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몸과 마음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대상으로 수행을 하더라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 안에 깨달음으로 가는 모든 법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대상은 일어난 곳에서 사라지며,
그 대상은 괴로움이며, 그 대상이 무아입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이 있는 만큼 지혜가 계발됩니다.
아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력과 알아차림이 있어야 하며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참고 견디는 인내가 있어야 집중력을 얻어 깨달음에 가는 지혜가 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마음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 세 가지를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번째는 마음을 조절하는 과정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지속하면 차츰 집중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이 들뜨지 않고 하나의 대상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그리고 어떤 현상에 즉각적인 반응을 하지 않고
단지 대상만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충동적인 마음으로부터 유연한 마음을 갖습니다.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고정관념의 지배를 받고 살면서
습관적으로 반응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산 것이 아니고 습관이 산 것입니다.
이것을 과보심으로 산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면 이런 상태에서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할 때 심사숙고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을 조절하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조절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생긴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반드시 악한 마음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것만은 아닙니다.
시작은 매우 사소한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사소한 일을 할 때 그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불선행을 하고
그에 따라 불선과보를 받아서 자꾸 괴로움이 더 커집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면 주변의 사소한 일들로부터 자유를 얻어
일상의 일에서 괴로움을 겪는 횟수가 적어집니다.
이런 과정이 연속되어서 차츰 더 많이 알아차리게 되고
차츰 더 큰 번뇌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누구나 대상을 맞이하면 느낌이 일어나고
이 느낌이 즉각적으로 갈애를 일으킵니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괴로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는 괴로움이 대상이 아니고 괴로운 마음이 대상이 되면
괴로움이 비로소 제어됩니다.
즐거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반드시 집착을 하기 마련입니다.
이때 즐거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즐거운 느낌으로 인해 일어나는 집착이나 다음 행위가 조절됩니다.
마음은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그 마음에 담긴 정보는 다음 마음으로 상속됩니다.
이때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한 순간에 대상이 지켜보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마음에 저장되어서 상속되는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바뀌기 때문에 순간적인 조절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짧은 한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 한 순간에 대상이 바뀐다는 것은
기존의 흐름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기존의 대상이 아닌 새로운 대상을 겨냥할 수 있다는 것은
완전하게 새로운 정신세계를 아는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현재에 실재하는 것은 사실 대상과 아는 마음뿐입니다.
이때 대상을 알아차리느냐, 아니면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느냐,
하는 것만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현재를 알고 있는 것은 마음이고,
현재를 알아차리고 있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완벽한 현재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때가 청정함 중에서 가장 완벽한 청정함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일하는 그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번뇌의 오염이 쉽게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라서 실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의 일에 매달려서 많은 시간과 힘을 소모합니다.
때로는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멈추지 못합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미래의 일을 걱정하거나 미래의 일로 인해 욕망을 키웁니다.
그리고 이것이 괴로움이라고 알아도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걱정을 멈추지 못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과거나 미래의 생각을 차단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일이 아닌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망상입니다.
망상은 깊은 무지입니다.
이때 망상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과거나 미래는 사라지고 현재의 마음으로 돌아오며
망상이 얼마나 부질없는 집착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많은 날들을 망상하면서 살아왔지만 정작 망상을 하는지도 모르고 삽니다.
그러나 망상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망상은 단지 알아차릴 대상에 불과한 것이며
때가 되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러한 망상을 잘못된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망상은 과보의 힘으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서 살아온 습관입니다.
그래서 망상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여 없애려고 하지 말고
단지 망상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망상을 해결하려고 하면 또 다른 욕망에 빠집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여러 가지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탐욕이 있는 마음, 성냄이 있는 마음,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때로는 추악한 마음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은 집중력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자신을 추악하게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이때 추악한 것이 나의 마음이 아니고 그 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진 마음입니다.
이것을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이 순간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만약 마음을 알아차렸을 때 추악한 마음이 있는 것을 알았다면
이 순간에 있는 것은 추악한 마음이 있는 것을 아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면 추악한 마음이 있는 것을 안,
새로운 선한 마음이 일어난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잘 수행을 하고도 퇴보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나 현재 있는 마음을 새로운 마음이 알아차렸을 뿐이지
그것이 나의 마음은 아닌 것입니다.
