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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29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2:3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과거의 원인으로 현재가 있습니다.

다시 현재의 원인으로 미래의 결과가 있습니다.

 

전생에서 쌓은 탐욕이 없는 마음은 현재까지 지속됩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관용의 과보로 인하여

보시를 행하고 많은 이익을 얻습니다.

 

전생에서 쌓은 성냄이 없는 마음은 현재까지 지속됩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자애의 과보로 인하여

계율을 지키고 불행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전생에서 쌓은 어리석지 않은 마음은 현재까지 지속됩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지혜의 과보로 인하여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해탈의 기쁨을 얻습니다.

 

전생이란 금생에 태어나기 이전의 과거 생,

금생에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시간을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이생에 쌓은 탐욕이 없는 마음은 다음 생까지 지속됩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관용의 과보로 인하여

보시를 행하고 많은 이익을 얻습니다.

 

이생에서 쌓은 성냄이 없는 마음은 현재까지 지속됩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자애의 과보로 인하여

계율을 지키고 불행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이생에서 쌓은 어리석지 않은 마음은 다음 생까지 지속됩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지혜의 과보로 인하여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해탈의 기쁨을 얻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성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혐오는 법에 대한 무지 때문에도 일어납니다.

무지하면 좋은 것을 나쁘게 보고, 나쁜 것을 좋게 봅니다.

그래서 무지 앞에서는 무엇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같은 것도 마음가짐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무지와 지혜의 차이입니다.

 

무지는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몰라서 그랬는데, 그래 어쩔 거야!’ 라고 오히려 항의를 합니다.

모르는 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모르는 것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지는 양심이 없기 때문에 모르는 것을 오히려 위세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혐오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함께 수행하는 도반이 있는데 한 사람은 계속해서 수행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중도에 포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포기를 한 사람이 수행을 계속하는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한다면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 그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이때 시기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지한지를 결코 모릅니다.

사실은 그래서 시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상대의 무지함을 누구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시기를 받는 사람은 그냥 상대의 일이라고 알고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로 인해 괴로움을 당할 때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상대에게 불쾌한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상대에게 화를 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자는

이때 불쾌한 말이 상대의 불선업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이런 말을 듣는 이는 자신의 악업으로 인해서 생긴 결과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바로 가슴으로 와서

그 비난으로 인해서 생긴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상대에게서 답을 구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문제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상대로 하여금 마음이 바뀌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 때문에 많은 날을 지새우면서 괴로움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그가 내게 화를 내고 나를 비난한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날들 동안 고통 속에서 그를 원망하며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게 화를 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당신이 내게 이런 비난을 했기 때문에

당신이 잘못했는데 나는 이런 고통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상대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반문합니다.

아니 당신이 나를 비난한 것을 모르느냐고 물으면 나는 그런 기억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나를 가해한 상대는 잊어버려서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자유로운데

당한 나는 그것을 기억하여 오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면 이것은 불공평한 일입니다.

 

바로 이 불공평을 조장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것은 상대가 아닙니다.

상대가 화를 낸 뒤에 그것을 받아들여서 내 기억 속에 저장하고 계속계속 생각한

자신의 잘못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잘못은 상대의 것으로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뜻하지 않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삽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무지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알아차릴 수 있는 자신이고,

그래서 자신이 자신의 업으로 돌리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상대의 변화는 기대할 수없는 것이라면 내가 방관할 것이 아니고,

자신의 알아차림으로 해결해야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미덕일 뿐만 아니라

가장 이익이 큰 것이라서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할 덕목입니다.

 

상대적인 세상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일정 부분의 자신의 과보도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왜 그렇게 예뻐! 그래서 당신이 미워죽겠어!’라는 말을 들었다면

사실은 예쁜 것도 상대를 자극하는 하나의 과보입니다.

 

세상의 과보란 이런 것입니다.

예쁜 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미운 그의 마음은 그의 마음이지 내가 어찌하겠습니까?

이런 과보는 어떤 것이 되었거나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현재 나타난 대상을 알아차리면

불선 과보에 대하여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적어집니다.

 

내가 잘나고 상대가 못난 것이나, 내가 못나고 상대가 잘난 것이나

이것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면 안 됩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런 과보가 모두 적용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는 과보 속에서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할 수도 있고 뜻하지 않은 성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어떤 형태로든, 그것이 옳거나 옳지 않거나 간에

상대가 자신에게 한 비난을 내가 일으킨 선하지 못한 과보로 인해서 일어난 것으로

수용해야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여야 이 과보심으로 인해서 새로운 선하지 못한 과보심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상대의 비난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상대의 불선 과보심에

자신의 불선 과보심이 일어나 끝없이 주고 받아야합니다.

