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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16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2:0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지혜가 있는 자는 잘못된 습관을 버릴 줄 알고

좋은 습관은 계승합니다.

그러나 무지하면 잘못된 습관대로 살기를 원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는데 바뀌기를 원치 않는 것은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지와 게으름은 같은 것입니다.

무지는 게으름으로 그치지 않고 게으름을 집착합니다.

 

그래서 고통을 머리에 이고, 품에 안고, 등에 짊어지고

손으로 끌면서 절뚝거리면서 살아갑니다.

이 길은 끝이 없습니다.

이 길은 자신이 좋아서 선택한 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끝없는 이 길을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고통이 끝나는 지혜로운 길을 가시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통증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수행자의 임무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증과 싸워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는 전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타난 통증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통증도 뜨거운데 통증으로 인해 마음까지 뜨거워지면

대상을 바르게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뜨거운 것은 몸이지,

일하는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통증을 알아차리면 오히려 통증이 더 증가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막연하게 느끼던 통증을 구체적으로 겨냥하기 때문에

아픔이 더 가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켜보는 힘에 대한 반작용입니다.

 

알아차릴 때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는다고 해도

얼마간은 힘이 들어가기 때문에 통증이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과정입니다.

 

통증은 없어지기 전에 더 강해집니다.

마치 촛불이 꺼지기 전에 더 불이 밝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통증이 계속될 때는

‘아! 지금 통증이 없어지려고 더 강해졌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되면 ‘아! 이번에는 정말 없어지려고 더 강해졌구나!’

하고 계속해서 알아차림을 지속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계속되면 나중에는 참고 견딘 것이 억울해서

자세를 바꿀 수 없는 때가 오기도 합니다.

 

이처럼 견딜 수 있는 한 알아차림을 계속하면

수행자의 정신적 상태가 한층 더 고양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1단계 지혜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은 알아차릴 대상이고, 마음은 대상을 아는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몸은 몸의 영역에서 하는 역할이 있고,

마음은 마음의 영역에서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이 아플 때 마음까지 아프지 말아야 합니다.

이때 아픈 것은 몸이지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을 하나로 생각하거나,

이것이 내 몸이라고 생각하면 즉각 마음까지 아픕니다.

그래서 이때 통증에 반응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몸이 아플 때 즉각 마음까지 아프면 대상을 바르게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일을 하는데 일하는 마음이 아픈 상태에서는 대상을 바로 보는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몸이 아플 때 마음까지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싫어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통증의 성품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통증은 오히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나도록 하는 대상입니다.

 

통증의 바른 성품이란 무상하다는 것과, 불만족이라는 것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몸의 통증은 몸의 영역에서 일어난 것이니

마음의 영역까지 반응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역을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으로 구별합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에 관한 알아차림에서는

이것이 물질적 영역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적 영역에 속하는 것인지 구별해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물질적 현상으로 인해서 생긴 정신적 현상이 침해받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신적 현상으로 인해서 물질적 현상이 침해 받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해서나 남에 대해서나 이것이 물질적 현상일 때는

그냥 물질적 현상으로 끝내야 합니다.

그리고 정신적 현상일 때는 그냥 정신적 현상으로 끝내야 합니다.

 

몸의 이러한 통증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몸에서 일어난 육체적인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정신적 느낌으로 발전합니다.

만약 ‘괴롭다’고 했을 때는 일차적으로 육체적인 느낌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아이고 괴로워 죽겠네.’라고 발전합니다.

 

그냥 괴롭다가 다음에는 괴로워 죽겠다고 하는 정신적 느낌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몸이 아플 때 지켜보는 마음까지 아픈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살지만 수행자는 이렇게 살지 않기 위해서 지금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통증은 없어질 조건이 성숙되면 없어집니다.

그렇지 않고 인위적으로 없애려고 하면 자세를 바꾸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기 어려운 통증이 아니고서는 계속해서 지켜봐야 합니다.

 

이때 자세만 바꾸면 없어질 수 있다는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자세만 한번 바꾸면 없어질 수 있는 통증을 지켜본다는 것은 인내를 시험하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래서 자세를 바꿀 수도 있다는 배수진을 치고 지켜보면 참는 힘이 생깁니다.

 

수행자 여러분!

통증 때문에 반응한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반응한 마음이 사라진 것을 다시 알아차립니다.

통증 때문에 반응한 마음을 알아차리면 있던 마음은 사라지고 알아차리는 새로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다시 사라진 마음을 알아차리면 아무 마음도 없습니다.

