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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24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2:2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괴롭거나 슬플 때 괴로움과 슬픔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몸으로 와서 계속해서 몸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즐거울 때 즐거움으로 인해서 오는 감각적 쾌락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몸으로 와서 계속해서 몸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덤덤한 상태에서 무기력함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몸으로 와서 계속해서 몸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을 알아차리는 것만이 불선을 선으로 바꾸게 하며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로 가는 문을 닫히게 합니다.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 지혜가 나서

이러한 불선행을 하지 않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둘째,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리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신과 물질을 원인으로 6입(六入)이 일어납니다.

이때의 6입은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입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색, 성, 향, 미, 촉, 법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대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6입, 또는 6문이라고도 합니다.

6문은 여섯 가지의 문에서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tM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감각기관이 밖으로 나가서 대상과 부딪치는 것이 아니고

감각대상이 감각기관에 와서 부딪쳐서 안다는 뜻으로 6입, 또는 6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안과 밖을 구별하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에서 갖는 의미가 매우 큽니다.

마음이 밖으로 나가서 알아차리면 선입관을 가지고 보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대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뜻에서 6입이라고 하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에서 중요한 의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상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6내처라고 하고, 감각대상을 6외처라고 합니다.

이것을 합쳐서 12처라고 합니다.

12처는 12가지 안팎의 장소라는 뜻으로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을 합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분석할 때는 기본이 되는 토대를 원인으로

발생하는 결과가 있기 때문에 장소가 갖는 의미도 중요합니다.

무엇이나 어디서 그냥 생긴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이처럼 일정한 토대를 바탕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부딪쳤을 때 반드시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때 일어난 느낌을 아는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의 느낌이 일어날 때 여러 가지의 마음이 함께 일어납니다.

 

여기서 느낌은 마음의 작용이고, 아는 마음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느낌과 마음은 항상 함께 있습니다.

오온은 함께 일어나서 함께 사라지므로 어느 것이 먼저랄 것이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정신과 물질을 가지고 살면서 무엇이 일어나든 결국 아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항상 최종적으로는 아는 마음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6가지 감각기관과, 6가지 감각대상과, 6가지 아는 마음을 합쳐서

18계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실재하는 것이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서

이것이 바로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이것을 벗어난 것은 상상이며 관념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실재가 아니며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관념의 세계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 실재의 정점에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모든 일을 주도하는 최종적 관문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은 볼 수가 없지만 보이는 몸에 의해서 그 실체가 드러납니다.

마음이 의도를 일으켜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리고 몸이 일으킨 모든 것을 다시 마음이 받아들여서 압니다.

 

또한 마음에 의해서 일어난 느낌, 지각, 의도가

몸을 통해서 나타날 때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도 마음에 의해서 일어나며 모든 것의 결과도 마음이 알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일반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일차적 현상이고,

알아차린 마음을 아는 것은 이차적 현상입니다.

일차적 현상은 알아차림이 있는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고,

이차적 현상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일차적인 것도 마음이 있어서 하지만 이것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아는 마음이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을 대상으로 마음을 새로 내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념처 수행입니다.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는 무슨 일을 시작할 때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말씀드리는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는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언제든지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즉시 알아차릴 수도 있고,

느낌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는 모두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류한 것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 마음에 접근하는 방법을 만든 것입니다.

그냥 마음을 알아차리면 되는 것이지만 마음에 더욱 용이하게 접근하기 위해서

각기 다른 상황을 설정하여 그때마다 마음을 알아차리도록 한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의 종류는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모두 알아차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기본적으로 불선심과 선심을 알아차립니다.

 

불선심은 탐욕이 있는 마음, 성냄이 있는 마음,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으로

이런 마음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립니다.

선심은 탐욕이 없는 마음, 성냄이 없는 마음,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립니다.

 

탐욕이 없는 마음은 관용이 있는 마음이며,

성냄이 없는 마음은 자애가 있는 마음이며,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은 지혜가 있는 마음입니다.

 

수행자는 불선심만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선심이 일어난 것도 똑같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은 하나인데 이처럼 선심과 불선심이 있습니다.

선심인 관용, 자애, 지혜가 있을 때는 그 순간에 불선심이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불선심인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있을 때는

그 순간에 선심이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심을 알아차리면 불선심이 붙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심으로 인해 교만해지는 마음까지 제어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불선심을 알아차리면 선심이 생기며

불선심으로 인해 더 나빠지는 것이 제어가 됩니다.

 

일반적으로 불선심과 선심이 일어날 때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불선심도 거친 마음이 있고, 중간의 마음이 있고, 미세한 마음이 있습니다.

