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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66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01:18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마음에는 종자가 있어서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 마음이 다음 마음에 전해집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선한 마음이 되고

이 선한 마음의 종자가 다음 마음에 상속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면 행복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리지 못하면

선하지 못한 마음이 다음 마음에 전해져서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시작하거나 처음에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 순간의 청정한 마음으로 바뀌어 다음 마음이 청정한 상태로 일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한번 알아차렸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청정한 마음이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알아차림을 지속할 때만 청정한 마음이 상속되어서 항상 행복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모든 것의 근본원인은 무명과 갈애입니다.

어리석음과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알아차림을 확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지혜가 없다면 필연적으로 10가지의 족쇄가 일어납니다.

 

수행자는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보는 즉시 알아차리면 10가지 족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힘을 키우면 지혜가 나서

차츰 족쇄의 힘이 약해지고 나중에는 저 스스로가 사라집니다.

그렇지 않고 이러한 족쇄를 없애려고 하거나,

이것을 없애기 위해서 다른 것을 바란다면 족쇄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습니다.

 

수행자는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다시 족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족쇄가 일어난 원인을 제거하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족쇄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려야 하며,

알아차린 결과로 족쇄가 사라진 것을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족쇄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알아차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사라진 족쇄가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이때 다시 이러한 번뇌가 나타난다면

처음부터 이러한 과정을 다시 되풀이해서 시작해야 합니다.

 

언제나 번뇌의 힘은 큽니다.

오랫동안 생성되어 온 것이라서 제거하려고 해도 제거되지 않습니다.

이 번뇌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알아차리는 것이고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이것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만약 쉽게 결과를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번뇌의 힘을 키우는 결과가 생깁니다.

이러한 악순환이 모든 사람들의 삶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는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라진 족쇄가 확실하게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나서 도과를 성취해야 합니다.

이것은 생각이 아닌 위빠사나 수행의 실천을 통해서 얻는 것입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사견, 의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이 소멸됩니다.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하면 사견, 의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이 소멸되고

감각적 욕망과 악의가 약해집니다.

 

아나함 도과를 성취하면 사견, 의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감각적 욕망과 악의가 완전하게 사라집니다.

마지막으로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하면 10가지 족쇄가 모두 소멸합니다.

 

도과를 성취한다는 것은 열반을 의미합니다.

열반은 번뇌가 불타버린 최고의 집중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수다원의 열반과, 사다함의 열반과, 아나함의 열반과,

아라한의 열반의 종류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열반이냐에 따라서 번뇌가 불타는 종류가 달라집니다.

이렇듯이 번뇌도 도과의 지혜에 따라서 소멸되는 종류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살아가면서 번뇌가 없기를 바란다면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도과를 성취해야 합니다.

 

이 길은 부처님께서 체험하시고 직접 저희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길입니다.

그래서 이 길이 아닌 곳에서는 괴로움을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몰라서 이 길을 가지 못했다면 이제 알았으니 이 길로 오셔야 합니다.

 

법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법은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도과를 얻는 출발입니다.

 

우리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도 그 진리를 실천하지 않고서는 진리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예외적으로 도과를 성취하지 않아도

12연기법을 철저하게 숙지한다면 의심에서 해방되는 지혜를 얻습니다.

그러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4악도에서 태어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해야 4악도에서 태어나지 않지만

12연기법을 숙지하였다면 4악도에서 태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불선행을 하면 불선과보를 받는다는 원인과 결과를 알기 때문에

12연기를 공부한 사람은 4악도에 떨어질 악행을 범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 수행자는 알았습니다.

번뇌는 6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통해서 들어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이므로

모든 원인은 감각기관이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러한 감각기관을 감각영역, 감각장소, 감각기반, 감각토대 등으로 부릅니다.

무엇이나 어떤 기반을 토대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반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해야 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6가지 감각기관을 지키는 문지기입니다.

만약 문지기가 없으면 번뇌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제집 드나들듯이 들락거릴 것입니다.

그래서 번뇌와 함께 동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수행자는 한 가지를 더 알았습니다.

도둑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6가지 감각기관에서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얼마나 문지기 역할을 충실히 했는가 하는 것으로

수행의 기준을 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혜를 계발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번뇌가 들어오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고,

번뇌가 사라졌으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고,

번뇌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들어오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런 단순한 알아차림만이 끈질긴 번뇌와의 다툼에서 구출되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경전의 다음 구절은 귀에 관한 것입니다.

