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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11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1:5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부모의 은혜와 부모의 행위는 다른 것입니다.

스승의 은혜와 스승의 행위는 다른 것입니다.

 

부모는 날 낳아준 것으로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행위는 부모의 업이므로 내가 받은 은혜와는 다른 것입니다.

 

스승의 은혜는 큰 것입니다.

그러나 스승의 행위는 스승의 업이므로 내가 받은 은혜와 다른 것입니다.

 

은혜는 어떤 경우에도 내가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스승의 행위와 은혜를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부모나 스승이 잘못된 행위를 했다고 해도

그것은 전적으로 행위를 한 사람의 문제이므로 은혜와 구별을 해야 합니다.

 

갚아야 할 은혜를 갚지 않고 비난을 한다면

그 불선의 과보는 매우 커서 나쁜 결과를 초래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호흡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에서 코의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배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풍대를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쉐우민 사야도께서는 가슴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과

다양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코의 호흡은 사마타 수행을 하는 수행자들의 대상입니다.

물론 위빠사나 수행자들도 코의 호흡을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경전의 기록은 두 가지 수행을 할 때

모두 코의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코의 호흡을 모양으로 보면 사마타 수행이고

느낌으로 보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러나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호흡을 ‘배’로 내리셨습니다.

이때 ‘배’로 내린 것은 몸에 있는 풍대의 작용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현재 마하시 사야도가 ‘배’로 내린 수행 방법을 매우 뛰어난 선택이라는 평가를 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신 쉐우민 사야도께서는 마음이 일으킨 느낌을

가슴에서 알아차리면서 함께 호흡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셨습니다.

특히 쉐우민 사야도는 가슴의 호흡만 주장하지 않고

몸 전체 중에서 어디서고 강한 호흡을 알아차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런 뒤에 마음으로 인해서 생긴 느낌이 일어날 때는

가슴으로 가서 알아차리도록 하셨습니다.

 

사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들은 호흡을 알아차릴 때

몸의 특정한 위치를 정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스승들마다 일관되게 알아차릴 호흡의 위치를 정하지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들은 몸의 위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들은 몸이 아닌 전면에서 호흡을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몸에서도 호흡을 알아차리지만,

집중이 되면 전면에서 모든 것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호흡의 위치를 딱히 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슴에서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호흡도 알아차리지만

무수히 일어나는 느낌을 함께 알아차리기에 매우 좋은 장소입니다.

 

몸에는 지수화풍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있는데,

이 중에 풍대 안에 호흡이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몸의 위치에 따라서 호흡이라거나

또는 아니라고 하는 것은 사실 큰 의미가 없습니다.

큰 틀에서 호흡이라고 해도 좋고 또는 풍대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런 논란은 교학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지

수행자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행에서는 대상보다 오직 알아차리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가슴에서 알아차린 호흡은 다른 많은 느낌과 함께 있습니다.

가슴에는 호흡도 있으면서 맥박도 함께 느낄 수 있으며

여러 가지의 무수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슴은 알아차릴 대상의 보고(寶庫)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이미 그 마음은 사라졌지만,

그 마음이 남긴 느낌이 가슴에 남아있어서

마음과 느낌을 연계해서 알아차리기에 좋은 장소입니다.

 

사실 가슴의 호흡도 느낌의 하나입니다.

가슴에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거친 호흡이 있고

단단한 호흡이 있고 부드럽고 가벼운 호흡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슴의 호흡을 알아차리면 분명한 느낌도 함께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때 가슴에서 일어나는 거친 느낌을 없애려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강한 대상이 있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가슴이 무겁거나 두근거릴 때

단지 알아차릴 느낌으로 보지 않고 괴로운 느낌으로 보기 때문에

일부의 수행자들은 가슴에 있는 느낌을 회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오히려 괴로움이 있는 그 현장을 더 분명하고 자세하게 지켜봐야 합니다.

괴로움을 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괴로움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목숨을 거는 승부를 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하면 문제라고 여기던 것들이

사실은 아무런 문제가 아닌 경우가 허다합니다.

 

단지 우리가 두려웠기 때문에 피했을 뿐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영원히 수행이 발전할 수 없습니다.

 

괴로운 마음이 일어났을 때 가슴에서 일어난 거친 느낌을 알아차리면

그 괴로움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그리고 거듭 이러한 느낌을 느낄 때마다 동일한 사안 때문에

늘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그런 사안을 극복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괴롭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괴롭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있다면 괴롭지 않은 방법을 선택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은 피할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사실 괴로움이란 집착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에서 어떤 강한 느낌이 있더라도

그것을 피하지 말고 인내하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괴로움이란 하찮은 것이라고 알게 됩니다.

이것이 가슴에서 알아차리는 수행의 이익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을 하면 언젠가 호흡이 사라집니다.

이때 몸의 느낌도 함께 사라집니다.

