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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68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01:2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모르는 고통이 있습니다.

책임자에게는 책임이 없는 사람이 모르는 고통이 있습니다.

지혜가 있는 자는 지혜가 없는 자가 모르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에게도 부모가 모르는 고통이 있습니다.

책임이 없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는 사람이 모르는 고통이 있습니다.

지혜가 없는 자에게도 지혜가 있는 자가 모르는 고통이 있습니다.

 

누구나 각자의 위치에서 저마다의 고통을 가지고 삽니다.

어떤 경우이거나 나의 고통이 있는 것처럼

상대에게도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나의 고통만 고통이고 남의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고 한다면 나의 고통이 더 커집니다.

나의 고통처럼 남의 고통을 헤아리면 이미 그것은 고통이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에 대해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의 시작은 먼저 알아차림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이때의 대상이 사념처입니다.

 

누구나 지금까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삼아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 생소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알아차릴 대상이 자신의 몸과 마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이 어렵다고 말하거나 수행이 잘 안된다고 하는 경우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결과입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을 때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처음에는 대상을 알아차려야 하며 알아차린 뒤에는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의 역할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기도록 잊지 않고 노력해야 합니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대상에 겨냥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대상을 깨어서 지켜보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서 보지 못한다면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바로 알아차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잠시 두 손바닥을 마주 대보십시오.

이때 손이 닿은 것을 아는 것이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손을 아는 것은 관념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빠사나 수행이 아닙니다.

이때 손이 닿은 느낌을 아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같은 알아차림이라도 모양으로의 손을 알 때는 관념으로 아는 것이며

손이 아닌 손에 있는 느낌을 아는 것이 바로 실재를 아는 것입니다.

 

잠시 두 손이 닿은 느낌을 느껴보십시오.

따뜻한 느낌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건조하거나 축축한 느낌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단단함이나 부드러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진동을 느낄 수도 있고 무거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느낌입니다.

이때 알아차림이 있는 것이고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에는 두는 알아차림이 있고, 있는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는 열심히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두는 알아차림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차츰 지혜가 나서 알아차림과 지혜가 함께 있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있는 알아차림이 생겨 알아차리는 힘이 커집니다.

이것이 바로 있는 알아차림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알아차리고 있는 것을 다시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수행자의 5가지 근기인 믿음,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 중에서

믿음과 노력과 집중과 지혜는 적절해야 하며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 하나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이 말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원하는 만큼 알아차리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했다가 알아차림을 시작해도

이 알아차림을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기 시작한 뒤에 알아차림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알아차리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은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라서 알아차림과 함께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알아차림이 하나의 바퀴라면 다른 하나의 바퀴는 분명한 앎입니다.

알아차림이란 겨냥과 분명한 앎이라는 이해가 함께 결합되어야

비로소 더 확실한 알아차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알아차림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알아차리는 것과,

알아차림을 지속하기 위해서 알아차리고 있는 것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리고 있을 때는 알아차리고 있는 것을 알고,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알고 즉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도 주의해야 합니다.

단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아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일반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알고도 다시 알아차림을 지속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알고 새로 알아차림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가슴에 있는 호흡이나 가슴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알아차림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서 생긴 현명한 성찰이 있어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가 무지한 상태라면

이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현명한 성찰이 없어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이러한 믿음과 함께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노력이 없으면 알아차릴 수도 없고 알아차렸다고 해도 이 알아차림을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라는 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차림이 필요한 것을 말합니다.

그 첫 번째 깨달음의 요소가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 자체가 깨달음이 아니고

알아차림이란 행위가 있어서 깨달음의 길을 가는 것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에 의해 일어나는 깨달음의 요소는

항상 하다고 알았던 것을 항상 하지 않다고 아는 것입니다.

즐거움이라고 알았던 것을 괴로움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자아가 있다고 알던 것을 무아라고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에 의해 지혜가 성숙되었을 때는

다시 지혜가 성숙된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더 높은 지혜로 향해서 갑니다.

수행에서 만족이나 안주는 없습니다.

오직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지혜가 나도 그것도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일어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안다’는 것은

도과를 성취했을 때도 알아차려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가 나도 알아차릴 대상이면 도과를 성취해도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수다원에서부터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해도 이것이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알아차림으로 시작해서 알아차림으로 끝이 납니다.

이 이상은 없습니다.

이때 끝은 끝이 아니고 알아차림이 계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미얀마에서 아라한으로 알려진 큰스님께 법문을 요청하면

항상 첫째 인사가 알아차리라는 말이셨습니다.

그리고 법문도 알아차리라는 말이 법문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헤어질 때 인사도 알아차리라고 하는 말로 끝내셨습니다.

이토록 위빠사나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알아차림이 전부인 것입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알아차림과 함께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들뜨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을 피하고,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사람과 사귀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알아차리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잊지 않고 노력을 해야 알아차릴 수 있으며,

계속해서 노력을 해야 알아차림이 지속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에 대해서

알아차린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나머지 6가지의 깨달음의 요소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7가지 깨달음의 요소는 모두 최고의 지혜로 가는 과정의 지혜이므로

알아차리는 방법이 동일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의 지혜가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단계의 깨달음의 요소인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그 다음 단계인 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擇法覺支]의 요소입니다.

 

법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리고 고찰은 대상을 조사하고 탐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먼저 대상을 알아차리고 난 뒤에

마음을 대상에 머물게 하여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맹목적인 믿음을 갖지 말고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탐구해본 뒤에

지혜가 나면 그때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질 것을 권하셨습니다.

이때의 대상의 탐구가 바로 법에 대한 고찰입니다.

 

이것은 의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런 선입관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실재하는 성품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때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있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법에 대한 고찰이라고 할 때의 법은 대상을 말합니다.

이때의 대상이 정신과 물질입니다.

여기서 정신과 물질을 고찰한다는 것은 정신과 물질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신이고, 이것은 물질이라고 구별해서 아는 것입니다.

정신과 물질이 하나가 아니고 정신적 영역과 물질적 영역이 있어서

서로의 영역에서 각각의 역할을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을 고찰하면 이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먼저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려서

다음 단계로 호흡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물질도 일어나서 사라지는 것이면

바로 정신도 일어나서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집중에 의해 지혜가 계발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상의 실재하는 성품인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법을 고찰할 때는 관념이 아닌 실재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을 알아차릴 때는 모양으로서의 몸이 아닌 몸이 가지고 있는 실재인

지, 수, 화, 풍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은 느낌으로 드러납니다.

 

이렇게 대상을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나’라거나 ‘너’라고 하는 개념으로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쁘다거나 밉다고 하는 개념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관념이 아닌 실재를 알아차리는 것이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알아차릴 때만이 대상이 가지고 있는 궁극의 실재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법을 바르게 고찰한 것입니다.

 

법에 대한 고찰은 팔정도의 바른 견해[正見]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법의 고찰은 바른 지혜를 말합니다.

법에 대한 고찰은 정신과 물질을 있는 그대로 보아서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팔정도의 바른 견해도 정신과 물질을 있는 그대로 보아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법에 대한 고찰은 유익한 것이나 해로운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물랄 것이 없는 것과 나무라야 할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닦아야 할 것과 닦지 않아야 할 것, 고상한 것과 천박한 것,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숙고하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에 대한 고찰이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법에 대한 고찰을 더 커지게 합니다.

그래서 법에 대한 고찰이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자에게 자양분이 되게 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