 

“비구는 귀[耳]를 알아차리고,

소리[聲]를 알아차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를 알아차린다.

 

비구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안다.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가 소리를 들을 때는 귀라는 감각기관과 소리라는 감각대상이 부딪쳐서

소리가 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이때 귀라는 감각기관과 소리라는 감각대상이 부딪친 것을

다시 아는 마음이 받아들여서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알아차림이 있으면 번뇌가 침투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시끄러운 소리라고 화를 내거나 달콤한 소리라고 감각적 욕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소리는 단지 소리일 뿐입니다.

소리는 일어날만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일어날만해서 일어난 소리를 자신의 입장에서 들으면

일어날만한 당위성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고통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소리는 내게 유익하고

어떤 소리는 내게 유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익한 것에 좋은 느낌이 일어나고,

유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싫은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소리하고 상관없이 온전히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이때의 소리는 단지 원인을 제공했을 뿐이지 결과는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소리로 인해 어떠한 느낌이 일어났다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때 일어난 좋은 느낌이나 싫은 느낌이 바로 족쇄입니다.

 

족쇄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반응한 느낌입니다.

이러한 느낌이 다양한 형태의 번뇌로 번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느낌일 뿐입니다.

소리라는 단순한 느낌에 여러 가지 형태로 반응했다면

이것은 자신의 유신견으로 인한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귀라는 감각기관과 소리라는 감각대상이라는 2가지 조건은 원인과 결과입니다.

귀라는 원인이 있어서 소리라는 결과가 있습니다.

다시 귀와 소리라는 원인이 있어서 이것을 아는 마음이란 결과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소리를 듣고 아는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수행자는 여기서 새로운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 합니다.

 

귀와 소리와 아는 마음이라는 원인이 있어서 이것을 깨어서 아는 결과가 수행입니다.

6가지 감각기관이 6가지 감각대상과 부딪쳐서 6가지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일반적 의식과정입니다.

 

수행자는 여기에 새로운 형태의 과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아는 것에 알아차림이란 원인을 만들어서

깨어서 아는 결과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아는 것은 일반적으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알아차림이란 새로운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만 통찰지혜가 성숙됩니다.

수행자는 반드시 이러한 지혜가 계발되는 마지막까지 인내를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도과를 성취해야 비로소 노력한 결과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수행자에게는 2가지 선택만 있습니다.

감각기관을 기반으로 해서 들어오는 번뇌를 알아차려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감각기관을 기반으로 해서 번뇌가 들어와도 좋으니 알아차림을 할 필요가 없는가,

하는 이 2가지의 선택입니다.

 

하나는 아는 마음이고 하나는 모르는 마음입니다.

이것의 선택은 온전하게 자신의 마음이 합니다.

 

이처럼 눈으로 형상을 볼 때와, 귀로 소리를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코로 냄새를 맡을 때나,

혀로 맛을 볼 때나, 몸으로 접촉할 때나 모두 똑 같은 방식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을 벗어난 어떤 실재하는 진실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와 같이 수행자는 대상을 알아차릴 때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하며,

혹은 대상을 알아차릴 때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혹은 대상을 알아차릴 때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기도 해야 합니다.

 

하루 중에 수행자가 처한 상황은 다양합니다.

어떤 때는 조용히 혼자만 있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상대가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마다 알아차리는 방법을 달리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릴 수도 있으며,

때로는 감각대상에 두고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을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에 동시에 안팎에 두고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고집하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상대가 있을 때는 마음을 상대에 두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상대가 말을 하는데 마음을 자신의 감각기관에 두고 있으면 상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상대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빠사나 수행이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은 중도적 관점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8정도라고 말하기도 하고 중도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남을 모두 함께 배려하는 마음으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자의 기본적인 알아차림은 항상 자신의 감각기관에 두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서 탄력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바른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마음을 두거나 대상을 깨어서 알아차리는 마음만 있으면 훌륭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대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는 진리의 성품을 알기 위해서 4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첫째, 몸을 알아차려서 매순간 변하는 무상의 성품을 압니다.

둘째, 느낌을 알아차려서 고통의 성품을 압니다.

셋째, 마음을 알아차려서 자아가 아니라는 무아의 성품을 압니다.

넷째, 몸과 느낌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존재하는 것들의 일반적 특성인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압니다.

 

이렇게 신, 수, 심, 법이라는 4가지 대상을 알아차려서

무상, 고, 무아의 3가지 자각이 일어나면

갈애가 끊어져서 해탈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