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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18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2:1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을 좋아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하지 못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자기 부류가 아니면 배척합니다.

 

여기에는 옳고 그름의 이성적 판단이 작용하지 않으며

오직 감성적인 판단만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선하지 못한 사람이 불편하여 어울릴 수가 없고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 불편하여 재미가 없고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이것이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모두가 살아온 관행대로 삽니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사람이 선한 사람과 어울리려고

시도하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졸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어 좌선 중에 호흡을 알아차릴 때

‘일어남’과 ‘꺼짐’이라는 생멸의 특성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호흡이 일어나고 꺼지는 것은 그냥 막연하게 일어나고 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날 때는 일어나는 것의 특성이 있고 꺼질 때는 꺼지는 것의 특성이 있습니다.

일어날 때는 공기가 부푸는 느낌이 있고 꺼질 때는 공기가 수축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또는 호흡의 강약과 장단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면밀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호흡을 대상으로 선택했을 때 분명하게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처음에 ‘일어남’ 하나만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이때 일어남의 움직임 하나만 알아차리고 차츰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다음에 일어날 때는 팽창하는 공기의 압력이나 단단함, 부드러움, 뻐근함, 따뜻함,

그리고 호흡의 속도와 강약 등등의 많은 현상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호흡이 항상 다르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매번 같은 호흡이라고 생각하면 이내 싫증이 나고 마음은 대상에 머물지 않습니다.

 

같은 호흡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 이것을 알게 되면 모든 대상이 다 새로운 것이며,

그래야 마음이 재미를 붙여서 대상에 머물러 졸지 않습니다.

 

처음에 알아차리는 힘이 없을 때는

이렇게 호흡의 ‘일어남’ 하나만을 알아차려서 마음을 힘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아직 알아차리는 힘이 없을 때는 많은 것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일어남’ 하나만 알아차리다가 힘이 생기면 이제는 ‘꺼짐’ 하나만 알아차립니다.

그러고 나서 다음 단계로 ‘일어남, 꺼짐’을 알아차리십시오.

 

이렇게 일어남과 꺼짐을 알아차린 뒤에 다시 ‘일어남, 꺼짐, 쉼’으로

호흡과 호흡 사이의 휴지를 포함해서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이런 방편은 수행자가 얼마든지 계발하여 실천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어남, 꺼짐’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다가

‘쉼’에 와서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그만 마음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바로 이때 망상이나 혼침에 빠집니다.

 

마음은 워낙 빠르기 때문에 조그만 틈에서도 못 견디고 달아납니다.

원래 마음이란 이런 것이므로 이런 마음을 어떻게 하려고 할 것이 아니고

이런 마음의 특성을 살펴서 마음의 특성에 맞게 대응해 주어야 합니다.

 

마음은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 자기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쪽에서 조건을 만들어서 마음을 편하게 이끌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의 방편입니다.

 

사실은 마음을 이렇게 길들이는 일이 수행의 일차적 목표이기도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마음을 길들이는 방법은 알아차림인데

바로 이 알아차림은 치우침이 없이 공평한 것이며 무저항이며 각성된 것입니다.

 

이처럼 처음에는 대상에 대한 정확한 겨냥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주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입니다.

 

수행을 하려면 이러한 기본적인 요소를 충실히 해야 합니다.

그냥 막연하게 수행을 해서는 발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수행을 잘못하면 장애가 생겨서 수행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단 한순간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정확하게 대상을 겨냥하고

두 순간이라도 정확하게 그 대상을 지속해야 합니다.

 

수행은 거의가 장애이고 잘 되는 것은 잠시입니다.

항상 장애 속에서 수행을 하는 것이며 장애 속에서 수행이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잘 되기를 바라지 말고 무엇이나 현재 일어난 것을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수행자는 언제나 무엇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하고 있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수행을 잘 하려고 하는 것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수행을 잘 하려고 하면 욕망으로 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이나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상에 빠지지 않고 대상의 성품을 알아차리는 것을 관(觀)한다고 합니다.

이때 대상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대상을 아는 마음이 대상에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아는 마음은 어떤 대상이 나타나더라도 초연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이고 이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잠은 누구나 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허물이 아닙니다.

다만 잠이 올 때 잠이 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허물입니다.

알아차렸는데도 잠이 오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잠은 부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어떤 수행자에게나 지난한 과제입니다.

그래서 잠은 항상 함께 가는 대상이고 그리고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졸음은 모든 수행자에게 항상 중요한 숙제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나 제자들의 말에서도 수행 중에 졸음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됩니다.

잠은 우리의 기본적인 욕망이기 때문에 잘수록 더 자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욕망의 속성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하루에 4시간을 주무셨습니다.

사실 집중수행을 하는 경우에는 마음이 계속해서 깨어있기 때문에

오히려 잠을 잘 수 없는 상태가 오기도 합니다.

