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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15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1:59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세계에서는 진리의 소리가 파묻혀서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른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핍박을 받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는 바른 것이 고독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번뇌를 해결하려고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괴로움은 남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는 오직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에 선한 불씨를 꺼트리지 말고

세상의 일에 초연해야합니다.

 

세상의 일은 세상의 힘으로 굴러가고

자신의 일은 자신의 힘으로 가게 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좌선 중에 통증이 나타났을 때 알아차리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 명상원에서는 좌선을 할 때

처음에 수행자들에게 들려주는 구절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수행을 하다 죽지 않는다.’

 

‘수행은 잘 안 되는 것이다.’

 

이상 두 가지 중에 첫 번째 ‘수행하다 죽지 않는다.’라는 말은

수행 중에 생기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져서는 수행을 계속하지 못합니다.

 

작은 통증이 나타나도 무슨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움을 갖거나 불길한 상상까지 하면 의심이 생기고

들뜬 마음으로 인해 바른 법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다는 신념이 없으면 바른 수행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구절은 의구심에 가득 찬 마음에 믿음을 주는 말입니다.

 

사실 수행을 하면서 죽는 것처럼 더 큰 선업은 없습니다.

죽을 때의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하는 재생연결식으로 전해지므로

알아차리면서 죽은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할 때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전부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거나 그것들은 모두 대상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수행은 잘 안 되는 것이다’라는 말은

수행을 잘하려는 탐욕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더 좋아지기 위해서 수행을 하지만

좋아지려고 하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바라지 않고 없애려고 하지 않는

전혀 해보지 않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수행이 잘 안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누구나 수행을 잘 하려고만 합니다.

수행이 잘 안 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이 더 안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이 잘 안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탐욕이 아닌 관용을 배워야 합니다.

 

좌선을 하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통증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몸에는 풍대가 있어서 끊임없이 진동하기 때문에

이 진동을 인위적으로 멈춘다는 것은 자연히 통증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증은 움직이지 않아서 생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나타날만한 손님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통증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걷는 것보다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는 것이

더 적극적인 수행방법이기도 합니다.

 

몸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진동하는 것인데

몸의 움직임을 인위적으로 억제해서 고요함을 얻으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좌선은 움직이지 않아서 생긴 현상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가를 지켜보는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좌선 중에 나타나는 현상은

나타나도록 되어있는 대상이 나타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불청객이 온 것이 아니고 와야 할 손님이 온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나타난 대상은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입니다.

통증은 여기에 이런 현상이 있으니 와서 보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와서 보라고 나타난 대상은 가서 보아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순리입니다.

 

무엇인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바라면서 보거나, 없애려고 보지 않고

그냥 그것이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칭얼거릴 때는 다 이유가 있듯이

와서 보라고 나타난 대상도 다 이유가 있어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모두 알아차릴 대상이라서 바로 ‘법’인 것입니다.

 

좌선을 할 때 자세가 나쁘면 통증이 생깁니다.

좌선을 시작할 때 바른 자세를 알아차리고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좌선 중에도 이따금씩 자세가 바른가, 몸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가,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좌선이 끝나고서도 자세가 바른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나, 살펴봐야 합니다.

 

좌선이 끝나고 자세를 알아차리는 것은

자기가 모르는 습관적인 자세를 알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좌선을 하면서 누구나 습관적인 자세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쁜 자세로 인해서 통증이 생기거나 병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좌선을 시작할 때 온 몸에 힘을 빼고 난 뒤에

자세가 바른가를 살피고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에 눈을 지그시 감습니다.

졸음이 오기 전까지는 눈을 뜨지 말고 마음으로 대상을 지켜봐야 합니다.

눈을 뜨면 눈으로 모양으로 보게 될 뿐만 아니라 집중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온몸에 긴장을 풀고 턱은 약간 당깁니다.

턱을 들면 목이 아파서 통증이 생깁니다.

허리는 바르게 폅니다.

너무 곧게 펴면 긴장하므로 부드럽게 폅니다.

손은 주먹을 쥐지 말고 무릎 위에 힘을 빼고 올려놓습니다.

 

다리는 반가부좌나 결가부좌가 가능하면 하되

다리가 저리면 두 발을 포개지 않고 가지런히 놓는 평좌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양쪽 무릎이 들린 수행자는 무릎이 들린 곳에 방석으로 받쳐주는 것이 좋습니다.

무릎이 많이 들려있으면 가랑이의 통증이 심해져서 수행을 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좌선 중에 자신의 신체적 특성에 따라 소도구를 사용해도 좋습니다.

무릎을 받쳐주어도 가랑이의 통증이 계속될 때는

손수건을 접어서 꽁지 뼈를 받쳐주고 앉으면 됩니다.

 

바닥에는 방석을 깔되 엉덩이가 닿는 부분을 너무 높여서는 안 됩니다.

방석을 절반 접어서 엉덩이를 받치는 정도가 좋습니다.

엉덩이가 닿는 부분을 너무 높이면 허리에 결정적인 무리가 갑니다.

그래서 매우 좋지 않습니다.

