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자신이 한 일이 여의치 않고 고단할 때는 누구나 습관적으로 짜증을 냅니다.
이때 짜증의 대상은 무차별적입니다.
먼저 자신에 대해 짜증을 낼 수도 있고 가까이 있는 사람이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가까운 사람은 가족이나 하급자일 경우가 됩니다.
이처럼 당신의 가족이 당신에게 화를 낼 때 그가 당신을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는 단지 자신의 조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남편이, 아내가, 자녀가, 부모가, 형제가, 직장의 상사가
당신에게 화를 낼 때는 당신을 기꺼이 그 짜증의 대상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과연 누가 그것을 받아줄 수 있겠습니까?
받아주는 당신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상대의 짜증을 받아주면 먼저 자신에게 이익이 있고 이 이익이 상대에게도 돌아갑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성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잘못된 일이 있을 때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나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나 똑 같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나라는 모양이 없고
이 모양을 형성하는 보이지 않는 마음만 있기 때문에
미워할 내가 없고 미워할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보면 미워할 상대가 없고 상대의 마음만 있기 때문에
미워할 구체적인 모양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나 행위를 보지 말고 그것을 일으킨 그 사람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미움이 한결 수그러듭니다.
남이 나를 비난하거나 내게 화를 낼 때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으면
아직 깨달음을 얻지 않았어도 이미 깨달음을 향해서 가는 훌륭한 수행자가 된 것입니다.
상대가 화를 냈을 때 반응하는 사람은 아만심이 강하고 탐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 뒤에서 숨어있는 것이 바로 나라고 하는 유신견입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고 할 때는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내가 없다고 알아야 비로소 상대의 일로 끝내고 내가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있다고 한다면 모든 일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공연히 남이 나를 미워한다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이 불만족으로 인해서 공연히 남을 미워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의 배경에는 나라고 하는 자아가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아차려서
그것이 과연 나의 마음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화를 내는 원인은 많지만 가장 가까운 원인은 탐욕 때문입니다.
사실 화는 탐욕의 부하입니다.
화는 불선심 중에서도 천박한 것으로 아무 때나 가장 먼저 일어나는 불선심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은 제어가 되지 않습니다.
천박하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는 뒤에서 이러한 마음을 조정하는 탐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탐욕이 화를 다스리는 중간보스입니다.
그리고 화를 내는 근본원인은 어리석음입니다.
결국 어리석음이 가장 뒤에서 모든 불선심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사실은 잘못된 일의 모든 조정자는 성냄 뒤에 있는 탐욕, 탐욕 뒤에 있는 무명입니다.
이 무명은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무명은 사람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명의 반대인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가 화를 낸 마음을 알아차리면 탐욕을 발견합니다.
다시 탐욕을 알아차리면 어리석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어리석음을 알아차려야
비로소 근본원인을 알아차린 지혜를 얻어 불선심이 선심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화를 낸 것 하나만 알아차려서는 완전한 대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를 낸 그 마음을 알아차려서 화를 내게 한 원인인 탐욕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탐욕을 일으킨 마음을 알아차려야,
마지막에 숨어서 모든 것을 조정하는 어리석음을 발견하여 지혜로 바꿀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화를 내는 이유는 한 가지만이 아닙니다.
화는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하여 하나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화는 축적된 성향 때문에 내기도 하고, 누적된 불만이 쌓이면 화를 내기도 합니다.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어도 화를 냅니다.
그리고 화는 이기심과 열등의식이 작용할 때도 나타납니다.
어떤 이유이거나 화를 낸다는 사실은 불선심의 가장 천박한 면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자애가 없습니다.
그러나 화를 내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화가 사라지면 그 순간에 자애의 마음으로 바뀝니다.
수행자 여러분!
처음에는 사소한 것으로 시작한 불만족이 쌓이고 쌓이면
그것이 화로 분출되어서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작은 불만족을 처음에 알아차려야지
그것이 쌓여서 큰 화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교육시킨다고 할 때도 교육을 한다는 목적으로
화를 내고 있지 않은가 살펴봐야 합니다.
교육을 한다는 명분으로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교육이 아니고 자신의 화풀이를 하는 것입니다.
이때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개선되기보다도 오히려 증오를 키울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대상이 어린아이라면 이런 결과로 인해서 비뚤어진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에 대한 평가가 절하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린아이에게 이것이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습니다. 바로 부모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화를 내지 않고 상대를 자애로 보듬어주면
먼저 자신의 마음이 편안해져서 이 마음이 상대를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면 자신도 편안하고 상대도 편안해져서 비로소 이때 교육적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화는 비도덕적인 마음에 기초한 불선업이므로 오직 선한 마음으로 대할 때만이
교육의 효과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화풀이를 하고 있지 않은지.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축적된 성향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이루지 못한 불만족을 화로서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지.