마음의 실상을 알면 마음이란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무상하다는 것을 압니다.
무상해서 괴롭고 그리고 매순간 변하는 나의 마음이 아니고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이때 자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유신견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겸허해지면서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이 생깁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차츰 자신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가는 매우 중요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세 번째는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과정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목표는 오직 하나입니다.
마음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것입니다.
마음이 자유로워지면 모든 관념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녀왔던 고정관념은 사라지고
존재하는 것들의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알아서 집착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바라는 것이 없어서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유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수행이라고 해서
책으로만 받아들이거나 생각으로만 받아들이면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직접 실천하지 않으면 자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누구에게나
지금까지 살아 온 방법이 아닌 전혀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라지 말고 없애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생긴 이래 역대 부처님은 모두 25분이셨습니다.
고따마 부처님이 바로 25번째 부처님이십니다.
이들 부처님들은 모두 하나같이 12연기를 통하여 오온을 발견하시고
그것이 원인과 결과로 진행되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현상이 모두 변하는 것이며,
이것이 괴로움이고, 여기에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처럼 인류가 생긴 이래 부처가 출현할 때가 되어서 나타난 보살들은
모두 동일한 대상, 동일한 법을 통찰해서 부처가 되십니다.
모두 궁극의 진리인 무아를 발견하시어 번뇌를 해결합니다.
그래서 무아는 부처님만이 아시는 진리이고
그리고 제자들은 무아의 진리를 통하여 똑같은 열반을 성취합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어제 오늘의 길이 아니고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무상과 고를 통찰한 뒤에 무아를 알면
나를 위해서 집착을 하지 않아 괴로움의 원인인 업을 생성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해탈의 자유입니다.
이런 상태는 낡은 갑옷을 벗어버리고
가볍고 부드러운 새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두꺼운 껍질 안에 갇혀 껍질 밖을 모르고 살다가
마음이 자유로워지면 껍질은 있지만 껍질의 안과 밖을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이 자유로워지면 내적 평화가 옵니다.
이러한 내적 평화로 인해 외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점점 관대해집니다.
상대와의 관계가 좋아지면 다시 자신의 내적 평화가 더욱 증장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익은 항상 자신의 이익으로 그치지 않고 상대에게까지 전해지고
그리고 상대와의 관계가 좋아지면 다시 자신에게 더 큰 이익으로 되돌아옵니다.
유신견이 있으면 모든 일을 자신이 해야만 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힘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자기만 내세운다면 그만큼 자기 마음을 속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통이지만 자아가 강하면 이런 고통에 묻혀서 삽니다.
그러나 수행을 해서 지혜가 나면 마음을 속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켜보아 유신견이 사라지고
나머지 족쇄들이 소멸되어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10가지의 모든 족쇄가 풀리면 아라한이 됩니다.
아라한이 되면 모든 고통이 소멸하여 31개의 존재의 세계에서 여행을 마칩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일이 없습니다.
해탈을 얻은 아라한의 마음은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라서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 마음은 완전한 자유라서 마치 공중을 나는 새처럼 흔적이 없습니다.
아라한은 마치 조련사에게 잘 훈련된 말처럼 오직 선한 일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모든 감각적 욕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어디에 있거나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세속적 즐거움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6가지 내적인 감각적 즐거움과 괴로움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6가지 외적인 감각적 즐거움과 괴로움이 함께 소멸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누구나 가야할 궁극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팔정도인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일하는 그 마음을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마음을 속박하면 몸이 긴장합니다.
이 길이 팔정도의 길이고,
이 길이 계정혜 삼학의 길이고,
이 길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의 길이고,
이 길이 오직 알아차림 하나로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나타나는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이 가신 길을 특별한 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갈 수 있고 아무나 쉽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결코 누구도 갈 수 없는 길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을 말하셨습니다.
수행자는 언제나 일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며,
몸이 긴장했을 때도 몸을 긴장하게 한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도과를 성취해서 행복을 얻으셔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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