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사람을 보지 말고 일의 본질을 보아 법의 성품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건을 보지 말고 사건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눈이 있지만 무지하면 사람이나 사건을 보는 마음이 표피적인 것에 머뭅니다.
그러나 눈이 밝아서 지혜가 있으면 대상의 실재하는 내용을 봅니다.
사람이나 사건의 겉모습은 관념이지만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원인과 결과라는 실재뿐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에 연연하면 차별을 일으켜 번뇌가 생기지만,
실재하는 것을 알아차리면 단지 대상일 뿐이므로 걸림이 없습니다.
관념은 거미줄에 걸리지만 실재는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바람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걸림이 없는 바람처럼 흐르게 하십시오.
수행자 여러분!
둘째, 성냄입니다. 성냄은 선하지 못한 마음입니다.
성냄을 한문으로는 진심(瞋心)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진(瞋)이란 눈 부릅뜰 진입니다.
눈을 크게 부릅뜬다는 것은 화를 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이라는 뜻의 진심(眞心)으로 혼돈할 수 있어서
여기서는 진심(瞋心)이라고 하지 않고 성냄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성냄은 불선심으로 대표되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3가지 마음 중에
두 번째인 화를 내는 마음입니다. 이 3가지를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성내는 마음은 하나이지만 기본적으로 항상 3가지 마음이 함께 있으며
이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의 유사한 마음이 함께 일어납니다.
이러한 성냄은 타락, 부패, 결점, 잘못, 병의 바탕이 되는 마음입니다.
성냄은 스스로가 불을 지피는 것으로 자신이나 남을 태워서 황폐화 시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면서 가장 쉽게, 가장 많이 내는 것이 성냄입니다.
성냄의 종류는 많습니다.
화를 내는 것, 분노, 혐오, 피하는 것, 없애려는 것,
질투, 인색, 후회가 모두 성냄에 속합니다.
혐오는 미워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냄은 단지 성냄만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것들과 함께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단지 성냄만 알아차릴 것이 아니고
성냄에 따르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마음도 함께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누구나 화를 낼 때는 이상의 여러 가지의 마음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냄이 있을 때는 화를 내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성냄도 소멸시켜야 하며
더 이상 다른 것들과 함께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때에 따라서 성냄 하나만을 알아차리지 말고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모든 불선심도 함께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성냄 하나가 각기 다른 상황에서 다양하게 나타는 것을 모두 알아차려야
비로소 성냄을 완전하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나타난 대상을 없애려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러한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이렇게 없애려고 하지 않고 알아차려야 알아차리는 힘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냄에는 어떤 마음이 있는지 종류를 분명하게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모르면 당하지만 알면 당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마음이 불선심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주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치유가 가능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화를 내면, 제일 먼저 화를 낸 자신부터 해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다시 남에게도 고통을 줍니다.
남을 미워하고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면 가장 먼저 자신의 마음부터 사악해집니다.
그리고 화를 내는 마음은 더욱 화를 부추겨서
자신도 제어할 수 없게 되어 결국에는 파국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화는 화를 자양분으로 먹고 더 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가 화를 더욱 키우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화를 제어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것은
화가 화를 불태우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화는 자신의 마음이 분노로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뜨거운 불길에 휩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의 불길입니다.
인간이 살면서 지옥의 불길 속에서 살면,
당연히 죽어서도 같은 불길이 있는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현재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업자성정견입니다.
누구나가 예외 없이 자기가 행위를 하고 반드시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한 결과를 받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선한 마음을 가지면 선한 마음의 결과로
현재에도 선하고 미래에도 선할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선한 마음을 먹은 세계에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생에 어디로 갈 것인가는 지금 현재의 마음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현재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화를 내면 지위가 높거나 명예가 있고 깨끗한 옷을 입었다고 해도 추하게 보입니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세상에서 격리되며 친구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조차도 피합니다.
화는 자신의 고요함과 지혜를 도둑질할 뿐만 아니라 거친 불길에 자꾸 불을 더 지핍니다.
그래서 늘 분노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어리석은 것은 이렇게 분노를 나타내면서 살아야
사는 것처럼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좋아서 화를 내고, 화를 낸 것이 괴로움인데 이 괴로움을 즐겨서 더 화를 냅니다.
