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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71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01:5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모든 번뇌의 원인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탐욕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문제는 오직 자신의 마음가짐에 원인이 있습니다.

타인이나 가족 사회 국가 때문이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좋지 않은 조건이라도 그것은 외부의 현상일 뿐이며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자신의 허물은 보지 않고 잘못의 원인을 밖으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도 내가 있어서 허물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해온 행위에 대한 과보가 그렇게 조건을 성숙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 무아를 아는 수행이고,

이렇게 무아를 알아야 어리석음과 탐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마음집중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집중은 모든 수행자가 일차적으로 지향해야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수행의 모든 방편은 집중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집중을 위해서 지나치게 집중을 하면

마음이 집중이 되지 않고 들뜰 뿐만 아니라

또 집중이 지나쳤을 때는 졸음에 빠집니다.

그래서 집중은 항상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집중이란 말을 모는 마부처럼,

평등심을 가지고,

마음을 억제하거나 기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산만하고 집중력이 약한 사람을 피해야 합니다.

집중력이 있는 사람과 친하게 사귀어야 합니다.

항상 집중을 위해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선정에 들기를 숙고해야 합니다.

 

이상 여러 가지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를 계발하면

수행자는 아라한 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捨覺支]입니다.

 

수행자가 정신과 물질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

존재하는 것들의 특성이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압니다.

원래 이것이 법의 성품이라고 알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알기 때문에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마음이 평온해지고 평등심의 깨달음의 요소가 계발됩니다.

 

평등을 평정, 중립, 또는 한문으로 사(捨)라고 합니다.

빨리어로는 우뻭카(upekkha)라고 합니다.

 

평정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우뻭카는 빨리어 경전에서 10가지 종류로 사용됩니다.

그 중에 9가지는 모두 평등이라는 뜻으로 쓰이나 1가지는 무관심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덤덤한 느낌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때의 덤덤한 느낌은 알아차림이 없는 무관심한 느낌을 말하는 것으로

무지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정이라고 할 때의 우뻭카와

덤덤한 느낌이라고 할 때의 우뻭카는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애써 관심이 없는 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는 관심이 없다기보다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무관심하거나 또는 무관심한 척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한 마음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 덤덤한 느낌이 있을 때도 덤덤한 느낌을 알아차리면

평등심의 중립적인 느낌이 됩니다.

그러므로 덤덤한 느낌은 알아차림이 없는 느낌입니다.

 

평등으로 사용되는 10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라한의 육문에 나타나는 평등함,

높고 고상하게 지내서 양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평등함,

깨달음의 요소에 의한 평등함,

노력에 치우치지 않는 평등함,

행에 대한 평등함,

덤덤한 느낌,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평등함,

중도의 평등함,

선정에 치우치지 않는 평등함,

알아차림이 청정한 평등함이 있습니다.

 

평등의 특징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균형이 있게 합니다.

마음이 중립적인 상태에서 흔들림이 없이 균형을 유지하기 때문에

더불어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도 중립적인 상태가 됩니다.

 

또 마음이 작용이 중립적인 상태가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도 평정을 얻습니다.

그렇게 되면 몸도 가볍고 편안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오온이 평등한 상태가 됩니다.

 

이처럼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가 확립되면

부족함이나 지나침을 방지하는 기능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너무 느슨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팽팽하지도 않고 중립적인 상태로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를 현악기의 줄에 비유합니다.

현악기의 줄이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으며,

너무 조여도 줄이 끊어지기 때문에 알맞은 조율이 필요합니다.

 

수행자가 평등의 상태가 되었을 때는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고 알아차리고,

평등의 상태가 되지 않았을 때는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가 확립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5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에 대하여 평등심을 가져야 합니다.

생명이나 사람에 대해서 갈애를 일으켜 지나치게 좋아하면 평등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뿐더러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에 대하서 미움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면 평등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생명이 자신의 행위로 인해 받는 것이라는 중립적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무엇을 애잔히 여기거나 또는 지나치게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생명들이 저마다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업에 의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업자성정견을 가져야 평등심이 생깁니다.

