불선업을 짓는 것이며

떠남을 떠남으로 받아들이면 법을 보는 것입니다.

 

떠남으로 인해 괴로울 때는

오히려 너무 오래 함께 했던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마음을 새로 내는 것의 두 번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상을 보고 화가 났을 때 화가 난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때는 화가 난 것을 알아차리는 1차적 현상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 뒤에 화가 난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때 화가 난 것을 알아차린 뒤에

화가 난 마음을 알아차리려면 마음을 새로 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2차적 현상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새로 낸다는 것이 마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마음을 알아차리는데 필요한 사항입니다.

이때 새로 낸다는 인식이 분명해야 마음을 새로 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첫 번째 알아차림은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과정이라서

마음을 새로 내는 것이라고 인식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화가 난 것을 알아차린 뒤에 화가 난 마음을 알아차리려면

마음을 새로 낸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마음을 새로 낸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보이지 않는 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전에 해보지 않은 것이라서

마음을 알아차리려는 새로운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나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수행은, 무엇을 하건 반드시 하려는 의도가 있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노력을 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새로 내기 위해서 노력을 했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경험하지 않은 정신세계를 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고 대처해야 합니다.

이 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어느 날 큰 스승님을 뵙고 면담을 할 때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스승님 몸의 호흡이 사라졌습니다.

몸의 느낌도 사라지고 호흡도 사라져서

느낌과 호흡을 모두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큰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호흡이 어떻게 사라지는가?

호흡이 사라지지 않으니 계속해서 알아차려라.”

 

저는 다시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라졌습니다.

지금 몸도 없고 호흡도 없어서 아무 것도 알아차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스승께서는 저를 그윽이 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는 마음을 알아차려라.”

 

그러자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아는 마음을 어떻게 알아차립니까?”

 

그러자 스승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라.”

 

저는 즉시 다시 물었습니다.

“스승님,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어떻게 알아차립니까?”

 

그러자 스승님께서는 “마음을 새로 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스승님과 저와 3년 동안 있었던 마지막 답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스승님께서는 열반하셨습니다.

 

이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고 있을 때라서

스승님의 간결한 답변에 그간 마음에 품었던 의문이 일시에 사라졌습니다.

 

이상의 대화에서 마음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알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에 대한 이론과 방법을 비로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스승님의 말씀으로 인해 마음이란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서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을 새로 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마음을 새로 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새로 내는 것은 노력을 해야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님과의 면담에서 저는 호흡이 사라졌다고 말씀드렸는데

스승님께서는 호흡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맞는 말입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면 먼저 몸의 느낌이 사라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런 뒤에 다시 호흡이 사라집니다.

이때 호흡이 완전하게 정지된 것이 아닙니다.

 

호흡이 완전하게 끊어지면 죽습니다.

그러나 집중에 의해 호흡이 미세해져서 의식할 수 없는 상태가 옵니다.

이때 호흡이 사라진 것과 함께 몸이 사라집니다.

스승들은 이러한 상태에서 다음 단계로 ‘앎’을 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집중의 상태가 아닌 경우라도 호흡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수행자들이 들뜨고 알아차리는 힘이 약하면,

호흡은 있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도 수행자들은 호흡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께서 말한 호흡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집중이 되지 않은 이러한 일반적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앎’은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몸이 소멸했으니 남는 것은 마음밖에 없으므로

당연히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다음 순서입니다.

 

수행은 반드시 무엇인가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때는 몸이 사라졌으므로 불가피하게 깨어있는 마음이

대상이라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집중에 의해 몸이 사라졌을 때 수행자들이 많은 혼란을 겪습니다.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지도를 받았어도

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혼란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관한 것은 말을 듣는 것만으로는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당연히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표상을 만들어서 보기 때문에 수행이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그러므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알았다 해도 이해하기가 힘들고

모르기 때문에 힘들어서 누구나 방황하는 단계가 오기 마련입니다.

