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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17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2:08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과 사회운동은 다릅니다.

수행은 사회운동이 아니지만 사회운동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먼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뒤에

그 마음을 사회에 환원합니다.

 

하지만 사회운동가는 사회를 바꾸려는 일을 우선합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으면 독을 피울 수 있습니다.

사회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각자의 조건이 다르므로 각자의 길을 갑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먼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택합니다.

이 과정은 매우 자연스럽고 궁극의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에 옳고 그름이 없으므로

수행자는 수행을 하고 사회운동가는 사회운동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이 가장 본질적인 사회운동에 속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좌선 중에 졸음이 왔을 때 알아차리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을 할 때 저녁에 잠자리에서 졸음이 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나,

좌선 중에 졸음이 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나 알아차리는 방법은 같습니다.

 

그러나 저녁에 잠자리에서 졸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잠을 자기 위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좌선 중에 졸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자지 않기 위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적은 다르지만 두 가지 수행을 할 때 어떤 결과가 있거나

나타난 그대로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좌선 중에 졸음이 오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수면욕은 다섯 가지 욕망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본능적으로 잠을 자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잠을 자려고 하는 불가피한 본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본능과 싸워서 이기는 수행이 아니고

단지 본능이 있는 것을 알아차려서 본능을 뛰어넘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본능이 생길 때마다 본능적 욕망과 맞서려하지 말고,

단지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예사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졸음이 있는 것을 알아차려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 버리자’ 라고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나 먼저 있다고 인정하고 알아차리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졸음이 올 때 "지금 졸음이 오구 있구나."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은 실재하는 현상이고, 실재하는 모든 현상은 하나 같이 진실한 것들입니다.

졸음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엄연한 실재입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이것으로 인해 고통을 겪지 말아야 합니다.

 

잠은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필요할 때 자야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해서 잠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졸음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고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졸음도 하나의 법(法)에 속합니다.

 

수행자가 어떤 대상이나 알아차리게 되면 법으로 바뀌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무지라서 거의는 불선행을 하기 마련입니다.

무엇이나 알아차린다는 것은 그 순간부터 지혜를 동반하며,

모른다는 것은 무명의 어두움에 감금된 것입니다.

 

누구나 깨어있을 때는 움직임이 많은데 좌선 중에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졸음이 옵니다.

그래서 졸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졸음이 올 때는 졸음과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잠을 청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스스로 알아차림을 포기하고 잠을 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졸음에 스스로가 항복하는 것입니다.

잠을 자거나 자지 않거나 졸음에 항복을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수행자가 할 수 있는 의무를 충실히 하고

어떤 결과가 오거나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졸음과 싸우면 오히려 더 빨리 잠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잠을 자거나 자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끝까지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행 중에 잠은 잘 수도 있고, 혹은 자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졸릴 때 알아차림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릴 수 있는 만큼 계속해서 알아차리다가 잠을 잔다면

이러한 잠은 오히려 유익합니다.

만약 이렇게 잔다면 짧은 시간에 숙면을 취할 수 있어서 더욱 좋습니다.

 

짧은 순간의 토막잠이라고 해도 숙면을 취할 수 있다면

깨어나서 더 맑은 마음으로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혼미한 상태에서 졸음을 알아차리는 것도 유익한 일이고,

약간 토막잠을 잔 뒤에 맑게 알아차리는 것도 유익한 일입니다.

이 두 가지에는 모두 알아차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여러 차례나 말씀드린 것처럼 잠을 자는 것은 죽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잠을 잘 때 어떻게 알아차리느냐가 다음 생을 결정하기 때문에

평소에 잠을 잘 때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과연 어디까지 알아차림을 계속할 수 있는가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죽음의 마음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대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평소의 습관이 죽음의 마음을 결정하므로 평소의 수행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수행자들이 이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경전에서 보면 죽기 전에 계속해서 알아차려서 도과를 성취한 예가 매우 많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좌선을 한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을 알아차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망상, 통증, 졸음은 좌선 중에 나타나는 가장 큰 손님입니다.

그래서 잠을 없애려고도 하지 말고 잠을 바라지도 말아야 합니다.

졸음이 올 때 잘 살펴보십시오.

이 두 가지 중에 하나가 있을 것입니다.

 

수행자들이 대게는 잠을 자지 않으려고 저항을 하게 되는데

저항을 하면 저항을 할수록 더 깊은 잠에 빠지게 됩니다.

저항하는 힘은 약하고 쏟아지는 잠은 더 강하기 마련입니다.

저항을 하면 잠을 더 강하게 한다는 것을 꼭 아셔야 합니다.

무엇이나 제어하려고 하면 가해진 힘만큼의 반발력을 갖습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잠이 오는 원인은 매우 많습니다.

잠은 대상을 겨냥하는 알아차림이 약해서 옵니다.

잠은 게으르기 때문에 옵니다.

잠은 잠을 좋아해서 옵니다. 그래서 잠이 잠을 부릅니다.