경험이 많은 수행자는 방석을 받치지 않고 그냥 바닥에 앉아서 수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견딜 수만 있다면 딱딱한 바닥에서 좌선을 하는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 수행자의 허리가 좋지 않으면 벽에 기대어도 됩니다.

바닥에 앉기가 어려우면 의자에 앉아도 됩니다.

무릎이 아프면 다리를 뻗고 앉아도 됩니다.

단지 몸이 닿는 부분이 많으면 긴장이 풀려서 졸음이 오는 것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바닥에 앉은 것이 불편이 없지만

서양인들은 바닥에 앉아보지 못해서 좌선을 할 때 상당한 고통을 겼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말을 탄 자세의 의자를 만들어서 앉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바닥에 불편 없이 앉을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진실한 수행자는 어떤 상태에서나 수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수행을 합니다.

 

좌선을 할 때의 자세는 너무 힘을 빼도 좋지 않고, 너무 힘을 주어도 좋지 않습니다.

너무 힘을 빼면 자세가 무너져서 허리가 굽어지거나 목이 굽어집니다.

그러므로 약간의 일정한 긴장이 필요합니다.

또 너무 바르게 하려고 힘을 주면 몸이 경직되어서 통증이 생기며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세는 현악기의 줄을 조율하듯이 적절한 힘을 주어서 긴장을 유지해야 합니다.

 

좌선을 하는 시간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든 행위를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행주좌와를 두루 하는 수행이라서 한 가지 수행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명상원에서는 한 시간 좌선에 한 시간 경행을 기준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좌선을 지나치게 오래해서는 안 됩니다.

 

몸이 만들어지고 집중이 필요한 경우에 2-3시간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때는 이렇게 앉을 필요가 있어서 하는 것이므로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오래 앉아 있는 것으로 수행을 잘 하려고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오래 앉아있는 것으로 수행을 과시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을 시작하면 얼마동안 몸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일정기간동안 통증을 이겨내면 차츰 앉아있는 것이 괴롭지 않을 때가옵니다.

그래서 얼마간은 통증의 고통을 견뎌내야 합니다.

 

통증은 인내를 실험할 수 있는 좋은 대상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통증을 참을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천천히 알아차리면서 자세를 바꾸면 통증은 이내 사라집니다.

이때 통증은 움직이지 않아서 생긴 현상이라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조금만 아파도 자세를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아픔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만큼 알아차린 뒤에

그래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어떤 스승은 한 시간 좌선에 두 번 이상은 자세를 바꾸지 말 것을 권하기도 합니다.

한 번 자세를 바꾸기 시작하면 자꾸 바꾸기 때문입니다.

 

수행자가 자세를 바꿀 때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바꿉니다.

먼저 통증으로 인해서 화를 내고,

다음에 바꾸려하는 강한 욕망을 일으키고,

그리고 계속 자세를 바꾸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이때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미세한 번뇌에 속하므로

수행자가 자세를 바꾸는 것 하나에 세 가지 번뇌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리면서 자세를 바꾸면 번뇌로 바꾸는 것이 아니고

수행을 하면서 바꾸는 것입니다.

이처럼 알아차림 하나에 번뇌가 지혜로 바뀝니다.

 

통증은 아픈 증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증은 아팠을 때의 명칭이므로 관념에 속합니다.

통증의 실재는 통증이 아니고 찌르고, 당기고, 쑤시고, 화끈거리는 등등의 느낌입니다.

 

통증이 일어났을 때는 이런 아픔을 상징하는 통증이란 명칭을 알아차릴 것이 아니고

실재하는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통증은 관념적인 것으로 부정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즉시 괴로운 느낌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실재하는 느낌인 찌르고, 당기고, 쑤심은 알아차릴만한 대상입니다.

통증이라고 하면 무조건 부정적으로 반응하지만

실재하는 느낌은 알아차릴 대상이기 때문에 견딜만한 합니다.

이것이 통증이라고 생각하면 계속해서 아프다는 마음에 빠집니다.

그러나 통증의 실재인 찌르고 당기는 느낌은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서 지켜볼만 합니다.

 

통증이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통증은 알아차릴 강력한 대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통증은 오히려 알아차리기에 좋은 대상입니다.

통증이 있으면 망상이 일어나지 않고, 졸음이 오지 않습니다.

이것만 해도 통증의 역할은 매우 큰 것입니다.

 

강한 통증은 괴로움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미세한 통증은 오히려 수행자를 깨어있게 합니다.

또 이러한 고통 속에서 인내하는 힘을 키우고 지혜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통증을 어떻게 알아차리느냐가 수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큽니다.

 

물론 일부러 통증을 만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단지 수행의 과정에서 생긴 통증은 알아차릴 훌륭한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상도 언젠가는 알아차림과 집중의 힘이 생기면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통증이 나타났을 때 알아차려서 좋은 수행의 과정으로 삼아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 초기에 통증을 이겨내지 못하면 수행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인내가 열반에 이르게 한다고 합니다.

의지가 나약한 사람은 조그마한 아픔에도 두려움을 갖고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통증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수행을 계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좌선 중에 통증이 나타나면 먼저 통증이 나타난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통증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미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부정적인 반응을 한 것입니다.

반응을 했다는 것은 알아차림을 놓치고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증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린 뒤에

통증 때문에 반응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