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잘하기 위해서 하는 일을 가지고 화를 내지 마십시오.
잘하려는 일도 상대가 있을 때는 상대의 입장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아무리 바르다고 할지라도 모두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일입니다.
잘하려고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서 화를 냈다면 이것은 탐욕 때문에 화를 낸 것입니다.
이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어떤 일이나 그냥 할 일이라서 해야 합니다.
잘하려고 하기 위해 화를 냈다면
절대 잘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좋은 일을 하려다가 오히려 더 나빠져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하십시오.
모든 일은 좋은 결과가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일하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러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남에게 분노를 나타낼 때 이 분노는 자신을 해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분노는 항상 역효과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분노한 사람이 분노의 대상자에게 ‘그가 추하게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왜 그런가? 비구들이여, 분노한 사람은 분노의 대상자가 훌륭하게 보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이 사람은 저 스스로 화가 나서 분노에 휩싸이고 무너진다.
비록 목욕을 깨끗이 하고, 머리와 수염을 다듬고 깨끗한 옷을 입었으나
분노에 휩싸이면 추하게 보인다.
이것이 분노한 자가 분노의 대상에게 바라는 첫 번째 효과이나,
이것은 화를 낸 사람에게 돌아가는 효과이다.
분노한 사람은 분노의 대상자에게 ‘그가 잠을 설쳤으면’하고 또 바란다.
왜 그런가? 분노한 자는 상대가 숙면을 취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분노한 사람이 화가 나서 분노에 휩싸이고 스스로 무너진다.
양털로 된 침구, 하얀 담요에 꽃으로 수놓은 모포, 가죽 깔개에 발을 친 침대나,
양쪽 끝에 진홍색 방석이 깔린 긴 의자에서도 그는 분노에 휩싸여 잠자리가 불편하다.
이것이 화를 낸 사람에게 돌아가는 두 번째 효과이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화를 낸 자는 그가 증오하는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의도입니다.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은 악한 의도를 내야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삶은 참으로 불행한 삶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마음을 먹은 사람이 스스로 무너져 고통을 받고
자신이 낸 분노로 인해 스스로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먹은 마음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 사람은 화를 내기 때문에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고 피합니다.
그러므로 화를 내서 얻은 이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화를 내는 것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악행을 하는 것이라서
고스란히 그 과보를 받아 사악도의 존재로 태어납니다.
과연 이것은 누가 만든 것이며 이로 인해 누가 고통을 받는 것입니까?
이것은 온전하게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탐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긴 번뇌이며,
일으킨 사람이 이것을 고스란히 받게 되어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성냄은 혐오에 뿌리를 둔 마음입니다.
혐오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혐오는 여러 가지의 층이 있습니다.
가벼운 혐오에서부터 중간 정도의 혐오와 거친 혐오가 있습니다.
분노는 아주 거친 혐오입니다.
우리가 거친 혐오는 쉽게 알 수 있지만 미세한 혐오는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작은 혐오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과정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제대로 알아차린다면 온통 혐오의 지뢰밭 속에서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혐오를 감당하지 못하고
좋아하고 화를 내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겪지 마십시오.
이것은 당신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 순간의 마음이고 그간에 가지고 있었던 축적된 성향의 마음일 뿐입니다.
이미 그것을 보았다면 그것을 본 당신의 마음은 지혜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악한 마음도 당신의 마음이 아니고
그렇다고 지혜를 얻은 마음도 당신의 마음이 아닙니다.
다만 흐르는 물처럼 흐르는 바람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마음들이 연속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에서도 당신은 자유를 얻어야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으로 양극화되어 있습니다.
어쩌다가 덤덤한 느낌이 있지만 이것은 무지의 느낌입니다.
이처럼 애증이 교차하는 속에서 좋아도 편치 못하고, 싫어도 편치 못한 삶을 삽니다.
좋으면 좋아서 편치 못하고, 싫으면 싫어서 편치 못하고, 덤덤하면 심심해서 편치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은 온통 불만족입니다.
좋아도 괴롭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싫어서 괴로운 것은 당연하지만 좋아도 괴롭다면 구조적으로
우리는 불만족 속에서 살아야하고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혐오의 마음은 탐욕을 가진 마음과 다릅니다.
탐욕은 마음이 대상을 좋아하는 것이고, 혐오는 마음이 대상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과 혐오는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붙어서 교차하면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남을 좋아할 때는 탐욕을 가진 것이며, 남에게 화를 낼 때는 혐오를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아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 많으므로 이것을 모두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또 두려운 대상에 대해서도 혐오가 일어납니다.
