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괴로움은 누가 없애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노력해서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행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것입니다.
번뇌를 소멸시키는 지혜는 누가 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것입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은 없애려고 하거나 바라는 것이 있으면 안 됩니다.
단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의무를 다한 것입니다.
결과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조건이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 외부의 초월적 대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수행은 선하고자 하는 사람과 부지런하게 노력하는 사람과
인내하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고난의 여행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세 번째 음식을 먹을 때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음식은 수행을 할 수 있는 영양을 공급해주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음식이 욕망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음식을 먹을 때는 욕망을 가지고 먹지 말고 필요해서 먹어야 합니다.
수행자는 먹기 위해서 살지 않고, 살기 위해서 먹습니다.
이것은 욕망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독송하는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바르게 알아차려야 한다.
마음에 있는 온갖 욕심을 버리고, 맛을 즐기고,
배불리 먹고, 몸을 살찌게 하려고 먹지 않는다.
몸을 지탱하는 영양분을 얻고, 건강을 지키고,
몸을 유지하여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음식을 받으리라.
땅과 물, 바람과 열이 합쳐져 이 음식을 만들었네.
우리가 이것을 먹을 수 있도록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수고하였으니,
이 음식을 먹고 반드시 수행을 하리라.
음식을 먹을 때 바르게 알아차려서
배고픈 느낌도 일어나지 않고,
배부른 느낌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로써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여 허물이 없으며
청정함으로 항상 평온해질 것이며,
나 역시 다른 생명에 보탬이 되리라.”
수행자 여러분!
그러므로 음식을 먹기 전에 지금 무슨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욕망으로 먹기 마련입니다.
욕망으로 먹는 것을 입에 불이 붙은 채로 먹는다고 말합니다.
탐욕으로 음식을 먹으면 오래 씹지도 않고 그냥 삼키며,
항상 더 많은 양을 먹습니다.
때로는 남이 주지 않은 것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면서 음식을 먹는 것을 계율을 지키는 행위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알아차리지 못하면 탐욕으로 먹기 때문이며,
남이 주지 않은 것을 먹기 때문입니다.
비구 계율 중에 음식에 대한 계율이 많습니다.
비구는 아침에 해가 뜨기 전에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365일 해 뜨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아침 공양시간이 모두 다릅니다.
그리고 점심공양은 반드시 정오를 넘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녁공양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절제 속에서 먹고 싶은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비구는 탁발을 해서 먹어야 하며,
모든 음식을 받을 때는 반드시 주고받는 의식을 행한 뒤에 식사를 합니다.
왜냐하면 주지 않는 것을 사용할 경우에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구는 음식을 한 손에 들고
이로 물어뜯으면서 먹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과자나 과일을 먹을 때도 한입에 먹기 좋게 잘라서 입에 넣습니다.
이 외에도 먹는 것에 관한 계율이 매우 많습니다.
제가 미얀마에서 수행을 할 때 저희 스승으로부터
먹는 것에 관해서 지적을 받곤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왜 이렇게 먹는 것을 가지고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스승께서는 먹을 때 욕망이 가장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알아차리면서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비구들에게 먹는 것에 관한 계율이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주석서에서도 먹는 것에 관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알아차리면서 먹다가 도과를 성취한 경우도 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알아차리면서 음식을 먹으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고 맛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맛이 있건 없건 음식이 가진 고유한 맛을 음미하면서 먹게 됩니다.
그러면 음식에 대한 차별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음식은 저마다의 고유한 맛이 있으므로
그 맛을 알아차리면서 먹으면 수행을 하면서 먹는 것입니다.
이렇게 음식 맛을 알아차리면서 씹다가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면 그 순간 무상을 느끼기도 합니다.
입안에 있던 음식도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욕망으로 먹으면 이런 무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서 먹으면
음식을 보시한 사람들에게 공덕을 돌리는 행위가 됩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수행을 하고, 음식을 먹고 나서 수행을 하면
음식을 보시한 자에게 공덕이 크게 되돌아갑니다.
그래서 아라한을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라는 뜻으로 응공(應供)이라고 합니다.
아라한에게 음식을 올리면 아라한은 보시한 음식을 먹고
온전하게 남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살기 때문에
아라한에게 음식 공양을 올리는 것을 우리는 최고의 공덕으로 치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먼저 밥상을 앞에 두고 음식을 먹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지금 무슨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가?’ 하고 알아차립니다.
만약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게 되면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서
잠시 멈춘 뒤에 다시 ‘지금 무슨 마음으로 먹는가?’를 살펴봅니다.