 

수행자가 잠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스스로 무기력해집니다.

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부족해서 나타나는 현상이 끊임이 없습니다.

이때는 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정도의 잠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충분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정신력과 잠에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수행 중에 졸음이 오는 것은 다섯 가지 장애 중에 세 번째인 혼침과 게으름으로 인한 것입니다.

 

혼침과 게으름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게으름이 더 생겨나도록 조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미 생겨난 게으름을 더 드세게 하는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게으름이 게으름을 자양분으로 먹고 더 성장합니다.

그래서 잠이 잠을 더 불러들입니다.

 

12연기에서 모든 것들의 근본원인은 갈애와 무명이라고 합니다.

갈애는 바라는 것이고 무명은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이때 어리석음을 또 다른 표현으로 하면 게으름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게으름에는 반드시 혼침이 따르기 마련이라서

수행을 할 때 혼침과 게으름을 함께 부르기도 합니다.

 

불선업 중에서 무지라고 하는 게으름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다음 원인은 욕망입니다.

게으름은 이토록 가장 큰 불선업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그냥 단순한 게으름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불선업이므로 악업으로 봐야 합니다.

게으름에는 선업이 붙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악업은 반드시 악업의 과보를 받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게으른 것을 좋아해서 게으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항상 게으름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게으름의 상태는 무지의 상태이기 때문에 지혜가 나지 않아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환경적 요인이 있거나 축적된 성향에 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자신이 분명하게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알았으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나태한 상태로 둔 채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부단한 노력이 없이는 게으름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과 함께 경전을 읽어 삶의 숭고한 뜻을 항상 새겨야 합니다.

게으름에 빠진 것과 피곤해서 휴식을 취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일상의 잡다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과연 본인이 깨어나려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졸음에 대한 수행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졸음이 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둘째, 무기력한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셋째, 나태한 상태의 몸을 알아차립니다.

눈꺼풀이 무겁고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넷째, 지나치게 졸음이 올 때는 살짝 눈을 뜨고 바닥을 응시합니다.

다섯째, 그래도 졸리면 서서 수행을 하거나 밝은 곳으로 나가서 경행을 합니다.

여섯째, 졸음에서 깨어나면 좋아하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일곱째, 의식이 맑아지면 가슴이나 배의 호흡이나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다음은 졸음에 대처하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과식이 그 원인이라고 알고, 음식을 탐심으로 먹지 말고

적은 양을 취해서 꼭꼭 씹어 먹어야 합니다.

둘째, 좌선 중에 졸릴 때는 자세를 바꿉니다.

지나치게 졸리면 눈을 뜨거나, 서서 수행을 하거나 경행을 합니다.

 

셋째, 밝은 곳의 빛을 알아차립니다.

어두운 곳에 있지 말고 밝은 곳에서 빛을 봅니다.

 

넷째, 실내에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서 수행을 합니다.

다섯째, 평소에 훌륭한 도반을 사귑니다.

잠자기를 즐기지 않는 좋은 도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에 대한 사명감과 흥미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여섯째, 수행에 대한 적절한 대화를 합니다.

수면의 불이익과 깨어있음의 이로움에 대한 대화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음은 부처님께서 졸음을 극복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졸음의 원인이 되는 생각을 떨쳐버릴 것.

둘째, 이전에 들은 가르침을 상기할 것.

셋째, 가르침을 자세하게 반복해서 생각하며 외울 것.

넷째, 양 귓불을 잡아당기고 팔을 문지를 것.

다섯째, 자리에서 일어나 찬물로 눈을 씻을 것.

여섯째, 밝은 빛에 주의를 기울일 것.

일곱째, 경행을 할 것.

여덟째. 사자와 같이 누워서 쉬되, 일어날 시간을 정하고 잠에 들 것.

이상은 부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여기서 사자와 같이 눕는다는 것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눕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일어나겠다는 것은, 마음이 얼마 뒤에 일어나겠다는

결정을 한 뒤에 잠을 자라는 뜻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혼침과 게으름에 빠지면 물에 이끼와 풀이 덮여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물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혼침이 사라지면 얼굴을 비춰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게으름은 올바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혼침과 게으름에 빠진 것은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혼침과 게으름이 사라지면 감옥에서 나와 해방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수행에서는 혼침과 게으름을 가장 경계합니다.

잠을 자버리면 상황이 끝나므로 더 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불필요한 일을 만들어서 하지 않습니다.

피곤하면 졸리기 때문입니다.

 

이상 졸음에 대한 여러 가지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기본 자료를 토대로 여러분들이 스스로 노력해서 수행을 하시면

졸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졸음과 싸우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졸음이 올 때 끝까지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는 것과 졸음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매번 졸음을 알아차리면 차츰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한 순간의 졸음이 한 순간의 죽음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 졸음을 알아차려서 여러분들이 더 밝은 대상을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