일반적으로 두려운 대상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두려움을 갖습니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무슨 병이 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갑자기 사고가 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혹시 죽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가지고 있는 재산이 없어질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모든 명예 지위를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이처럼 두려움의 종류는 많고 그것들은 끊이지 않고 계속 됩니다.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두려움과 근심걱정을 없애려고 노력해도 없애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거기에 어떤 절대적인 힘을 구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두려움은 통찰지혜가 있어야만 소멸되는데
아직 통찰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혐오는 탐욕 때문에 일어납니다.
누구나 귀하게 여기는 것을 잃어버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한 사람이나 물건이라도 헤어지거나 잃어버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느낍니다.
그래서 탐욕과 혐오와 슬픔이 한데 어울려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납니다.
슬픔은 혐오하는 마음이라서 바람직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슬픔을 겪는 일이 적어집니다.
이미 지나간 것을 슬퍼하는 것은 또 다른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변하는데 자신의 과거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탐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일에 대하여 슬픔을 갖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 시대에 우비리라는 왕비가 있었습니다.
왕비는 죽을 딸을 슬퍼하며 매일 묘지에 와서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부처님께서 이곳을 지나가시다가 왕비가 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왕비를 불렀습니다.
“아! 사랑스러운 내 딸 지와야! 하고 숲속에서 흐느끼는 우비리 왕비여,
이리 와서 들어보시오.
이 묘지에서 모두가 같은 이름을 가진 지와라는 수많은 사랑스러운 딸들이 화장되었는데 ,
지금 그대는 어느 지와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뒤에 왕비는 과거 몇 생애에서도 왕비로 태어나서
지와라는 딸을 낳아 똑 같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숲속에 와서 지와를 부르며 울었다는 것을 부처님께서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이 어느 때 태어나서 죽은 지와를 부르고 있는가 라고 물은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들의 슬픔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이것을 새로운 것인 줄 알지만
우리는 똑같은 것을 경험하고 똑같이 슬퍼하고 똑같이 비탄에 잠겨서 울부짖습니다.
이처럼 누구나 똑 같이 되풀이 되는 삶 속에서 수많은 이별을 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슬픔과 비탄에 잠겨야 합니다.
과거에도 눈물을 흘렸고, 현재에도 눈물을 흘리고, 이렇게 미래에도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려서
과거나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슬픔과 비탄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죽은 사람으로 인해서 슬퍼할 때 사실은 죽은 그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그 죽은 사람과 가지고 있었던 그 기억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탐욕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죽은 자를 위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는 이미 가야할 곳으로 간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잊지 못하고 슬퍼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탐욕 때문에 슬퍼하는 것을 죽은 자 때문에 슬퍼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문제는 자기 가신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의 마음에 속지 마십시오.
수행자 여러분!
습관대로 살아온 삶을 바꾸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습관이라는 것이 진리라는 것도 확신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만나기도 어렵고, 진리를 가르쳐 주는 지도자를 만나기도 어렵고,
진리를 만났어도 그것을 실천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들은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경전에 근거한 진리를
여러 스승들의 가르침에 근거한 방법으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회는 어느 생에서나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법의 이익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차린 그 순간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수행자가 모든 것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가르침을 따르다 보면 차츰 혜안이 생겨서 법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혐오는 언제나 괴로운 느낌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혐오가 일어나면 갈애와 집착으로 발전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괴로운 느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 혐오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혐오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통해서 들어온 감각대상 때문에 일어납니다.
추한 광경을 보거나, 시끄러운 소리를 듣거나, 역한 냄새를 맡거나,
맛이 없는 음식을 먹거나, 피부로 닿는 괴로운 느낌을 느끼거나,
마음에 내키지 않는 생각을 하면 즉시 혐오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매우 사소한 것이라도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혐오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나치게 덥거나, 지나치게 추워도 혐오가 일어납니다.
모르는 사람과 가벼운 육체적인 스침에 대해서도
즉시 불쾌한 마음과 함께 혐오가 일어납니다.
사소한 남의 잘못에 대해서도 혐오를 일으키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충족시킵니다.
그래서 혐오는 단지 감각대상과 부딪쳐서 일어난 것이지만
이 배경에는 자신이 우월하다는 자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혐오는 더욱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혐오는 일어날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일어납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좋은 소리, 좋은 냄새, 좋은 맛, 좋은 부딪힘,
좋은 생각이 일어나면 혐오가 아닌 감각적 쾌감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부딪쳤을 때는 혐오가 아닌 감각적 쾌락을 느낄 것입니다.
지금까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접수된 좋은 대상은 기억을 해서 집착을 하고,
좋지 못한 대상은 기억을 해서 혐오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혐오는 아니지만
사실은 좋은 기억 때문에 좋지 않을 것을 혐오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즐거운 것만을 경험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더 이상 즐겁지 못하면 즉시 혐오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혐오만 알아차릴 대상이 아니고
좋아하는 것도 함께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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