그러면 욕망이 사라진 청정한 마음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때 식사를 시작해야합니다.
그런 뒤에 알아차리면서 천천히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집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음식을 적당량을 집어서 입에 넣습니다.
만약 알아차림이 없을 때는 너무 많이 집어서 가져올 때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리면서 집으면 적당량을 집게 됩니다.
그런 뒤에 알맞게 씹습니다.
씹을 때 음식의 맛을 알아차립니다.
계속해서 음식을 씹은 뒤에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음식을 먹을 때 많이 씹으면 적게 먹고도 포만감이 생겨서 과식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먹으면 맛있는 것 한 가지만 먹지 않고 고루 음식을 섭취하게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서 먹으면 먹는 것조차도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아 음식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감각적 욕망은 짧은 한순간의 느낌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몇 번 씹지도 않고 맛보다가 목구멍으로 넘기면 끝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한순간의 느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삽니다.
수행자들은 상대에게 음식을 많이 드시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많이 드는 것은 탐욕으로 먹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탐욕으로 먹으면 배탈이 나거나 병이 납니다.
그리고 남의 것을 빼앗아서 많이 먹게 됩니다.
그런데 모르기 때문에 좋지 않은 것을 우리는 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욕망으로 사는 세속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수행자들은 음식에 관해서 인사를 할 때
이제 ‘알맞게 드십시오.’라고 하거나
‘알아차리면서 드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많이 드십시오’ 라는 말 대신
‘알맞게 드십시오’ 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 수행자의 인사입니다.
네 번째 좌선을 할 때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좌선을 할 때는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
4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각각의 상황에 따라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여러 가지의 방법을 모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좌선은 몸과 마음을 고루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마음만 알아차려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몸만 알아차려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함께 반드시 몸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좌선이 수행의 전부가 아닙니다.
좌선은 행주좌와 중에서 좌(座)에 속하는 수행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좌선을 하는 것으로 수행이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든 행위가 모두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행주좌와가 균형을 이루어야 수행이 발전하고 지혜가 생깁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좌선과 경행과 일상의 알아차림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생활 따로, 수행 따로 분리되지 않고, 생활하는 것이 모두 수행입니다.
좌선은 움직이지 않은 채로 몸과 마음에 나타나는 현상을 지켜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때 나타난 대상은 모두 손님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움직이는 것에 비해 오히려 더 적극적인 행위에 속하므로
좌선을 할 때는 더욱 각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좌선을 수동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좌선 중에 나타나는 현상은
당연히 일어나도록 되어있는 대상이라고 알고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좌선을 시작하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가렵고, 저리고, 통증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고요해서 졸음이 오기 마련입니다.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망상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은 나타날만해서 나타난 것들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나타날만한 것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가를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것들은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들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보는 의무만 하면 됩니다.
와서 보라고 요청하는 뜻으로 나타난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만약 좌선 중에 몸과 마음에 나타난 현상에 개입하여
바라는 것이 있거나 없애려고 했다면 이 순간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좌선은 좋은 것을 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는 움직이지 않아서 나타난 것을 손님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렇게 대상을 분리해서 지켜보는 수행이라는 뜻으로 바로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는 수행이 아닙니다.
무엇이나 나타난 대상을 개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나타난 대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말고 어떤 것이나 그냥 지켜봐야 합니다.
만약 좋아하거나 싫어했다면 좋아한 마음을 알아차리거나,
싫어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음 대상으로 가야합니다.
나타난 대상을 좋아한 것도 하나의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리고 나타난 대상을 싫어한 것도 하나의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좋고 싫은 것이 없이 그것 자체가 모두 새로운 대상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이 이런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종전에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는 것만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지켜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얻는 이익이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온전하게 자신을 이롭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될 수 없는 것을 되게 하려고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바로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목표는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행함에 있어서는 아무 것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몸과 마음의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전혀 새로운 방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의 힘으로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정관념과 습관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이 벽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경험이 있는 스승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책을 읽는 것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정신세계는 문자를 뛰어넘는 직관이 필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직접 수행을 해야 하고, 그리고 적절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수행에 대한 불문율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수행을 하다가 죽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을 하다가 나타난 현상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수행은 경험하지 않은 몸과 마음이란 동굴을 탐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모두 새로운 것들입니다.
그래서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럴 때는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수행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수행을 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탐욕입니다.
단지 나타난 현상을 지켜보는 것이 수행자가 해야 할 유일한 일입니다.
수행자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수행을 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해서 자연스럽게 와야 할 결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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