 

거친 마음도 알아차리기 어려운데

하물며 미세하게 일어나는 마음은 알아차리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불선심이 일어나도 우리는 대책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은 자기 습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선심이 일어난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어떤 대상을 알아차릴 때 마음이 대상을 겨냥하는 순간에는 청정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알아차림만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알아차림과 함께 분명한 앎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것은 일단 마음을 대상에 겨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앎은 대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겨냥하는 것은 화살을 쏘아서 피를 흘리게 하려고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대상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대상을 겨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을 한다고 해서 수행이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을 함께 하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보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을 하는 수행에다가

다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더 보태어서 수행을 합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면 한결 더 수행의 깊이가 깊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불선심을 보지 못하면서 남의 불선심을 봅니다.

그리고 남을 비난합니다.

남의 잘못을 보면 불쾌하게 여기고 미워하고 화를 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순간의 자신이 가진 불선심은 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보고 비난하는 것이

바로 불선심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잘못에 잘못으로 대해서는 아무런 개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남의 잘못은 남의 잘못으로 그냥 두고

그것을 보는 자신의 마음이 불선심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탐욕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내가 남을 비난할 때 그 사람의 수준과 같아집니다.

그러므로 비난 받을 짓을 한 사람이나 그것을 보고 비난을 하는 사람이나

정신적 수준이 똑같습니다.

 

그러나 남의 잘못을 보고 ‘몰라서 그랬네.’ 하고 관용으로 이해한다면

그는 잘못을 행한 사람보다도 정신적으로 우월한 사람입니다.

이때 이런 관용을 보이기 위해서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과 함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불선심의 종류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탐욕입니다.

탐욕의 종류는 많습니다.

탐욕과 유사한 것은 갈애와 집착입니다.

그리고 사견과 자만도 탐욕에 의해서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갈애는 초기에 일어난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갈애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집착으로 발전합니다.

집착은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또 다른 탐욕입니다.

이러한 탐욕은 탐욕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업을 생성하여 반드시 원하는 것을 움켜쥡니다.

그래서 단지 집착하는 마음으로 그치지 않고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리하여 업을 생성하여 필연적으로는 그에 합당한 과보를 받습니다.

 

탐욕은 포기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즐길 거리를 찾아 방황합니다.

그것이 즐길 거리라면 이익과 손실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경에는 파국을 맞습니다.

이것이 감각적 욕망에 눈이 먼 탐욕의 결과입니다.

마치 강물이 바다에 빠르게 쓸려가듯이 탐욕의 결과는 자명합니다.

 

탐욕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유사한 것도 있지만 탐욕 그 자체도 거친 것과 중간 것과, 미세한 것이 있습니다.

거친 탐욕은 알아차릴 수 있지만

중간정도의 탐욕이나 미세한 탐욕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좌선을 할 때 몸이 아프면 자세를 바꾸고 싶은 것도 사실은 탐욕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탐욕인줄 모르고 자세를 바꿉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일상이 모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인데

이것들이 미세해서 탐욕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삽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차츰 의식의 깊은 층에 있는 탐욕까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이 깊은 층의 의식이 표피로 올라와서

비로소 본질적인 탐욕을 제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음식을 선택하는 것도 탐욕으로 하며, 음식을 먹는 것도 탐욕으로 먹습니다.

그래서 맛있는 것만 골라서 먹고,

맛있는 것을 골라 먹으면서도 얼마 씹지도 않고 삼켜버립니다.

이것이 모두 탐욕으로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식을 먹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탐욕으로 선택하지 않고, 탐욕으로 먹지 않습니다.

그냥 음식의 맛으로 먹습니다.

이렇게 먹으면 음식의 재료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맛을 알면서 먹습니다.

이렇게 먹어야 계율을 지키면서 먹고 음식을 먹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는 모든 대상이 모두 탐욕에 의해 선택된 것들입니다.

술, 담배, 도박, 마약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면 모두 거친 탐욕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거짓말, 도둑질, 살생, 불륜 등은 이것보다 더 거친 탐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헤어질 때 슬픔에 잠깁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비탄에 빠집니다.

이때도 죽은 사람이나 헤어진 사람에 대하여 탐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갔지만 내 마음이 보내지 않아서 붙잡고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탐욕입니다.

 

일반적으로 슬퍼하는 것을 좋아서 슬퍼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이것은 미세한 탐욕이기 때문에 탐욕인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탐욕은 좋아하는 것을 바라는 것으로 슬픔과 비탄까지도 좋아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