그러므로 화를 내는 사람은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흥분한 마음이 지혜를 가리어 오직 뜨거운 불로 자기를 태우는 형벌을 받으면서 삽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런 삶이 과연 행복하겠습니까?
이렇게 사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렇게 사는 사람을 한 가정이나 사회에서 환영하겠습니까?
그래서 화는 가장 큰 피해를 스스로에게 주는 것입니다.
상대가 화를 냈을 때 같이 화를 낸다면 화를 내는 사람이나 하등에 다를 것이 없습니다.
화는 화를 내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상대의 화를 가져올 이유가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화를 공연히 받아들여서
자신도 고통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때 상대의 화로 인해 똑같이 자신도 화를 낸다면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유신견 때문에 내가 반응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화를 낸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화를 낸 마음을 알아차리면
이 마음이 순간의 마음이지 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가 내게 화를 내면 나를 무시했다고 판단해서 똑같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도 탐욕으로 인한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그러면 그 순간 뜨거운 불길로 인하여 사물을 바르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화는 가장 천박한 행위이며 항상 손실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바른 견해로 판단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인 관계에서 먼저 화를 내면 이미 상황이 기운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먼저 화를 내는 사람이 상대에게 항복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양보와 항복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양보는 미덕이고 관용이지만, 이때의 항복은 불선업이고 실패이고 좌절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만약 상대가 화를 냈을 때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한다면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무시한 상대도 없고 무시당한 자아도 없습니다.
단지 상대의 축적된 성향만 있을 뿐이지, 여기에는 나도 없고 사실은 상대도 없습니다.
이렇게 자아가 없는 것을 알면 화를 낸 상대도 없고,
오직 화를 내는 상대의 잠재적 성향만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화를 내는 마음은 순간에 일어났다가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일어났다가 사라졌는데
공연히 상대의 화를 기억하여 내가 가지고 갈 것이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이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이기 때문에 이런 수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대상을 분리해서 지켜봐야 합니다.
상대가 낸 화는 상대의 것으로 두어야 합니다.
그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상대가 화를 냈을 때 반드시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화는 화를 낸 사람의 문제로 내는 것입니다.
설령 나 때문에 화를 냈다고 해도 근본원인은
화를 낸 사람의 선하지 못한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화를 낸 사람이 다른 곳에서 어떤 일로 괴로움을 겪었기 때문에
공연히 자신에게 화를 내서 자신의 분노를 해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을 흘기는 격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당부분의 화는 오해로 인한 것이라고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화를 낼 때 내가 그 상대의 화에 걸린다면 자신의 무지 때문이며,
만약 걸리지 않는다면 자신이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화를 당하건 당하지 않건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상대가 내게 화를 내는 말을 하거나 행동을 했을 때는
상대를 사람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를 사람으로 보면 반사적으로 화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 대 사람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때 먼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상대의 마음을 함께 알아차려야 합니다.
화를 낸 상대를 사람으로 보면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내게 화를 낸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거나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미워할 사람이 없이 단지 알아차릴 마음이라는 현상만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사회가 움직이는 것은 사람들과 여러 가지의 제도나 기계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들을 움직이는 사람의 마음이 있어서 이것들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이나 제도를 보는 것은 관념을 보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을 보는 것은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제도를 보면 화를 내게 되지만
이것을 운영하는 사람의 마음을 보면 미워할 대상의 구심점이 약해집니다.
관념은 세속의 관점이라서 번뇌에 걸리지만
실재는 출세간의 관점이라서 번뇌에 걸릴 것이 없이 오직 진실만을 봅니다.
예를 들어 길에는 많은 차들이 운행됩니다.
이때 차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질서를 지키는 차량은 질서를 지키는 마음이 운전을 하는 것이고
질서를 어기는 차량은 질서를 어기는 마음이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가 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운행하는 차량 중에 난폭한 운전을 해서
타인에게 위험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해 즉시 화를 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운전을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때 운전을 잘못한 그 사람을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고,
운전을 한 그 사람의 마음을 보면 한결 미움이 누그러집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구체적 형태가 아니고
대상이 마음이기 때문에 미워할 실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모양을 보면 관념에 걸리고
그 실재를 보면 구체적 형태가 사라지기 때문에
미워할 대상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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