바로 우리가 윤회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 주고받는 것들이 연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악순환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자신이 알아차려서

스스로 혐오를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좋고 상대도 좋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오직 자신이고 그 자신의 알아차림밖에 없습니다.

 

성냄은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 중에서

항상 함께 일어나는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이 아니고,

다양하게 결합하는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선하지 못할 때는 어느 때나 항상 함께 있는 마음의 작용은

어리석음,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들뜸 4가지입니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이 나타날 때 항상 있는 마음의 작용이 아니고

때때로 나타나는 마음의 작용이 바로 성냄입니다.

성냄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선심을 가졌다고 해서 항상 화를 내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화를 낼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만 화를 냅니다.

 

바로 이것이 기회입니다.

어리석음은 항상 있어서 어찌할 수 없지만

성냄은 알아차림에 의해서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차려서 화를 내지 않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러한 화를 낼 때는 두드러지게 성냄과 함께 질투와, 인색과, 후회가 함께 있습니다.

 

먼저 성냄과 함께 있는 질투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질투는 성냄과 함께 일어나는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질투는 남이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된 것을 나누어 갖지 않는 행위입니다.

 

질투는 남의 성공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남의 성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질투는 대부분 인색함과 함께 일어납니다.

 

질투가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알아차림으로써 나와 남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남을 배려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면 오직 자신만을 아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질투심이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자기에게 질투심이 있다는 것을 알기도 하는데

자신이 추악하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보고도 보지 못한 척 하기 때문에

철저한 자성이 없어서 다음에도 계속해서 똑같은 질투를 해야 합니다.

 

질투심은 나의 질투심이 아닙니다.

그 순간 조건에 의해 일어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질투심이 일어났을 때 질투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가슴에 가서 느낌을 지켜봐야 합니다.

 

질투는 나와 남을 비교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남의 좋은 점을 칭찬해주면 자신이 칭찬을 받습니다.

남의 허물을 들추면 자신의 허물이 드러납니다.

남의 성공을 시기하면 자신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남을 혐오하면 자신이 혐오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자신과 남을 분리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빠사나라는 말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자신과 남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오랜 동안 질투하면서 살아온 습관을 개선해야 하겠습니다.

 

다음에 성냄과 함께 있는 인색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인색도 성냄과 함께 일어나는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인색한 것에 탐욕과 이기심과 질투하는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대체로 마음은 하나만 일어나지 않고 여러 가지의 마음이 결합하여 일어납니다.

그래서 선하지 못한 마음을 알아차리면 여러 가지의 마음이 함께 소멸합니다.

 

인색한 마음이 있으면 무엇이나 남과 나누어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좋은 일은 자신에게만 있어야 하고 남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인색한 마음은 풍요하지 못하고 삭막하기 때문에 고독하게 살아야 합니다.

 

남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혼자만 소유하려는 마음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재물이 많다고 해도 그는 부자가 아닙니다.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는 재물은 이미 재물이 아닙니다.

이처럼 재물이 아닌 것을 재물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인색한 마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숨깁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드러나면 남에게 빼앗길까봐서 오히려 없는 척합니다.

 

질투가 남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 마음이라면

인색은 오히려 자신의 성공을 숨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인색한 사람은 위축된 채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가진 것은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인색한 마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사용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남도 사용하지 못하고 자신도 사용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색한 마음의 실재입니다.

누구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온갖 잘못을 저질렀다면

이것은 더 큰 불선행에 속합니다.

 

인색하면 남에게 베풀어도 이익을 위해서

베푸는 조건이 붙어있다면 이것은 베풀어도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라는 것이 있는 공덕행은 그 공덕행의 의미가 반감됩니다.

바라지 않고 했으면 완전한 공덕이 될 것인데

바라면서 했기 때문에 공덕의 과보가 줄어듭니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입니다.

 

남에게 베풀어도 자신에게 베풀지 않으면 인색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베풀어도 남에게 베풀지 않으면 인색한 것입니다.

인색한 사람은 인색한 것을 좋아하면서 살기 때문에 살아서도 굶주리는 아귀로 삽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굶주리는 아귀로 태어납니다.

 

아귀는 항상 굶주림 속에서 살며,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채로 삽니다.

그리고 먹으면 토합니다.

이런 사람은 과거에도 아귀였으며 현재에도 아귀의 마음이고

미래에도 아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누가 결정합니까?

부처님께서 결정합니까?

아라한이 결정합니까?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이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인색하다면 그것이 아귀의 마음이라고 알아야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