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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64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01:1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내가 상대를 보고 하는 말이나 행위는

모두 자신의 마음을 반영한 것입니다.

 

상대는 단지 대상일 뿐이며

실제는 말하는 자신의 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말하거나 또는 자신에 대해서 말하거나 간에

모두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지 결코 다른 대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오직 자신의 마음을 말합니다.

대상은 단지 자신의 마음을 말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말을 하거나 말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으로 시작된다는 원인을 압니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 마음이 자신의 마음이 아니고

단지 그 순간의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를 얻는 방법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는 나타난 대상을

단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순간에

어떤 선입관이나 번뇌가 침투하지 않고 온전하게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게 됩니다.

이렇게 청정한 상태에서 고요함이 생깁니다.

이러한 고요함에 의해 비로소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집중의 상태에서 무상의 지혜가 납니다.

이러한 지혜가 나야 나의 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몸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거나 어떤 선입관으로 대상을 보면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품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흙탕물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비쳐볼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오직 거기에 대상이 있어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자신의 마음이 정화되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물질적 형상은 아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며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색은 무상한 것입니다.

색이 일어난 순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여 실재를 왜곡합니다.

그러므로 색이 일어나는 순간에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색은 괴로움입니다.

색은 그 순간의 감각기관이 하는 것으로 나의 색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다음 경전 구절은 느낌입니다.

“이것이 느낌[受]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여기서 말하는 느낌을 한문으로 수(受)라고 합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모두 느낌으로 압니다.

그러나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대상을 법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느낌이 일어났을 때 일어난 느낌으로 인해서

새로 반응한 느낌이 일어나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 것이 아닙니다.

느낌을 알아차릴 때는 단지 아는 느낌 이외의 느낌으로 변화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느낌은 즉시 더 좋아하는 느낌으로 진행되거나,

더 싫어하는 느낌으로 진행되거나,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지하고 덤덤한 느낌으로 머물기 마련입니다.

 

느낌은 언제나 갈애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와,

존재에 대한 갈애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일으킵니다.

이처럼 더 좋은 느낌을 원하고, 더 잘살기를 원하거나,

더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원하고, 아니면 때로는 죽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모두 바라는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은 물론이고 더 좋은 곳에 태어나고 싶은 것도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윤회를 계속하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기를 원하는 것도 죽는 것을 좋아서 바라는 갈애에 속합니다.

이것들이 모두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새로 반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자는 대상과 아는 마음이 부딪칠 때

항상 알아차림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뒤에 알아차리면 이미 느낌이 빠르게 반응하기 때문에

좋거나 싫은 느낌으로 진행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맨 처음에 느끼는 느낌은 좋아하거나 싫어나는 느낌이 아닙니다.

이때 일어난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느낌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느낌이 일어났을 때 느낌으로 알아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즉시 반응합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것이 나의 느낌이라고 압니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느낌은 일어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느낌이 항상 하거나 영원한 것으로 압니다.

 

느낌의 실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릅니다.

느낌은 항상 하지 않고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느낌은 즐겁지 않고 불만족스러운 것입니다.

느낌은 깨끗한 것이 아니고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느낌은 나의 느낌이 아니고 단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는 느낌이며,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낌은 무아입니다.

 

다음 경전 구절은 인식입니다.

“이것이 인식[想]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식을 한문으로 상(想)이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인식[想]이 일어날 때 이것이 인식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인식은 지각, 표상작용, 명칭, 상상력입니다.

인식[想]은 느낌[受]과 마음의 형성[行]과 함께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물질적 형상[色]이나 느낌[受]처럼 분명하게 나타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식은 미세한 대상이기 때문에 사실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인식[想]은 대상이 나타날 때

감각기관의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적 과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대상을 아는 마음[識]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대상을 인식할 때는 인식한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간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에 의해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안다면

바로 이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꾸며서 대상을 보거나 선입관을 가지고 대상을 보면

실재하는 현상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인식은 아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며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인식은 무상한 것입니다.

인식이 일어난 순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실재를 왜곡합니다.

 

그러므로 인식을 하는 순간에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인식은 괴로움입니다.

인식은 내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경전의 다음 구절은 마음의 형성[行]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行]이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의 사라짐이라고 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형성을 한문으로 행(行)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의도가 있는 행이기 때문에 업(業)이라고 합니다.

 

오온의 행은 과거의 행이 있고, 현재의 행이 있습니다.

과거의 행은 업의 형성이고, 현재의 행은 업의 생성입니다.

현재는 과거의 행에 의해서 생겼습니다.

그리고 미래는 현재의 행에 의해서 생깁니다.

수행자는 오직 미래의 원인이 되는 현재의 행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는 과거의 행을 알아차릴 것이 아니고 항상 현재의 행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 행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을 알아차릴 때는 먼저 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를 알아차린 뒤에 현재 하고 있는 행위 그 자체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의 형성은 아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며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행은 무상한 것입니다.

행이 일어난 순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실재를 왜곡합니다.

그러므로 행이 일어나는 순간에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행은 괴로움입니다.

행은 그 순간의 감각기관이 하는 것으로 나의 행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경전의 마지막 구절은 식입니다.

“이것이 의식[識]이다.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라고 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식을 한문으로 식(識)이라고 합니다.

식은 대상을 아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구별할 때의 마음인 심(心)이 있고,

감각기관의 마음인 의(意)가 있으며,

대상을 아는 마음인 식(識)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들 3가지는 모두 같은 마음입니다.

다만 쓰이는 용도에 따라서 다르게 부를 뿐입니다.

 

아는 마음은 6가지 감각기관에 들어오는 대상을 모두 알아차립니다.

그러므로 6가지의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는 마음[識]은 몸[色]과 마음의 작용인

수(受), 상(想), 행(行)과 함께 일어나며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마음은 무상한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난 순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의식을 하는 순간에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마음은 괴로움입니다.

아는 마음은 내가 아는 것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자는 어느 특정한 오온을 선택하지 않고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자유롭게 알아차립니다.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거나,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거나,

인식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거나,

마음의 형성을 알아차리거나,

이것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거나, 어떤 것이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수행을 시작할 때 처음에는 강한 대상을 알아차려서 차츰 집중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미세한 대상을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강한 대상을 알아차린 뒤에

차츰 대상이 미세해지면 미세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오온을 알아차릴 때 먼저 자신의 오온을 알아차립니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상대에게도 있는 오온을 똑같이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오온과 상대의 오온을 번갈아가면서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먼저 안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음에는 밖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다음에는 안팎을 알아차립니다.

이런 알아차림의 위치를 선택하는 것은

수행자가 여러 가지 상황에서 적절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오온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오온의 궁극의 실재인 무상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괴로움으로 불리는 불만족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상, 고, 무아를 알아야 비로소 오온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온의 궁극의 실재는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조건에 의해서 소멸하는 것,

그것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러한 오온의 실재를 알아서

나의 오온이라고 집착하지 않아야

그 자리에 지고의 행복인 열반이 드러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