이것이 통증 때문에 반응한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짧은 순간에 일어난 마음이 사라진 것을 아는 것은

마음의 소멸을 보는 것으로 바로 법을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통증 때문에 반응한 마음이 사라진 마음을 본 뒤에 다시 통증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고,

가슴이나 머리로 가서 통증으로 인해 생긴 느낌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강한 통증일 경우에는 계속해서 통증에 마음을 고정할 수도 있고,

가슴이나 머리에서 생긴 느낌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강한 통증을 알아차릴 경우에는 통증 속으로 들어가서 찌르고 당기는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통증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통증을 표피적으로 보지 말고 통증이 일어난

그 자리로 들어가서 그 실재하는 느낌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이때 통증을 없애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통증을 법으로 계속해서 지켜봐야 합니다.

 

통증을 단지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오직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기 때문에

선입관이 없이 단순하게 대상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통증은 단지 통증이지 나의 통증이 아니라고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통증은 원인과 결과로 연속되는 느낌이라고 알 게 됩니다.

 

통증 속으로 들어가서 찌르고 당기는 느낌을 알아차렸을 때 통증이 더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차츰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통증의 조건과 알아차리는 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태로 진행되거나 그냥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통증은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통증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통증을 알아차렸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라질 만한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사라지는 것이므로 수행자는 어떤 결과를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통증 때문에 반응한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통증 속으로 가서 통증을 알아차리지 않고

가슴에서 통증으로 인해 반응한 느낌을 알아차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통증이 매우 견디기 어려울 때는 통증을 지켜보는 것보다 가슴에서

통증으로 인해서 생긴 느낌을 알아차리면 약간 완화된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가슴의 느낌은 통증이 나타난 곳보다 느낌이 격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슴에서 통증을 알아차리면 간접적으로 통증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가슴의 느낌을 전면에서 알아차리면 더욱 약화된 통증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항상 마음을 전면에 두고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리기 때문에

몸에 있는 통증을 전면에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고통스러운 느낌에서 견딜만한 느낌으로 바뀝니다.

 

만약 이러한 방법으로 수행을 해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는 호흡을 완벽하게 겨냥해야 합니다.

이때는 통증으로 인해 격렬해진 호흡에 완전하게 밀착을 해서 알아차리면

통증의 느낌을 견딜 수 있습니다.

 

이때도 통증은 있지만 마음이 호흡에 완벽하게 밀착하면

호흡이 1순위이고 통증은 2순위가 되어 통증이 훨씬 경감됩니다.

이때는 호흡에 강력한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으며 이렇게 집중을 하면 나중에는 무통이 오기도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옛말에 ‘쑥뜸이 우화등선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쑥뜸을 하면 신선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쑥으로 살 태울 때 고통을 참고 견디면 신선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옛말을 위빠사나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아프기 때문에 알아차림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너무 아프면 다른 망상이 들어올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대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아픔으로 인해 알아차림을 지속할 수밖에 없고

강력한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집중의 힘에 의해 결국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좌선을 할 때가 아니고 병이 나서 아프거나 사고를 당했을 경우에도

견디기 어려운 통증이 있으면 호흡 하나에 마음을 강력하게 집중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너무 아플 때는 상대적으로 더 강한 알아차림과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어

강력하게 집중을 하게 되고 그 끝에 무통의 단계가 오기도 합니다.

 

이상과 같이 통증을 알아차릴 때, 일을 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한 번에 그쳐서는 안 되며 이따금 마음을 알아차릴 수도 있고,

계속해서 마음자리에서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통증을 알아차리는 첫째 방법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이 방법은 통증을 가슴에서 느낌으로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첫째, 통증이 있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둘째, 통증 때문에 반응한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셋째, 통증 때문에 반응한 마음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립니다.

넷째, 통증으로 인해서 생긴 느낌을 가슴에서 알아차립니다.

다섯째, 가슴에서 거친 느낌, 중간 느낌, 미세한 느낌이 사라진 뒤에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여섯째, 통증으로 인해서 생긴 느낌을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립니다.

 

다음에 통증을 알아차리는 둘째 방법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이 방법은 통증 속으로 들어가서 직접 통증을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첫째, 통증이 있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둘째, 통증 때문에 반응한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셋째, 통증 때문에 반응한 마음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립니다.

넷째, 통증 속으로 들어가서 실재하는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마지막으로 통증이 강력할 때 알아차리는 셋째 방법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이 방법은 견딜 수 없는 강력한 통증일 때는 호흡에 강력하게 집중해서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첫째, 통증이 있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둘째, 통증 때문에 반응한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셋째, 통증 때문에 반응한 마음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립니다.

넷째, 통증으로 인해 격렬해진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이상이 통증을 알아차리는 다양한 수행방법이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러한 수행방법은 기본형이고,

여러분들 스스로가 이러한 기본형을 토대로 얼마든지 바꾸어서

수행을 해나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통증이 생겼을 때는 통증과 싸우지 마시고

통증 때문에 반응한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다양한 형태의 수행방법을 사용하셔서 통증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시기 바랍니다.

 

그 통증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 통증은 결국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통증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