이때 사라졌다는 것은 호흡이 멈춘 것이 아니고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호흡이 미세해져서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면 배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가슴으로 올라옵니다.

그런 뒤에 가슴에서도 호흡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몸의 느낌도 사라지고 호흡도 사라지면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아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때 아는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앎’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가슴에서 호흡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은

누구나 반드시 겪어야 할 하나의 중요한 과정입니다.

 

다음으로 배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마하시 사야도께서 하신 수행방법이

배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때의 호흡을 풍대라고 합니다.

이때 배의 움직임은 바람의 요소인 풍대인 것입니다.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배에서 일어나고 꺼짐을 알아차리도록 하셨으며

이때 명칭을 붙여서 일어남, 꺼짐이라고 붙이도록 하셨습니다.

 

마하시 방식은 사마타 수행을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위빠사나로 시작하는

순수 위빠사나이기 때문에, 명칭을 붙여서 대상을 붙잡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수행자들의 근기를 살펴 이로움을 주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명칭을 붙이는 것도 매우 훌륭한 선택 중의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집중이 되면 코나 가슴에 있는 호흡이 자연스럽게 배로 내려가기도 합니다.

배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움직임은 비교적 안정적입니다.

이때 배의 움직임의 명칭을 일반적으로 일어남, 꺼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밀고 당김, 수축, 팽창 등등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명칭은 자신이 느껴지는 실재하는 느낌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명칭을 붙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과 느낌은 미세한 대상이라서

명칭이 가로막으면 알아차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서 명칭을 선택할 수도 있고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수행을 할 때 만약 배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우면 다른 곳에서 알아차려도 좋고

좌선을 시작할 때 알아차림인 눈꺼풀, 입술, 손, 엉덩이를 차례로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이렇게 다른 대상을 알아차리면 차츰 배의 움직임이 서서히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때 배의 일어남과 꺼짐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므로 없는 대상을 억지로 찾으려고 하지 말고

어디에고 있는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음에는 몸의 일부에 있는 움직임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코, 가슴, 배에 있는 호흡이 미세해져서 알아차리기가 어렵고

아직 몸의 느낌이 남아있을 때는 어느 곳이나

몸의 일부에 있는 작은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반드시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때는 이런 미세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을 하면서 집중이 되면 미세한 맥박이 나타납니다.

이때의 맥박은 꼭 가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몸의 어느 곳에서나 작은 움직임이 있을 때는

이 움직임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맥박일 수도 있습니다.

 

맥박과 함께 온 몸에는 풍대가 있습니다.

풍대는 바람의 요소로, 진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때는 작은 진동이라도 대상으로 삼아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미세한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거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과 달리 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런 상태에 이르면 마음도 청정해지고 몸도 가벼워져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이 생깁니다.

그렇더라도 더 조심스럽고 공손하게 대상을 겨냥하고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합니다.

 

미세한 대상을 알아차릴수록 알아차리는 힘이 증장됩니다.

그래서 수행이 더욱 발전합니다.

이처럼 몸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작고 미세한 움직임을 알아차리다가 몸의 느낌이 사라지고 호흡도 사라지면

다음 단계로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음에는 전면에서 호흡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전면은 ‘마음자리’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가 마음으로 지켜보는 자리가 바로 전면입니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호흡이 전면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꼭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집중력이 생기면

어느 시기에 자연스럽게 전면에서 호흡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이 상태가 되면 발의 움직임도 몸이 아닌 전면에서 알아차릴 수가 있으며

몸의 통증도 전면에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면에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배우거나

몸을 알아차려서 집중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면에서 알아차리는 수행이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여러 가지의 수행 방법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이 수행을 실천할 수 있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전면에서 알아차리는 이익은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에

망상이 적게 들어오고 알아차림을 오래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리기 때문에 집중력이 배가 됩니다.

 

그러나 몸에 있는 대상을 전면에서 알아차릴 때

몸에서처럼 분명하지는 않고 약간 미세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느낌이 약해지면 다시 몸으로 와서 알아차립니다.

그러다가 약간의 집중이 되면 자연스럽게 다시 전면에서 알아차리게 됩니다.

 

전면이라고 할 때 전면은 ‘앞에서’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몸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입체적인 느낌으로 그렇게 느껴질 뿐입니다.

 

이렇게 호흡을 알아차릴 때 위치를 바꾸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코에서 한 번 알아차리고 다음에는 가슴에서 한 번 알아차리는 방법은 안 됩니다.

얼마간 알아차리다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매 순간마다 이곳저곳으로 호흡의 위치를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호흡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매순간 위치를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집중력이 생기지 않고

궁극에는 무상의 지혜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 곳에서 대상을 지켜보아야 대상의 변화를 통해서

무상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몸에서 일어난 모든 현상은 일어난 순간에 사라지며

반드시 일어난 곳에서 사라집니다.

이것을 알아야 비로소 무상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