 

평등심을 갖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과거에 쌓은 업 때문에 여기에 태어났으며,

나 자신의 업 때문에 여기를 떠날 것이다.

그러면 내가 갈애를 일으키는 존재는 누구인가?’

 

이렇게 알아차리면 평등심을 갖기가 쉽습니다.

사실 모든 생명은 그 순간의 몸과 마음이 자기가 지은 업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때 행위와 행위에 따른 과보만 있지 나라고 하는 실체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생명에 대해서도 평등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재산이나 물질에 대하여 갈애가 일어났을 때는

이 재산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잠시 사용하는 것이라는 알아차림이 필요합니다.

누가 가진 것이든 재산이나 물질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도 때가 되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죽을 때 가지고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재산은 때가되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라고 알아야 합니다.

‘이 물건은 언젠가 부서질 것이고 사라질 것이다.’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른 생명들에 대하여 평등심을 갖지 않고 이기적인 사람을 피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 파장으로 인해 평등심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이기적인 것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지혜가 있는 사람은 진리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만나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특히 자식들이나 가까운 지연 관계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바르지 못한 갈애를 갖는 것은 위험합니다.

자식은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이러한 편애가 오히려 자식의 앞날을 어둡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기적인 사람뿐만 아니라

물건에 대해서 이기적인 사람도 피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없지만 물건이나 재산에 관한 것에서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자기 물건에 대해서 인색한 사람은 마음이 인색한 사람이므로 피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과 가까이 하면 평등심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모든 일에 대하여 평등심을 갖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평등심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차림과 법의 고찰과 희열과 평안과 마음집중의 과정을 거쳐서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에 이르지만 이 단계도 내가 얻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상태의 마음을 가졌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수행을 하면 다음단계의 도과를 성취할 수가 있고,

아니면 수행의 지혜가 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현재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상 깨달음의 7가지 요소는 단지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의 단계적 지혜이지

이것 자체가 깨달음은 아닙니다.

이러한 7가지 깨달음의 요소가 있을 때는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없을 때는 없는 것을 알아차려야 마지막 지혜의 과정에 이릅니다.

 

그래서 평등의 지혜 뒤에 적응의 지혜와 성숙의 지혜를 거쳐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에 이릅니다.

그리고 열반에서 깨어나서 회광반조의 지혜를 얻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른 것이 바로 수다원의 도과입니다.

 

수다원의 도과에서 계속해서 수행을 하다가 다시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하기 위해서

똑 같은 수행을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에는 아라한의 도과에 이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상 7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모두 갖추게 되면

비구나 비구니나 남녀 재가나 누구나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괴로움뿐인 윤회에서 벗어나 지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어떤 특정인이나 특정한 종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법은 부처님께서 만드신 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법을 찾아내시고 몸소 체험하신 뒤에

우리들에게 이 길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실재하는 법은

부처 이전부터 자연현상계가 가지고 있는 가장 수승한 법으로 전해져 온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찾아내신 이 법을 아무리 말해도 자신이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위대한 법이 있어도 이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법이지

그렇지 않으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것이 법의 진실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법을 가르쳐주셨지만 이 법은 얻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의 스스로의 노력만이 법을 알게 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와 같이 수행자는 안으로는 자기 자신의 7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알아차려서

이것들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다른 사람의 7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알아차려서

이것들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이 완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항상 나와 남이 함께 있어야합니다.

만약 나만 안다면 그것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보다 완벽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의 문제와 함께 상대의 문제도 배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상대의 문제도 받아들여서 수용하는 지혜가 나야

비로소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반쪽으로는 결코 열반에 이를 수 없습니다.

나와 남이 모두 해결되었을 때 완전한 열반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른 사람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결코 자신의 문제도 완전하게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매 장마다 안과 밖과 안팎을 알아차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7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이들 깨달음의 요소들과 함께 하면서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할 때만이 아라한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공부했습니다.

우리는 이 7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단계적으로 공부해서

마지막에 평등심의 깨달음의 요소에 이른 뒤에

더 지혜를 발전시켜서 도과를 얻는 열반을 성취해야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흔들림 없는 노력으로 이상 7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알아차려서

모든 수행자들이 도과를 성취하시기를 삼가 기원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