 

이 과정에서 바르게 수행을 해서 아는 마음도 사라지면

이것이 바로 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아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이 끊어집니다.

그리고 이 순간의 마음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라서 열반을 대상으로 흐릅니다.

몸의 느낌과 호흡까지 사라졌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순간에 직면한 것입니다.

 

이때는 전적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스승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상황이 오면 스승은 여러 가지 수행에 대한 지침을 내려줍니다.

그래서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스승을 따라야 합니다.

 

수행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몸과 마음인데

만약 몸의 느낌과 호흡이 미세해져서 알아차릴 수가 없으면

사라진 것을 다시 찾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사라진 것을 다시 찾는 것은 수행을 퇴보시키는 것입니다.

 

몸의 느낌이 사라진 상태는 집중력이 생긴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라진 것을 다시 찾으면 더 이상 다음 단계의 지혜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수행자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단계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빠사나 수행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사라진 것을 찾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알아차릴 대상이 많은데 사라진 것을 찾는다면 당연히 수행이 후퇴합니다.

 

특히 위빠사나 수행은 번뇌가 소멸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몸이 사라졌다는 것은 몸으로 인해서 생긴 번뇌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지나간 것이나 소멸한 것은 다시 찾지 않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불문율입니다.

사라진 것을 다시 찾는 것이 바로 어리석은 집착이라고 아셔야 합니다.

 

만약 몸의 느낌이나 호흡이 사라져서 ‘앎’을 해야 할 때는

지금까지 해오던 수행방법으로는 더 이상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단계에 맞는 새로운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치게 힘을 써서 장애가 생길 수 있고

답을 얻지 못해 수행을 왜곡해서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수행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금만 바르게 노력을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그치고 만다는 것은 실로 애석한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선업의 과보가 적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좋은 결과가 목전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도 따릅니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는 반드시 경험이 있는 스승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가짐도 더욱 조심해야하며 불필요한 일에 연루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큰일을 앞둔 사람이 각별한 주의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상황이 그대로 지속되어 좋은 결과를 얻는 것과 얻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수행자 여러분!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원인을 더 많이 만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한 원인을 많이 만들면 반드시 선한 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원인을 많이 만들면 반드시 선하지 못한 과보를 받습니다.

 

여기서 원인은 물줄기입니다.

선한 물줄기가 일어나면 선한 쪽으로 흘러가서 결국에는 지고의 행복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반드시 선하지 못한 과보의 방해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이 길은 홀로 가기가 어려운 길입니다.

물줄기는 한 곳으로 흐르지만 때에 따라서는 역류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에는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함께 해야 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 두 가지와 함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가장 이상적인 조건으로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은 두 개의 바퀴와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마차를 모는 마부와 같습니다.

결국 마차는 마부가 모는 것이므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수행은 마차를 모는 마부도 있어야하고 마차가 굴러가는 두 개의 바퀴도

있어야 하는 것처럼 반드시 이들 세 가지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일반적인 수행지침에서는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두 가지 외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대상을 관통해 버립니다.

일하고 있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지속되는 흐름이 일시에 끊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통해서,

두 가지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문제에 대처해야 하겠습니다.

 

수행자는 오랜 축적된 성향으로 인해서 처음에는 대상을 알아차리기가 어렵고

대상에 마음을 머물게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보완하는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신속하게 대상을 통찰할 수 있는 방법은

일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매우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대상에 머물려고 하지 않고 달아날 뿐만 아니라,

마음이란 일어난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일반적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대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알아차림이 대상을 겨냥하는 창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분명한 앎은 대상을 받아들이는 방패역할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대상을 관통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병행해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대상을 알아차릴 것을 말씀하시고

알아차림과 함께 분명한 앎을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마치 바늘에 실이 가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것입니다.

알아차림이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라서

알아차림과 함께 분명한 앎을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으로도 완전한 해결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법의 성품을 보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