우리는 이것을 항상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싸우는 것입니다.
화는 세속의 방식이고 자애는 출세간의 방식입니다.
세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투쟁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며 자신의 이익과 무관하면 방관합니다.
출세간의 삶은 투쟁이 아닌 관용과 자애입니다.
관용은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을 함께 위하고 자애는 자신과 남을 모두 사랑합니다.
투쟁을 하면 상처와 고통만 남지만 관용을 가지면 자애와 행복과 평화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용과 자애가 수행을 하는 마음입니다.
가장 처절한 싸움은 남과 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신의 선심과 불선심의 싸움이며, 자신의 선과보와 불선과보의 싸움입니다.
이때 우리는 싸우고 있는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기의 선심과 불선심의 부딪힘을 면밀하게 주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알아차리는 그 상태가 바로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불선심에서 선심으로 바뀌어 바른 견해를 가지고 바른 판단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바른 행위를 하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싸워서 이겼다고 해서 결코 이긴 것이 아닙니다.
불선으로 이겼다면 이것은 이기고도 진 것입니다.
오히려 이기고도 불선의 과보를 받기 때문에 이긴 것이 아니고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싸워서 이겼다고 해서 결코 이긴 것이 아니므로 스스로 이 사실을 통찰해야 합니다.
선하기 때문에 졌다면 이것은 지고도 이긴 것입니다.
오히려 지고도 선한 과보를 받기 때문에 진 것이 아니고 이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싸워서 졌다고 해서 결코 진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러분들이 무엇을 이겼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졌다는 말입니까?
그것들은 세속적 관점에서 본 견해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출세간을 지향하는 사람은 세속적 관점에서 이기는 것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지십시오.
그것이 진정으로 당신을 이기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상대를 이기는 것입니다.
맞서지 마십시오.
그것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리십시오.
그것이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기고 지는 싸움에는 끝없는 윤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기는 것도 없고, 지는 것도 없으면
나고 죽는 생사의 괴로움이 끊어져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나타난 모든 대상을 알아차리면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궁극의 열반을 성취합니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무인작용심이라고 하는데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고 아라한의 마음입니다.
모든 것은 단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고,
그것들은 각자의 업으로 진행되는 것이라고 알면
자신의 일이나 세상의 일에 대하여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소한 일이나 큰일이나 상관없이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기고 지는 것이 사라집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툼에는 자신이 우월하다는 자아가 있습니다.
이 자아를 강화해주는 것이 탐욕과 집착입니다.
바로 이 탐욕과 집착 때문에 화를 내고 싸웁니다.
그러므로 탐욕이 일어날 때는 탐욕이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집착으로 발전했다면 집착으로 발전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쩌겠습니까?
우리는 단지 나타난 것을 알아차리는 것 밖에 더 달리 할 일이 없습니다.
만약 성냄이 일어났다면 성냄이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하고, 그 마음이 알기 때문에
언제나 최종적으로 나타난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가장 확실하게 현장에서 대상을 파악하여 해결 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미루지 마십시오.
그 자리에서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면 그 자리에서 해결됩니다.
왜 이것을 미루어서 번뇌를 가지고 갑니까?
미룬다는 것은 회피하는 것입니다.
나타난 즉시 나타난 대상을 바로 알아차리십시오.
모든 번뇌는 한낱 알아차릴 대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은 나타난 대상과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타난 현상을 단지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싸우게 되면 자꾸 싸우게 되고 나중에는 싸우는 것을 좋아서 집착합니다.
그러면 더 큰 불선업을 짓습니다.
수행 중에 대상과 싸우게 되면 대상에 대한 탐욕이 있는 것입니다.
탐욕이 있어서 대상과 하나가 되어 대상에 반응한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 중에 나타난 대상과 싸우지 않는다면
대상에 개입하지 않고 분리해서 지켜본 것입니다.
그러면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가 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합니다.
수행 중에 나타난 대상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좋아하거나
또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통증, 망상, 졸음 이런 것들입니다.
바로 그런 것과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좌선 중에 나타난 모든 것들은, 수행 중에 나타난 모든 것들은,
경행을 할 때 나타난 모든 것들은 모두 알아차릴 대상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그것은 싸워달라고 나타난 것이 아니고 와서 보아달라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나타난 대상이 요구하고 있는 것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와서 보아달라고 할 때 가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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