잠은 의욕이 없고 집중하는 힘이 없어서 옵니다.

잠은 피곤해서 옵니다.

그래서 일을 많이 하면 당연히 잠이 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잠은 음식을 많이 먹어서도 옵니다.

 

잠은 앞서 말씀드린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을 하지 못했거나,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해서 옵니다.

잠과 저항하면 더 잠이 옵니다.

좌선 중에는 너무 어두운 곳에 있어도 잠이 옵니다.

허리를 벽에 기대고 앉아도 잠이옵니다.

 

그러나 이런 원인을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냥 졸음이 오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원인은 언제나 늘 많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단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라는 사실만 알면 됩니다.

 

일반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이 약하면 졸음에 떨어집니다.

그렇지 않고 알아차릴 때는 대상에 밀착하면 졸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수행을 시작하면 누구나 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수행 경험이 많으면 잠을 자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수행을 많이 했다고 해도 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졸음에 떨어집니다.

 

잠은 집중이 될 때 알아차림과 노력이 부족해도 옵니다.

수행은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다보면 노력과 알아차림이 약해지고

점점 집중의 힘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졸음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집중과 졸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붙어있습니다.

만약 집중의 힘이 커져서 졸음이 올 때 노력을 해서 알아차리는 힘을 강화하면

다시 맑은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할 때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의 세 가지의 영역을 가지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의 기능이 떨어지면 바른 수행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서 이 세 가지를 이끄는 것이 노력입니다.

 

노력을 해야 알아차릴 수 있고 계속 더 노력을 해야 알아차림을 지속하여

집중의 힘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집중이 필요이상으로 더 커지지 않고 균형을 이룬 상태로

수행을 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노력과 알아차림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졸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때로는 좌선 중에 혼미한 상태에서 깜짝 놀라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수행이 발전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때가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의 균형이 깨져서 졸음이 오려고 할 때의 현상입니다.

그래서 졸음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노력과 알아차림이 있어서

깜짝 놀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수행에 대한 사명감이 없는 상태에서 무기력하면

의욕이 없는 상태라서 쉽게 졸음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수행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을 많이 해서 피곤해도 졸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불필요한 일을 줄여야 합니다.

특히 경행을 할 때 너무 힘을 들여서 집중을 하면 피곤해져서

좌선을 할 때 쉽게 잠에 빠집니다.

음식을 많이 먹어도 식곤증으로 잠이 오기 때문에 적게 먹고 많이 씹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일반적으로 졸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 중에 하나입니다.

졸음은 이미 마음이 알아차리는 힘을 잃었기 때문에 수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잠을 자버리자는 본능적 욕망과,

자지 말아야 한다는 수행의 알아차림 사이에서 고통을 겪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졸음이 왔을 때 아무런 저항 없이 노력과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어느 순간에 정신이 맑아지고 졸음이 씻은 듯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졸음을 이겼다는 승리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순간을 경험한 이후에

언제 졸음에 떨어졌는지도 모르게 잠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냐하면 졸음을 극복했다는 승리감과 즐거움에 순간적으로 알아차림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순간에 깊은 잠에 떨어지고 맙니다.

 

바로 여기서 수행자가 주의해야 합니다.

수행 중에 장애를 극복했다고 좋아하는 순간에는 즉시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할 때 무엇이나 좋아하는 것은 감각적 욕망이라서

수행자가 가장 경계해야할 대상입니다.

 

좌선을 할 때 눈을 감고합니다.

그래서 졸리기 마련입니다.

눈을 뜨면 눈으로 정보가 들어와서 마음으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눈을 감습니다.

눈을 감고 좌선을 하는 것은 눈으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대상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눈을 감기 때문에 좌선을 시작하고서부터 필연적으로 졸음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졸음이 올 때는 눈꺼풀이 무겁고 몸은 나른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알아차리면 희미합니다.

이런 것들이 잠자기 전에 잠이 가지고 있는 알아차릴 특성입니다.

이때 졸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상을 분명하게 겨냥해야 합니다.

겨냥이란 마음을 대상에 기울이는 알아차림입니다.

이것이 대상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좌선 중에 졸지 않으려면 대상을 분명하게 잡아서

대상에 마음을 모아서 겨냥해야 합니다.

만약 대상이 분명치 않으면 쉽게 싫증이 나고 졸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대상을 겨냥한 다음에 그 대상을 지속적으로 주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대상을 막연하게 주시하는 것이 아니고 대상의 변화와

대상의 성품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가 주시하는 대상을 그냥 막연하게 알아차리지 말고

그것들의 특성을 살펴야합니다.

이렇게 살피게 되면 마음이 대상에 밀착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릴 때 싫증을 내지 않고 재미를 붙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볼거리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막연하게 대상을 대하고 있으면 마음이 흥미를 잃어서

다른 것으로 달아나 버려 망상이 오거나 졸음에 떨어집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